송재학, 『풍경의 비밀』,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 한 번 읽었던 책은 거의 안 읽게 되지만 십여 년 전에 읽었던 송재학 시인의 산문집 『풍경의 비밀』을 다시 읽었다. 그때도 책을 읽고 감상글을 짧게 남겼다. 영천이 고향인 시인의 소싯적 이야기, 주변 시인과 시 이야기, 여행을 통해서 간직하게 된 단상과 내면 풍경을 접하면서 작가와 소통하는 잔잔한 기쁨이 있었다고 시작되는 감상글이다. ‘풍경은 비밀을 만들지 않지만 시간과 바람과 사람이 무수하게 쌓이고 지나면서 비밀 아닌 풍경도 없게 된다’고 나름 마무리 멘트까지 그럴듯하게 적어 놓았다.
시인이 언급한 고향 영천 이야기도 혼자 읽기 아까워 다시 옮겨 본다. 중고등학교를 대구에서 나온 시인은 30대 후반이 되어서야 영천을 찾게 되더라는 말끝에 이렇게 적었다.
“임고서원의 은행나무와 임고초등학교의 장엄한 버즘나무는 내 즐겨찾기였다. 노계서원이 있었고, 보현산 가는 길을 사랑하게 되었고, 선운동 옛집을 훑어보거나 기룡산의 맥을 짚게 되면서 삼산이수(三山二水)의 땅을 애정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사학자 김성칠과 소설가 백신애와 하근찬의 고장이 바로 영천이다. 횡계계곡을 따라가는 길의 아름다움은 다른 사람에게 감추고 싶다. 계곡의 끝에서 기룡산의 정기를 모으는 저수지와 아직 맑은 계류와 계류의 장식음 가은 옥간정, 옥간정의 마침표 같은 모고헌 등은 내가 가진 영천 사랑의 중심이다.”
버즘나무로 유명한 임고초등학교는 시인과 동갑내기 이종문 시인이 졸업한 곳이다. 두 살 아래인 이중기 시인은 백신애를 추적하여 전집 발간을 주도한 분이다. 이들이 한때 엄원태 시인이 마련한 영천 시골집에 모여앉아 빗소리를 함께 들은 인연을 시인은 청우헌기(聽雨軒記)란 고아한 문장으로 기록해 두기도 했다.
시인이 일독을 권하는 책의 제일 앞엔 『삼국유사』가 있다. “이 책을 정독하고 이 책의 현장을 찾아서 중세의 생각과 당대의 생각을 비교해본다면 젊은 사람의 세상 읽기는 편견을 완전히 벗어날 뿐 아니라 삶의 연속선상에 대해서도 깊어질 것이다”라고 했다. 이하석 시인이 쓴 『삼국유사의 현장 기행』도 시인이 탐독한 책이다. 시인의 얼굴이란 코너에선 대구고 선배인 이하석 시인의 사물에 대한 해석력과 수석에 대한 취미를 소개하기도 했는데, 탐석 원조 격은 또한 대구고 선배이기도 한 문인수 시인이었다고 한다. 작고한 문인수 시인은 서로 가까이 지내는 장옥관, 엄원태, 송재학을 「장엄송」으로 불렀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박완서 소설가를 기억하는 한 장면도 소설가와 시인의 인간됨을 잘 보여준다. 어떤 문학제에서 다들 말상대를 꺼려하는 사람을 박완서가 관심과 찬탄으로 호응해주며 끝까지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그 분도 이전의 자세를 바꾸어 온건한 태도로 대화를 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취중객담에 지나지 않는 상대의 말을 두고 “선생은 농담을 진지하게 대응하여 농담을 농담으로 끝나게 하지 않고 농담의 아슬함을 격상시켜주었다”고 했다. 무심코 지나게 될 한 장면을 스케치해 두니 그 안에 인물도 그것을 알아보는 눈길도 다 따스하게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임고서원에서 옥간정까지 시인이 아름답다고 여겼던 길뿐만 아니라 ‘금곡사’, ‘흥덕왕릉’ 등을 돌아다닌 것도 『풍경의 비밀』에 영향 받은 바가 적잖을 것이다. 안강 휴게소에서 시인이 마셨다는 커피 한 잔 대신 ‘할매 고디탕’을 맛나게 먹고 저수지를 끼고 금곡사지까지 내처 올랐던 기억이 있다. 원광법사가 신비한 소리를 들었다는 이 외딴 곳에 농사짓는 모자가 그러한 소리를 듣고 있었다고 시인은 책에 적어 두었다. 그 모자를 멀리서 보면서, “운명은 우리가 어쩌지 못하는 궤적”이라는 시인의 말에 공감한 바 있었는데 어쩌다, 읽었던 책을 한 번 더 보는 것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이동훈)
* 사진 배경은 영천 모고헌 향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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