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책)

<영화 에세이> 호우시절

톰소여와허크 2023. 10. 14. 11:44

백정우, 호우시절, 피서산장, 2022.

고레에다 히로카즈, <태풍이 지나가고> 2016.

 

 

- 호우시절은 백정우 영화평론가의 네 번째 영화 이야기로서 비를 소재로 한 영화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비가 어떻게 내리고, 어떻게 보여주었으며, 하필 그때 왜 비가 내려야 했는지 탐색한 추적의 기록이다. 예컨대 비 내리는 장면을 어떻게 연출했는지, 비는 어떤 정서를 담아내는지, 비 오는 장면 한 쇼트를 위해 얼마나 많은 노고가 더해졌는지, 혹은 어떤 감독은 왜 영화마다 비 내리는 장면을 넣는지 등을 망라한다는 말 그대로다. 비 오는 장면 말고도 전체 영화 내용과 영화 주변의 사람과 작업까지 정성스레 소개하는 모습에서 영화 마니아의 안목이 느껴진다.

 

책을 읽은 것을 계기로, 소개된 많은 영화 중에 <로드 더 퍼디션>(2002)<태풍이 지나가고>(2016)를 이번에 새로 보았다. <로드 더 퍼디션>은 역광으로 빗줄기를 강조해서 장엄한 풍경을 연출한 카메라 기술에 관심을 보이고 그 기술이 서사를 돕는 것에 대한 언급이 많았다면 <태풍이 지나가고>에서는 비 오는 장면을 찍는 기술보다는 서사 자체에 초점을 두고 말한다.

다른 장르의 두 영화 모두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로 <태풍이 지나가고>가 한 편의 소설 읽는 느낌을 주는 영화라고 생각했더니 실제로 영화감독인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소설가이기도 하다. 영화 속 주인공인 료타의 직업도 소설가다. 료타는 데뷔 후 문학상을 받기도 했지만 이후 주목받지 못한 채 그리 유망하지 못한 사설탐정으로 살아간다.

복권과 경마로 인생 역전을 꿈꾸지만 이혼 후 양육비까지 밀려 한 달에 한 번 아들을 만나는 시간도 아내의 눈치를 보아야 할 입장이다. 태풍으로 인해 하루를 어머니댁에서 보내게 된 료타와 아내와 아이는 료타의 옛 놀이터에서 바람에 날려가는 복권을 줍는 해프닝을 연출하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이 마지막 장면을 백정우 평론가는 영화의 베스트 신으로 꼽는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며 자신의 꿈을 찾는 것. 가족이라고 해서 꼭 같이 뭉쳐서 움직여야 하는 건 아니다. 영화의 엔딩신이 허허로운 미소를 짓게 만드는 까닭이다.”라고 했다.

내가 꼽는 명장면은 료타가 전당포에 아버지 벼루를 내놓으러 갔다가 다시 들고 오는 신이다. 소설 쓰기를 반대했던 아버지가 자신의 책을 여러 권 사들이고 전당포 노인에게도 준 것을 료타가 알았기 때문이다. 전당포 노인은 굳이 료타가 내준 벼루에 먹물을 떨어뜨려 가면서까지 책에 사인받기를 원한다. 책이 존중받기를 원하는 감독이자 소설가의 마음이 읽힌다. 한 달에 한 번 아이를 만나는 장소가 중고책방 밀집 지역인 것도 그런 의도였을 것이다. 미리 온 아이는 책방에 아버지 책이 없다고 한 마디 하면서 소설 쓰는 아버지의 존재감을 일깨워준다.

백정우 평론가는 고레에다 히로이카 감독의 팬임을 자처한다. <태풍이 지나가고>가 고레에다 감독이 아홉 살 때까지 살던 목조 연립주택에서의 기억을 소환한 자전적 이야기란 설명을 곁들인다. 영화에서 어머니 비중도 크다. 백정우는 어머니를 촌철살인의 멘트를 날리는 일상의 현자이면서 가슴 따뜻한 철학자로 생각한다.

이혼한 아들 료타에게 들려주는 어머니 말씀 중 백정우가 인용한 것은 잃어버린 것을 쫓아가고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며, 그렇게 살면 하루가 행복하지 않은데라는 대사다. 그 직후 대사는 많이 언급되어 생략했을 것이다. 어머니 스스로 명언이라며 아들에게 소설에 써 먹으라고까지 했던 말은 행복이란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으면 손에 쥘 수 없는 거야.”.

이 대사를 들은 료타 혹은 영화를 보는 사람은 무얼 포기하고 무얼 포기하지 말아야 할지 고민스러울 법하다. 때로 포기하는 지혜도 필요하겠지만 어떤 경우든 포기가 쉽지 않다는 역설도 이러한 고민을 더하게 해준다. 누군가를 너무 깊이 사랑하지 않기에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고 이 점은 다들 그렇지 않으냐는 다소 짓궂은 어머니 말에도 관객과 독자는 그런가, 안 그런가 또 한 번 묻게 될 것이다. 마치 소설을 읽다가 멈추어 생각하게 되듯이 영상 속 짧은 순간이 머릿속에 길게 여운을 남기는 것이다.

 

호우시절은 영화 <호우시절>(허진호 감독, 2009)을 떠올리게 하지만 <호우시절>은 책 속엔 따로 언급되어 있지 않은 듯하다. 소개된 <비포 더 레인>(1995)을 보고 싶은 다음 영화로 메모해 둔다. 넷플릭스나 유튜브엔 보이지 않는구나. (이동훈)

 

 

 

'감상글(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세이> 백기만과 씨뿌린 사람들  (0) 2023.11.05
<에세이> 사람이 사는 미술관  (0) 2023.10.23
<소설> 모모  (0) 2023.09.14
<소설> 자기 앞의 생  (0) 2023.09.03
<에세이> 풍경의 비밀  (0) 2023.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