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ㄱ-ㅁ)

계랑(1513-1550, 전북 부안)

톰소여와허크 2010. 8. 29. 23:30

계랑(1513-1550, 전북 부안)


 계랑(桂娘)은 성(姓)이 이(李), 호(號)가 매창(梅窓)이다. 부안(扶安)의 이름난 기생이다. 한시에 능하고 거문고에 뛰어났다. 계랑은 1513년 부안 현리 이양종(李陽從)의 서녀로 태어나 1550년 37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작품으로는 시조가 3수가 있고, 한시는 40여수가 [매창집(梅窓集)]에 실려 있다.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는 그녀의 시조라 하여 10수가 소개되어 있으나 신빙성이 없다.

 그녀는 촌은(村隱) 유희경과 애절한 사연을 남긴 여인이다. 유희경은 조선조의 시인이요 학자다. 선조 25년 임란(1592)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관군을 도운 공으로 통정대부가 되었고, 광해군 10년(1618) 이이첨이 폐모(廢母)의 소(疏)를 올리라고 강권하자 거절한 뒤에, 은거하며 후진의 교학에 전심하였다.

 유희경이 부안의 명기 계랑을 만난 것은 이귀(李貴)가 부안부사로 있을 때이다. 당시 계랑은 기적에 몸을 담고 있었는데, 다른 기생에 비해 고고하였다.

           평생에 기생된 몸 부끄러워서

           달빛 젖은 매화를 사랑하는 나.

           세인은 내 마음을 알지 못하고

           오가는 손길마다 추근거리네.

          {평생치학식동가(平生恥學食東家)     독애한매영월사(獨愛寒梅映月斜)

           시인불식유한의(時人不識幽閑意)     지점행인왕자다(指點行人枉自多)}

 계랑의 '차과객운(次過客韻)'이다. 일찍이 나그네가 매창의 이름을 듣고 시로써 유혹하자, 계랑이 이 시를 지어 전하니, 그 나그네가 탄한(嘆恨)하며 물러갔다 한다. 이만큼 고고한 그녀였다.

 그러나 대시인이요 당대의 풍류객인 유희경이 부안에 온다는 전갈을 부사 이귀에게 받은 그녀는 곧 부안에 가겠다는 답장을 보낸다. 계랑의 나이 열아홉이었다.

 부안에 온 유희경은 술이 거나해지자, 계랑에게 거문고를 재촉한다. 그녀는 숨을 가다듬고 거문고를 끌어 당겼다.

 거문고 소리에 따라 이백의 [장진주(將進酒)]가 유랑하게 흘러 넘친다. 노래가 점점 황홀경으로 어울려 간다. 지그시 눈을 감고 듣던 유희경이 무릎을 치며 감탄한다. 그는 곧 지필묵을 당겨 시를 지어 거문고를 탄다.

            일찍이 남국의 여랑(女娘) 계랑의 이름 들어

            시운과 노래로써 서울까지 들리누나.

            오늘은 너의 진면목을 가까이 대해 보니

            선녀가 지상에 내려온가 생각든다.

           {증문남국계랑명(曾聞南國癸娘名)    시운가사동낙성(詩韻歌詞動落城)

            금일상간진면목(今日相看眞面目)    각의신녀하삼청(却疑神女下三淸)}

            

            나에겐 신기로운 선약(仙藥)이 있어

            찡그린 얼굴도 고칠 수 있다네.

            금낭 속 깊이 깊이 간직한 약을

            사랑하는 너에겐 아낌없이 주리라.

           {아유일선약(我有一仙藥)               능의옥협빈(能醫玉頰瀕)

            심장금낭리(深藏錦囊裡)               욕여유정인(欲與有情人)}

 어두운 마음, 찡그렸던 얼굴을 미소짓게하는 선약(仙藥). 그것은 바로 '사랑'이란 묘약이 아니겠는가. 사랑이란 말을 직선적으로 쓰지 않고 '선약(仙藥)'에 비유해 가며 은밀하게 표현한 것이다.

 계랑은 자작시를 지어 가락에 맞춘다.

            내게는 옛날의 거문고가 있어서

            한 번 타면 온갖 정감 다투어 생긴다오.

            세상 사람 이 곡을 아는 이 없으나

            임의 피리 소리에 나는 맞춰 본다오.

           {아유고주쟁(我有古奏箏)              일탄백감생(一彈百感生)

            세무지차곡(世無知此曲)              음화구산생(淫和구山笙)}

 그날밤 거문고와 시로 화답하며 밤 깊어 원앙침에 들었다.

 두 사람을 갈라 놓을 사건이 벌어진 것은, 계랑과 촌은이 열흘 동안 내소사(內蘇寺) 구경을 끝내고 내려왔을 때였다. 부사 이귀로부터 왜구가 14만의 병력으로 침공해 온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이다. 계랑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희경은 전쟁터로 나간다.

 그날부터 계랑은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점점 수척해 가는 몸에 비해 그리움은 얽힌 실타래처럼 풀 길이 없다. 자연 붓을 든다.

         이화우(梨花雨) 흣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져도 날 생각난가

         천리(千里)에 외로운 꿈은 오락가락 한다 

 단장(斷腸)의 하소연이다. 사무친 애정의 절규다. 그러나 한 번 떠난 유희경에게서는 일자 소식이 없다. 정말 계랑을 잊었는가. 아니면 한낱 노류장화(路柳墻花)로 지나쳐 버린 여인이었는가. 그러나 계랑은 한번 지나쳐간 풍류랑(風流郞)으로만 생각할 수 없었다. 너무도 깊은 정을 주었던 촌은이었다. 그녀의 그리움은 한이 없다.

             이별이 하 설어워 문 닫고 누웠어도

             하염없는 눈물이 옷자락을 적시오.

             홀로 누운 잠자리는 한없이 외로운데

             소리없는 보슬비에 임 없는 밤 또 저무오.

            {이회소소엄중문(離懷消消掩中門)   나신무향적누흔(羅神無香適淚痕)

             독처심규인적적(獨處深閨人寂寂)   일정징우쇄황혼(一庭徵雨鎖黃昏)}

  [매창집]에 보이는 매창의 [춘우(春雨)]다.  유희경이 떠난 지 1년이 지난 때에 인편에 서찰이 왔다. 편지의 사연은 간략했다. 의병을 모아 왜구와 싸우기에 여념이 없다는 것. 한 편의 시가 동봉되었다.

              헤어진 그대는 아득히 멀어

              나그네는 시름에 잠 못 이루네.

              소식조차 끊어져 애가 타는데

              오동잎 찬 빗소리 차마 못 들어.

             {일별가인격초운(一別佳人隔楚雲)   객중심서전분분(客中心緖轉紛紛)

              청오불래음신단(靑烏不來音信斷)   벽오량우불감단(碧梧凉雨不堪斷)}

 계랑은 유희경의 시를 읽고 또 읽었다. 반가운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렀다. 자신을 잊고 있지 않음이 고마웠다.

 다음날 계랑은 더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어, 남장을 하고 유희경을 찾아 나섰다. 부안서 서울까지는 먼 천릿길. 여자의 사랑은 이 험한 길을 나서게 했다.  그러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유희경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와야만 했다. 계랑의 몸은 더없이 수척해 갔다. 완전히 자리에 눕고 말았다. 끝내 유희경을 그리는 상사(相思)의 정은 그녀를 소생시키지 못한 채 숨을 거두게 했다.

             풍진 세상 고해에는 시비도 많아

             깊은 규방 긴 밤이 천년만 같구려

             덧없이 지는 해에 머리를 돌려 보니

             구름 속 첩첩 청산 눈앞을 가리네.

            {진세시비다고해(塵世是非多苦海)   심규영야고여년(深閨永夜苦如年)

             남교욕모중회수(藍橋欲暮重回首)   청첩운산격안전(靑疊雲山隔眼前)}

 이것이 계랑의 마지막 절필시(絶筆詩)였다.

 계랑의 부음을 들은 유희경은 서둘러 부안으로 내려갔다. 죽은 넋이나마 위로해 주어야 그녀에 대한 속죄가 될까. 늙은 자신에게 온 정성을 다 바쳤던 계랑을 위해 붓을 들었다.

             맑은 눈 하얀 이 푸른 눈섭 계랑아

             홀연히 뜬 구름 따라 간 곳이 아득하구나.

             꽃다운 넋은 죽어 저승으로 갔는가.

             그 누구가 너의 옥골(玉骨) 고향에 묻어 주랴.

            {명모호치취미랑(明眸皓齒翠眉娘)   홀축부운입묘망(忽逐浮雲入杳茫)

             종시방혼귀패색(縱是芳魂歸浿色)   수장옥골장가향(誰將玉骨葬家鄕)}

 유희경과 헤어져 그리움을 달래던 때에, 당대의 기인(奇人) 허균(許筠)이 김제까지 왔다가, 계랑의 소문을 듣고 부안에서 머물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허균과 매창은 허균이 33세일 때 당시 매창은 29세였다. 둘의 우정은 매창이 죽기전까지 십 년 가까이 계속된다.

 허균이 [애계랑(哀桂娘)]이란 제하에 두 수의 시를 읊은 것이 전해 오고 있다. 그 중 한 편을 보면,

             묘한 싯구는 비단을 자아내고

             아름다운 노래는 가던 구름 머무네.

             선도(仙桃)를 훔치고 하계한 서옥모(西玉母)인가

             향약(香藥)을 훔치고 인간에 온 항아(姮娥)인가.

             밝은 촛불은 부용(芙蓉) 장막에 어두운데

             그윽한 향기는 비취군(翡翠裙)에 남았구나.

             명년 봄 다시 복사꽃 만개할 제

             어느 누가 설도(薛濤)의 무덤을 지났날런가.

            {묘구감리금(妙句堪璃錦)               청가해주운(淸歌解駐雲)

             투도래하계(偸桃來下界)               절약거인군(竊藥去人群)

             등암부용장(燈暗芙蓉帳)               향잔비취군(香殘翡翠裙)

             명년소도발(明年小桃發)               수과설도분(誰過薛濤墳)}

           

 [계생은 부안의 기생인데 시를 잘 짓고 음율이 뛰어났으며, 또 거문고를 잘 탔다. 성품이 고개(孤介)하여 음란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그 시재를 사랑하여 사귀되 막역한 사이였다. 비록 웃고 희롱하였어도 음란한 지경에 이르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오래 사귀었으나 그 사이가 벌어지지 않았다. 이제 그녀의 죽음을 듣고 흐르는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여, 두 수의 시를 지어 슬픔을 대신한다.] 라는 허균의 기록에서도 계랑의 뛰어난 시재와 그 정숙한 몸가짐을 알 수 있다.

 허균이 다녀간 후로 계랑이 유희경을 배반하고 허균과 가까워졌다는 풍문이 퍼지기도 했다. 또한, 관기의 신분으로 부안 군수 이귀와 그 후임으로 온 윤선 등과의 교제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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