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응(1918∼1951, 충북 충주)
아래는 도종환의 글이다
[최규하 전 대통령은 경기고 33회 졸업생이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하게 경기고 출신이다. 경성제일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했으니 정통 엘리트 코스를 밟은 대통령이다. 경기고 33회는 인재들이 많다. 최규하 대통령 말고도 이영섭·민관식 등 법조계와 국회의 최고 자리에 오른 사람들도 있다. 그 33회 동기생 중에 권태응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제일고보 시절부터 일찍 민족의식에 눈떴다. 일본인 교사들이 “조센징인 주제에 건방지다”라고 차별적인 언행을 일삼으면 저항했다. 뜻이 맞는 친구들끼리 모여 U.T.R구락부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그리고 등산 모임을 하면서 ‘등산일지’라는 모둠 일기를 쓰고 돌려보며 사상과 의식을 맞추어가려고 했다. 한번은 졸업 앨범 기증 문제로 학급 회의를 하다가 “우리가 졸업하게 되는 것은 천왕 폐하의 홍은이 아니냐”라고 하는 앨범 위원들을 집단 구타하고 이로 인해 U.T.R구락부원 여덟 명은 보름간 종로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했다. 이런 동기생들 사이에서 최규하는 강원도에서 올라온 말 없는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1937년 졸업 후 함께 일본 유학을 떠난다. 권태응은 와세다 대학으로, 최규하는 도쿄 고등사범학교로 진학한다. 권태응은 동기생 염홍섭 등과 함께 도쿄에 유학 온 20여 명의 동기생을 모아 33회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한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회합을 갖고 주제를 달리해가며 토의하고 자신들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민하기도 했다. 조선의 식민지 경제와 자본주의의 결함을 분석한다든가, 제국주의 열강이 치르고 있는 침략 전쟁의 성격을 파헤치며 일본이 패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아내는 등 상당한 수준의 정치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 유학생들이 사치에 흐르지 않아야 한다고 스스로 경계하거나 파쟁과 대립을 벗고 단결해야 한다든가, 프롤레타리아 예술을 통해 조선 농민을 지도해야 한다는 것 등을 학습했다고 경찰 조서는 전한다. 물론 최규하라는 이름은 이 동기생들의 비밀 결사 모임 명단에 보이지 않는다.
권태응은 스가모 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하다 폐결핵 3기의 몸이 되어 병보석으로 출옥하게 된다. 동기생 홍순환과 함께 출소한 권태응은 도쿄 시에 있는 제국갱신회(帝國更新會)에 거주지를 제한당하고 와세다 대학에서는 1940년 4월 퇴학 처분을 받지만 최규하는 다음해에 대학을 졸업한다. 그리고 최규하가 친일 고위관료 양성 기관인 만주 대동학원에 입학할 때 권태응은 인천 적십자요양원에 입원한다. 거기서 생사의 기로를 헤맬 때 최규하는 대동학원을 졸업하고 만주국 정부 관리가 된다.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강했고 식민지 체제야말로 모순의 근원이므로 식민지 체제에 저항해야 한다고 믿었던 권태응은 병든 몸을 추스르며 야학을 하고 농민들을 위해 일하고 있을 때, 어려서부터 말이 없고 착실하게 공부만 했으며 어떤 체제든 동화되어 거기서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일하며 사는 것이 몸에 배어 있던 최규하는 관료로서 승승장구한다.
일제의 감옥에서 얻은 병으로 다른 일을 할 수 없던 권태응은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걸고 이들을 위한 동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자주꽃 핀 건 자주감자’로 잘 알려진 <감자꽃>이라는 동시집을 내고 3백여 편의 미발표 동시 원고와 농민 문제를 다룬 단편소설을 남긴 채 서른네 살의 나이에 아깝게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러나 최규하는 식민지 체제, 광복 공간, 분단 체제와 독재 체제 아래에서 36년간 관료로서 성실하게 생활하며 외무부장관과 국무총리를 거쳐 10·26 이후에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윤동주와 정일권이 동창이면서 너무도 다른 길을 걸어갔듯 권태응과 최규하도 다른 인생의 길을 살다 갔다. 권태응은 선반의 널빤지를 뜯어 거기에 묶어 야산에 묻혔는데, 최규하는 전·현직 대통령들의 애도 속에 국민장으로 모셨다. 지난해 광복 60년 기념식장에서 권태응이 독립운동가로 표창받는 것을 최규하도 알았을 것이다. 워낙 꼼꼼한 성격이라 언론에서 보도된 내용을 보고 뭐라고 한 줄 써놓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너무 오래 전 일이라 권태응이라는 이름조차 잊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식이나 젊은이들에게 어떤 인생을 살라고 말해주어야 할까.]
흙에서 태어나 자연의 이름으로 시를 쓰고 어린 아이들의 마음에 희망을 심어줬던 시인 권태응(1918∼1951) 선생의 흔적을 찾아가는 길. 권태응 선생의 고향인 충주에서 그의 뜻을 이어 살고 있는 이종수 시인이(충주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국장) 그 길을 안내했다.
우리는 권태응이 묻힌 곳을 먼저 찾아보기로 했다. 어디를 가나 일단 그 지역 버스터미널이나 기차역을 중심으로 가까운 곳부터 기행 코스를 잡는 게 편하기 때문이었다. 충주시 금릉동 파라다이스웨딩홀 뒤 공터 오른쪽 산(마을 사람들은 그 언덕을 팽고리산이라고 부른다)에 그의 묘가 있다.
그 일대 땅이 권씨 문중 소유라고 하지만 특별하게 문중에서 관리하는 것 같지 않았다. 선생의 자식들은 미국으로 건너간 지 오래다. 얼마 전 권태응 문학제를 위해 충주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람들이 권태응 선생의 묘를 찾아 벌초도 하고 주변 정리를 했다.
권태응은 그가 묻힌 금릉동 팽고리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태어났다. 충주시외버스터미널 앞 택시승강장에서 출발한 뒤 제일 처음 만나는 사거리에서 우회전, 그 방향으로 차를 달려가다 보니 길 오른쪽으로 ‘권태응 선생 출생지’표지판이 공중에 달려 있다. 차에 속도를 붙였다면 좀처럼 찾기 힘든 표지판이다. 저 멀리 플라타너스 나무가 있는 마을, 충주시 칠금동(옛 이름은‘엇갓’이다) 381번지에서 그는 태어났다. 표지판이 가리키는 대로 길을 따르다 보면 길 오른쪽으로 키 큰 플라타너스 나무가 있다.
그 나무 앞에 있는 밭이 권태응이 태어난 곳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집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헐렸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권태응의 유년시절 추억이 남아 있는 이웃마을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생가 터에서 곧장 가다보면 왼쪽으로 낚시터가 나온다. 낚시터를 끼고 좌회전하면 세 갈래 길이 나오는데 거기서 좌회전, 옥수수 밭과 비닐하우스가 있는 곳에서 길이 나뉘는데 왼쪽 길로 가야 한다.
길가에 키 큰 플라타너스가 줄지어 서 있는 동네, 칠금동 362번지.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로 접어들 무렵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빗줄기가 흙을 파헤치며 그 속에 사는 작은 생명의 숨통을 틔워주고 있었다. 점점 굵어지는 빗방울이 대지와 접촉하는 순간 폭죽처럼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권태응은 그 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가 태어난 집은 안 채만 방이 세 개였다고 하니 당시 웬만큼 잘 사는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부유했던 시절 어린 권태응에게 집 앞의 들과 밭이 다 놀이터였고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 달천과 남한강 또한 그랬으리라. 그가 순박하고 풋풋한 시골 생활에 대한 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것도 흙에서 자란 그의 마음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문학을 좋아했던 권태응은 충주 교현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1932년 제일 고등보통학교(현재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칠금동 362번지에서 살았다. 이후 그는 1937년 일본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경학과에 입학을 하고, 1938년 그 곳에서 독서회 사건으로 치안유지법에 걸려서 체포됐으며, 1939년 5월 내란음모 예비죄와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3년형을 언도 받고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됐다.
하지만 1940년 옥살이를 하면서 얻은 폐결핵 때문에 병보석으로 풀려난 뒤 인천 적십자 요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 곳에서 부인인 박희진씨를 만났지만 병세는 그리 호전되지 않아 부인과 함께 1944년 다시 칠금동 고향 품으로 돌아 왔다.
1932년 고향을 떠난 지 12년 만에 다시 찾은 고향이 그에게는 크나큰 삶의 희망이 됐다. 선생은 그곳에서 야학을 열어서 못 배우고 핍박받던 사람들에게 한글과 연극을 가르치면서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그가 본격적으로 시를 쓰게 된 것도 이 시기부터다. 그는 농촌생활과 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썼다. 특히 어린이들에게 들려준 동시는 아이 마음처럼 꾸밈없고 순수하면서 건강한 생각이 절로 풍겨 나왔다. 그의 시비에도 새겨있는 <감자꽃>을 옮겨본다.
자주꽃 핀 건
자주 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권태응의 시비는 그가 살던 칠금동에서 빤히 바라보이는 대문산 탄금대에 있다. 탄금대는 수십 년 전부터 충주사람들이 즐겨 찾던 공원이다. 하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미 1400여 년 전 신라사람 우륵이 이곳을 찾아 가야금을 연주하며 노닐었다고 하니 그 때부터 사람들이 모여 쉴 수 있는 공원이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탄금대의 역사가 이러하니 세월 속에 묻힌 이야기는 무수히 많을 터. 그 중 하나가 임진왜란 때 이 곳에서 배수진을 치고 장렬히 전사한 신립 장군의 이야기다.
시비는 1968년에 세워졌다. 방정환 선생이 만든 새싹회 사람들과 노래비(시비) 충주건립위원장인 이해곤씨 등 뜻 있는 사람들의 힘으로 건립됐다. 건립 당시에는 선생의 시 <감자꽃>이 동판에 새겨졌는데,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동판을 떼어 가는 바람에 1974년 5월에 지금의 시비를 다시 만들었다.
시비의 높이는 305㎝이며 밑 부분에는 직경 150㎝의 감자꽃을 만들어 놓았다. 시비에는 그의 대표작 <감자꽃> 전문이 새겨 있다. 그런데 한 번은 충주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초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권태응 시인과 관련된 백일장을 열었는데 한 학생이 시비에 적힌 <감자꽃> 시를 읽고 ‘정말로 보랏빛 감자꽃이 핀 곳에 보라색 감자가 열렸는지 집에 가서 감자를 캐봐야 겠다’는 내용의 동시를 써서 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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