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1575-1641)
광해군은 1575년 선조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공빈 김씨의 소생이다. 공빈 김씨는 그가 세 살 때 죽었으며, 임해군은 그의 동복 형제이다. 그의 이름은 혼으로, 어린 나이에 광해군에 봉해졌다.
선조는 아들이 14명이나 되었지만 정비 의인왕후 박씨의 소생은 없었다. 따라서 서자들 중에서 세자를 선택해야 했다. 선조의 나이가 40세를 넘기자 대신들은 더 이상 세자 책봉을 미루어서는 안된다는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40세가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혹여라도 선조가 미처 세자를 결정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불시에 죽는다면 조정이 혼란에 휩싸일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대신들은 이런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건저(세자를 세우는 일) 문제를 거론했는데, 이 문제를 가장 먼저 내놓은 사람은 좌의정 정철이었다.
정철은 우의정 유성룡, 영의정 이산해, 대사헌 이해수 등과 세자 책봉 문제를 놓고 심각한 논의를 벌였다. 논의 결과 광해군을 세자로 옹립하기로 결정하고 선조에게 주청을 올리기로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정철은 이산해의 계략으로 그만 화를 당하고 만다. 그 후 세자 책봉 문제는 거론되지 못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 분조(비상 사태에 즈음하여 임시로 조정을 분리하는 일)해야 될 상황에 처해서야 비로소 광해군을 세자에 책봉하게 된다. 이때 선조의 총애를 받던 신성군은 이미 병사하고 없었고,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하고 임금의 자질이 없다는 이유로 장자임에도 불구하고 세자 책봉 대상에서 제외된 상태였다. 하지만 이것으로 세자책봉 문제가 일단락된 것은 아니었다.
세자를 책봉하면 명나라에 보고를 해야 했으며, 명에서 고명이 내려와야 정식으로 세자로 확정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명은 장자 임해군이 있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때문에 광해군은 비록 왕으로부터 세자로 선임되긴 했지만 그때까지도 불안정한 처지였다. 그럼에도 광해군은 분조의 소임을 다하여 조야의 명망을 얻게 되었으며, 명의 고명 여하에 관계 없이 모든 대신들은 그를 세자로 받들었다.
그 후 광해군의 계승권은 요지부동한 사실로 인식된 듯하였다. 하지만 전란이 끝나고 인목왕후가 선조의 계비가 되면서 광해군의 입지는 조금씩 약해지기 시작했고 영창대군을 낳자 상황은 더욱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선조가 그렇게도 염원하던 적자가 태어난 것이다. 선조는 적자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시키려는 생각을 가지고 그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일부 눈치 빠른 신하들은 선조의 속내를 파악하고 서서히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게다가 선조는 영의정 유영경을 비롯한 몇몇 신하들을 모아놓고 공공연히 '영창대군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상황이 이쯤 되자 대신들은 암암리에 영창대군 지지파와 광해군 지지파로 분리되고 말았다.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는 광해군이 서자에다 차남인 까닭에 명나라의 고명도 받지 못했다면서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1608년 선조는 병이 악화되어 사경을 헤매는 지경에 처하자 현실적인 판단에 근거해 광해군에게 선위교서를 내린다. 그런데 선위 교서를 받은 영의정 유영경은 이를 공포하지 않고 자기 집에 감춰버린다.
이후 이 일은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파의 거두 정인홍, 이이첨 등에 의해 발각되었고 정인홍이 선조에게 이 사건을 알리면서 유영경의 행동을 엄히 다스릴 것을 간언하지만 선조는 미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왕위 계승의 결정권은 인목대비에게 넘어가게 된다. 유영경은 인목대비에게 영창대군을 즉위시키고 수렴청정할 것을 종용하지만 인목대비는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 언문 교지를 내려 광해군을 즉위시킨다.
재위를 향한 기나긴 여정이 끝난 것이다. 이때가 1608년 2월 2일로 광해군 나이 34세였다.
우여곡절 끝에 비로소 왕으로 등극한 광해군은 외적으로는 실리적 외교론을 폈고, 내적으로는 왕권 강화를 통해 민생을 안정시키고 당쟁을 종식시키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명분론에 입각한 서인들의 음모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하고 결국 폐위되어 폭군으로 기억되고 마는 비운의 왕이 된다.
왕으로 등극한 광해군은 우선 조정의 기풍을 바로 잡고 임진왜란으로 파탄지경에 이른 국가 재정을 회복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전란 중에 타버린 궁궐을 창건, 개수하여 왕실의 위엄을 살렸으며 대동법을 실시하여 민생을 구제하려 했다. 하지만 왕권 안정 과정에서 피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우선 왕위 계승 과정에서 계략을 부린 유영경을 유배시켜 죽이는 한편, 왕의 권위에 도전하며 끊임없이 왕권을 위협하던 동복형 임해군도 유배시켜 죽인다. 또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서궁(덕수궁)에 유폐시키기에 이른다.
광해군의 분노를 부추긴 것은 대북파 정치인들이었다. 그들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광해군으로 하여금 정적들을 제거하게끔 종용했고, 광해군은 왕권 안정을 목표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오히려 많은 정적들을 양산해 결국 이로 인해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폐위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1611년에는 대북파의 거두 정인홍이 이언적, 이황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자 성균관 유생들이 유생들의 이름이 올려져 있는 청금록에서 정인홍의 이름을 삭제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광해군은 이 사태에 직면하자 강경한 입장을 보이며 유생들을 모두 성균관에서 쫓아내는 조처를 취한다. 이 때문에 그는 등극 초기부터 유생들과 등을 지고 만다.
그리고 이듬해 1612년 이른바 '김직재의 옥'으로 소북파 인사 1백여 명이 숙청당하는 대옥사가 발생한다. 이 옥사는 김경립이 군역을 회피하기 위해 어보, 관인을 위조한 사건에서 시작되었는데 모진 고문 과정 속에 사건이 겉잡을 수 없이 확대되어 결국 역모사건으로 결론이 나고 말았다.
1613년에는 다시 '칠서의 옥'이 발생하여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사사되고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전락시켜 강화에 위리안치(집 주위에 올타리를 치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조치)했다가 증살(방 안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펴 그 열기로 죽게 하는 것)시키는 한편, 선조의 유명을 받든 일곱 신하들을 삭직시킨다. 이를 계축옥사라 한다.
이후 1615년 능창군 추대사건이 발생해 능창군(인조의 아우)은 물론 이에 연루된 신경희 등이 제거된다. 이 사건을 '신경희의 옥사'라고 한다.
1617년에 이르러서는 폐모론이 대두하여 이항복, 기자헌, 정홍익 등의 폐모 반대론자들을 유배시키고 이듬해인 1618년에 인목대비의 존칭을 폐하고 서궁에 유폐시킨다. 이로써 광해군과 대북파는 왕권을 위협하던 모든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지나치게 많은 인명을 희생시키고 패륜 행위를 일삼음으로써 오히려 반정의 명분을 제공하고 말았다.
하지만 광해군은 민생 안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기도 하였다. 광해군은 등극하자마자 1608년 선혜청을 설치하고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함으로써 민간의 세금 구조를 일원화시키고 세무 부담을 줄여주었다. 1611년에는 농지를 조사하고 측량하여 실제 작황을 점검하는 정책인 양전을 실시하여 경작지를 확대하고 국가 재원을 확보하기도 했다. 또한 선조 말에 시역한 창덕궁을 즉위년인 1608년에 준공하고, 1619년 경덕궁(또는 경희궁), 1621년에는 인경궁을 중건하였다. 이 과정에서 인력을 무리하게 동원하는 일이 생기기도 해 민간의 원성을 사기도 했지만 당시 상황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임진왜란으로 궁궐이 완전히 소실되어 국사를 월산대군의 서가에서 논의해야 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동북아의 국제 정세도 급변하고 있었다. 만주에서 여진족의 세력이 커져 후금을 건국하자 그에 대비하여 대포를 주조하고 국방을 강화하는 한편, 명나라의 원병 요청에 따라 강홍립에게 1만 군사를 주어 응하게 했다. 그러나 싸움에서 명나라가 후금에 패하자 적당히 싸우는 체하다가 후금에 투항해 누루하치와 화의를 맺도록 하는 능란한 양면 외교 솜씨를 보였다. 강홍립은 후금에 억류되어 있으면서 계속해서 광해군에게 밀서를 보내고 있었다. 이 밀서 덕택으로 조선은 후금의 동정을 낱낱이 파악할 수 있었고, 그렇게 파악된 정보에 따라 대책을 세워 후금의 대대적인 침략을 예방하고 있었다.
이러한 광해군의 실리 외교론은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1609년 일본과 송사약조를 체결하고 임진왜란 후 중단되었던 대일 외교를 재개하였다. 이로써 임진왜란 이후 악화되었던 일본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그는 병화로 손실된 서적 간행에도 박차를 가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등을 다시 간행하고, 「국조보감」을 다시 편찬하여 정사 운영의 방향을 확립했고, 실록 보관을 위해 적상산성에 사고를 설치하여 임진왜란 때 소실된 네 곳의 사고를 대신했다. 한편, 이 시대에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동의보감」 등이 나와 문학과 의학 부분에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1616년에는 류큐로부터 담배가 수입되기도 했다.
하지만 광해군의 이런 실리적이고 과단성 있는 정책은 인조반정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의 15년 재위 기간 동안 정권을 장악한 것은 대북파였다. 대북파는 정권 유지를 위해 많은 정적을 제거했는데, 이 때문에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과 서인들은 광해군 정권을 전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마침내 1623년 김류, 이귀, 김자점 등의 사대주의자들과 능창군의 형 능양군이 군사를 이끌고 창덕궁으로 진격하기에 이른다. 마침내 반정에 성공한 이들은 대북파를 제거하고 광해군을 폐위시킨다. 그들의 반정 명분은 광해군이 사대를 거부하고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했다는 것이었다.
폐위된 후 광해군은 강화도에 안치되었다가 다시 제주도에 이배되어 18년 동안 생을 연명하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이 기간 동안 광해군은 아주 초연한 자세로 지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1641년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광해군이 폐위된 뒤 그의 가족들은 비참한 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감한다. 이는 인목대비의 철저한 복수심의 표출과 인조 세력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인목대비와 인조 반정 세력에 대해 종래와 다른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하는 단서가 되고 있다.
광해군 폐위 후 광해군과 폐비 유씨, 폐사자 질과 폐세자빈 박씨 등 네사람은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이들을 강화도에 유폐시킨 것은 그곳이 감시하기에 용이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정 세력은 이들 네 사람을 한 곳에 두지 않았다. 광해군과 유씨는 강화부의 동문 쪽에, 폐세자와 폐세자빈은 서문 쪽에 각각 안치시켰다. 이들이 안치되어 울타리 안에 갇혀 살기 시작한 지 두 달쯤 후에 폐세자와 세자빈은 자살하게 되는데 그 과정이 기이하다.
당시 20대 중반이던 이들 부부는 아마 강화도 바깥 쪽과 내통을 하려고 한 것 같다. 세자 질은 어느날 담 밑에 구멍을 뚫어 밖으로 빠져나가려다 잡히게 되는데 그의 손에는 은덩어리와 쌀밥, 그리고 황해도감사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었다. 짐작컨대 그는 은덩어리를 뇌물로 사용해 강화도를 빠져나가려 했던 것 같다. 그리고 황해감사에게 전달하려 했던 편지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추론컨대 자신을 옹호하고 있던 평양감사와 모의하여 반정 세력을 다시 축출하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인목대비와 반정 세력은 그를 죽이기로 결정했고 이 사실을 전해들은 세자 질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세자빈 박씨도 이 사건으로 죽었다. 박씨는 세자가 울타리를 빠져나갈 때 나무 위에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세자가 빠져나가는 것을 돕기 위해 망을 보고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하지만 세자가 탈출에 실패하여 다시 안으로 붙들려 오는 것을 목도한 그녀는 놀라서 그만 나무에서 떨어졌고,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렇게 해서 장성한 아들과 며느리를 잃은 광해군은 1년 반쯤 뒤에 아내 유씨와도 사별하게 된다. 폐비 유씨는 유배 생활이 시작되면서 화병을 얻었다. 도저히 자신이 당한 현실이 믿기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리하여 유배 생활 약 1년 7개월 만인 1624년 10월에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하지만 광해군은 초연한 자세로 유배 생활에 적응해서 그 이후로도 18년을 넘게 생을 이어간다. 이 과정에서 그는 몇 번에 걸쳐 죽을 고비를 넘긴다. 광해군으로 인해 아들을 잃고 서궁에 유폐된 바 있던 인목대비는 그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인조 세력 역시 왕권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몇 번이나 그를 죽이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반정 이후 다시 영의정에 제수된 남인 이원익의 반대와 내심 광해군을 따르던 관리들에 의해 살해의 기도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광해군은 태안으로 이배되었다가 난이 평정되자 다시 강화도로 왔다. 1636년에는 청나라가 쳐들어와 그는 다시 교동에 안치되었으며 이듬해 조선이 완전히 청에 굴복한 뒤 그의 복위에 위협을 느낀 인조는 그를 제주도로 보내 버렸다.
광해군은 제주 땅에서도 초연한 자세로 자신의 삶을 이어갔다. 자신을 데리고 다니는 별장이 상방을 차지하고 자기는 아랫방에 거처하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묵묵히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심부름하는 나인이 '영감'이라고 호칭하여 멸시해도 전혀 이에 대해 분개하지 않고 말 한다디 없이 굴욕을 참고 지냈다. 이렇듯 초연하고 관조적인 그의 태도가 생명을 오래도록 지탱시켰는지도 모른다. 또 그 긴 세월 동안 그는 다시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른다는 일념으로 묵묵하게 희망을 안고 기다렸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1641년 귀양생활 18년 수개월 만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67세였다.
죽기 전에 그는 자신을 어머니 공빈 김씨의 묘 발치에 묻어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정은 그의 유언에 따라 경기도 남양주의 공빈 김씨 묘 아래쪽 오른편에 그를 묻었다. 그리고 박씨 집안으로 출가한 서녀의 자손들로 하여금 봉사하도록 하였다.
아래의 글은 광해군에 대한 옹호성의 글이다. 출처는 불명.
< 광해군은 폭군이었나?>
조선의 사관들은 광해군을 폭정을 일삼은 폭군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조반정에 성공한 사대주의적 명분론자들이 자신의 반란을 합리화한 측면이 강하다. 오히려 광해군은 대명 사대주의자들에 밀려 자신의 실리적 외교론과 현실 감각에 바탕을 둔 정치 이론을 완전히 꽃 피우지도 못한 채 밀려난 불행한 왕이었다.
인조반정의 명분은 두가지였다. 첫째는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고 대명 사대를 하지 않았다는 것과, 둘째는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시켜 형제를 죽이고 불효를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내 건 이 명분에는 몇가지 문제가 있다.
그것은 우선 이들이 중국의 흐름에 둔감해 시대적 대세를 잃지 못했다는 점이다. 당시 명은 이미 기울고 있는 나라였고 청은 일어서는 나라였다. 때문에 조선은 중국의 그런 세력 다툼을 이용해 개국 이후 계속되던 중국과의 군신 관계를 청산하고 대등한 위치로 격상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맞이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이 점을 읽어내고 중립 외교 노선을 걸었지만 이들은 계속해서 대명 사대주의 길을 걸어 결국 뒷날 청에게 왕이 무릎을 꿇고 군신 관계를 맺는 대치욕을 겪게 된다.
다음으로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비롯해 능창군, 인목대비 등의 왕권 위협 세력들을 제거한 것을 폭정으로 몰아간 부분이다. 폭정이란 원래 집권층에게 행사된 정치적 행위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민생을 위협하는 폭력적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광해군은 일부 왕권 위협 세력을 제거하긴 했으나 민간을 위협하고 학대하는 정사를 편 일은 거의 없다. 그는 오히려 민생 구제에 주력하여 민생 경제를 일으키는 데 전력을 쏟은 왕이었다.
조선 정치사를 볼때 이른바 성군 내지는 명군으로 일컬어지는 왕들 역시 자신의 정적 세력 제거에는 조금도 틈을 보이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람이 태종과 세조였다. 태종은 자신의 배다른 형제를 죽였고 동복 형제도 유배시켰으며 또한 계모 강씨의 능을 일개 후궁의 무덤으로 전락시키는 행위를 자행하고, 심지어 장자인 양녕이 왕이 될 인물이 못된다 하여 폐세자를 단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세조는 왕위를 찬탈하고 단종을 죽였으며 형수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쳐 관을 없애버리기도 했다. 게다가 자신을 반대하는 모든 신하들을 죽이거나 유배보냈으며 왕권에 대한 도전이 두려워 철저한 심복 정치를 실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들의 행적에 비하면 극악스럽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는 오히려 인목대비를 죽여야 한다는 대북 세력의 강력한 주장을 물리치고 자신의 판단으로 인목대비를 살려놓기도 했고, 영창대군을 죽이는 것도 반대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인조반정은 그야말로 반란에 불과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인조반정을 주도한 인물들은 한결같이 사대주의자 내지는 광해군에게 개인적인 원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는 그들의 반정이 순수한 구국 의지의 발로라기보다는 개인적 원한에서 비롯되었음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인조반정을 중종반정과 대등한 관계로 설정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연산군이 철저한 폭군이었던 것에 비해 광해군은 일부 사대주의자들과 단지 정치적 이념을 달리한 현실적인 왕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종은 반정 세력의 추대를 받은 경우였지만 인조는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반정을 주도했다. 중종반정이라고 일컫는 사건이 연산군 폐출사건이었다면 인조반정은 그야말로 반정이자 역모였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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