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ㄱ-ㅁ)

김동인(1900∼1951, 평양)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13:40

김동인(1900∼1951, 평양)

 

 김동인은 1900년 10월 2일 조선 서북 지방의 중심지인 평양에서 태어났다. 동인의 가문은 평양 하수구리 한곳에서 8대를 내려온 토호 집안으로 전답을 상당히 많이 소유하고 있는 지주 계층의 갑부 집안이었다. 재산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가을 추수 때 모이는 곡식이 곳간에 다 들어가지 않아 마당에 쌓아 놓아야 했다고 한다. 동인은 어린 시절 집안의 귀염둥이로서 지극히 호사를 누렸다. 동인은 형 동원보다 16살 아래였고 늙은 아버지와 어머니 옥씨 사이에게 말할 수 없는 귀여움을 받았다. 이 편애에 가까운 사랑은 동인에게 유아독존의 생각을 심어 주었다.

 김동인이 일본유학을 간 해는 1914년이다. 그의 나이 14세였다. 12살 때 숭실소학교를 나와 같은 미션계의 숭실중학에 들어갔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버지는 기독교 장로였고, 맏형은 이 학교의 교장직에 있었던 적이 있다. 숭실중학이 미션스쿨인지라 성경과목이 중시되었음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김동인은 자주 시험을 치르는 성경과목이 불만스러웠다. 어느날 그는 책을 펼쳐놓고 시험을 치르다가 저지당하자 집으로 와버렸다. 그런 다음날부터 그는 책보를 들고 집을 나와서는 모란봉을 거닐며 한 주일 동안 헤매였다. 이 중학의 외국인 교장(목사)이 그의 이웃에 살고 있었다. 교장이 이 사실을 집안에 알렸다. 그는 그 길로 아주 학교를 중퇴해 버리고 동경유학의 길에 나섰다.

 그러나 김동인이 성경시험에 불복한 사건의 밑바닥에 놓인 심리적 갈등을 캐어본다면 의외로 사정이 분명해진다. 즉, 김동인이 성경공부에 심술이 난 것은 급우 주요한 때문이었다. 숭덕소학교에서부터 같은 반 친구였던 주요한이 동경으로 유학차 떠나가버린 사건이 김동인에겐 참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집안의 귀공자>로서 친구라고는 오직 주요한뿐이었던 그에겐 이 사건은 일종의 모욕을 당한 일과 진배 없었다. 폐쇄적인 상황에서 귀공자로만 행세해 온 그에 있어 주요한이 없는 숭실중학교는 그 자체가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어린 귀공자의 불만의 근원이 여기에 있었던 만큼 입학 당초부터 학교에 흥미를 갖기 어려웠다. 그러한 불만이 성경과목시험을 빙자하여 분출해 올라온 것이다.

 동경에서 명치학원을 다니며 소학교 동창인 주요한과 함께 문학에 열중하기 시작하여 톨스토이를 열렬히 숭배하였다고 한다.

 1917년 부친이 별세하여 귀국한 동인은 이듬해 김혜인과 결혼하고 다시 일본에 건너가 천단 미술학교에 입학한다.1919년 2월 일본 동경에서 주요섭, 전영택 등과 문예 동인지 {창조(創造)}를 창간하면서 거기에 단편 <약한 자의 슬픔>을 내어 문단에 올랐다.

 자기가 사재를 털어 {창조}를 냈기 때문에 독자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설을 자유로이 쓸 수 있었다. 김동인이 <창조>를 내고자 마음먹은 것은 주요한을 통해 그가 문학을 알고 그것에다 자기의 목표를 세웠던 탓이다. 그런데 맞수인 주요한은 <학우>에도, 일본 시가 잡지에도 발표할 수가 있었지만 김동인은 그럴 능력이 없었다. 그를 알아주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가 글을 지어 여러 신문이나 잡지에 투고했지만 한 번도 실리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건은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잡지를 스스로 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주요한의 권유보다도, 조선문학건설보다도 이 굴욕감이 제일 큰 원인이었다.

 <창조> 동인인 전영택은 김동인을 이렇게 회고한다. 김동인은 일본 유학 시절, 미술학교에 다니면서 쓴 글에 성생활을 노골적으로 표현해서 풍속교란죄로 일본 경찰에게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다. 또 주요한이 조선일보사 편집국장으로 있었을 때 동인은 당시 학예부에서 잠시 근무를 했던 적이 있었다. 항상 모자를 눌러 쓰고 일을 하곤 했는데 한번은 사장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인사를 안하고 계속 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를 사장이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것을 눈치챈 그가 사표를 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조선일보사를 나왔다는 얘기도 있다. 그는 또 낚시와 경마, 사진 등 당시에는 아무나 즐길 수 없었던 취미생활에 투자를 했다. 친구들끼리 만나서 돈을 쓰는 일도 허다했다.

 그의 유아독존적 성격은 곧곧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빅토르 위고를 상업적인 통속작가로 몰아붙이는가 하면, 한국에서 노벨문학상을 타면 자기가 탈 것이라고 얘기하고 다녔다고 한다.

 1920년 이후 동인은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치는데 이와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방탕한 생활이다. 동인은 출옥하여 바로 아끼꼬라는 여자를 만나러 동경에 갔다가 실패하고 귀국하여 1921년 봄 {창조} 속간을 서두르며 방탕생활을 시작했다.

 동인은 '아침은 평양에서 점심은 서울에서 저녁은 동경에서' 즐겼다는 말이 나올만큼 타락하고 방종한 생활을 했다. 기생과 함께 전국 각지를 유람하며 향락에 빠져 놀아났다. 서울의 명월관에서 <창조>동인들을 모아놓고 질펀한 기생놀이를 벌이기 시작했는데, 김억, 김환, 김찬영, 고경상 등과 어울렸다. '그는 밤에는 명월관에서 기생 수십 명씩을 옹위시켜 밤새도록 호유(豪遊)하고, 낮에는 패밀리호텔에서 기생들을 데리고 감몽(甘夢)이 짙었었다'고  월탄 박종화는 말한다. 마음 내키면 일본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놀러다니기도 하여 문단에서는 김동인이 도쿄를 산보다니듯 한다 하여 '동인식 동경산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명월관에서 첫 번째 만난 기생이 김옥엽이다. 평양으로 내려간 김동인은 보석 알렉산델을 사서 옥엽에게 보냈다. 그는 이 반지에다 편지를 첨가했다. 때에 따라 빛은 변하나 본질이 변하지 않는 보석을 너에게 주노라고, 둘은 서로 편지 왕래를 했다. 진남포를 고향으로 둔 김옥엽이 후다닥 평양으로 올라왔다. 둘이는 사람 눈을 피해 진남포의 옥천에 보림사를 헤매곤 했다. 옥엽을 진남포에 두고, 밀회를 한 지 한달 만에 김동인은 아내 김혜인에 의해 여관에서 발각되었다. 아내의 추적 앞에 그는 당황하였다. 본시 그다지 능변이 아닌 그는 땀을 흘리며 사과하였다. 부부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졌는데 그 조건은 이러하다.

 '남편은 이제부터 옥엽과의 관계를 끊을 것. 그 대신에 마음의 상처를 위로키 위하여 한두 달 동안 여행을 하는 것은 그의 자유에 맡길 것. 아내는 장래 영구히 이번의 이 불유쾌한 사건을 입밖에 내지 않아서, 장래의 공연한 충돌을 피할 것'

 기생으로 되돌아간 옥엽이 김동인이 보는 앞에서 다른 남자쪽으로 불리어갈 때 느끼는 야릇한 질투심을 느꼈지만, 옥엽은 김동인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동인으로서는 참기 어려운 모욕이었다.

 김동인은 옥엽을 첩으로 삼아도 좋다는 허락을 모친에게 받아냈다. 뛸 듯이 기뻐한 이 귀공자가 그밤으로 상경, 옥엽을 만났음은 새삼 말할 것도 없다. <옥엽도 올라 뛰면서 기뻐하였다>고 그는 적고 있다. 약간의 첩살림 준비금을 쥐어 준 그는 이틀 뒤 평양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틀 뒤 새벽차를 기다리는 김동인 앞에 옥엽은 나타나지 않았다. 낮차에도 나가보았다. 또 허탕이었다. 친구 유지영으로부터 그 다음날 편지를 받았다. <자네가 내려간 날 밤 열두시쯤 우연히 옥엽에 집에를 갔더니 그 집 대청에 웬 모를 사람이……> 김동인의 노여움은 참을 길이 없었다. 그는 이 순간부터 마음속에 막혀 있는 '옥엽'이란 뿌리를 칼로 잘라버렸다.  그 뒤에도 김동인은 옥엽과 놀았으나 오직 기생으로만 치부하였다.

 1926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1927년 보통강 토지관개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하여 빚을 갚으려고 남은 재산을 모두 처분하였다. 단장을 짚고 백금 물부리에 멋진 양복장이 신사였던 김동인의 생활은 차츰 빈곤을 향해 하강곡선을 긋기 시작하였고, 아내 김혜인은 남은 돈을 갖고 달아나 버렸다.

 이러한 갑작스런 생활상의 변화는 우울증 등 신경증의 병마를 가져다 주었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 수면제, 최면제 등을 과다복용함으로써 나중에는 마약까지 손대기 시작하여, 중년 이후에는 약물중독에 의한 병마에 마지막까지 시달려야만 했다.

 어쨌거나 1930년 동인은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김경애와 재혼하고부터 복잡한 여자 관계를 정리하고 주로 원고료에 의존하여 생계를 잇게 된다. 재혼한 이듬해 서울로 이사하고, 돈을 벌기 위해 문학을 통속화시킨다고 그토록 경멸했던 신문 연재소설 창작에 매달려야만 했다. 잠시나마 조선일보사 문예부에 취직하기도 한다. 동인은 생계를 꾸리려고 엄청난 분량의 글을 써야 했다. 동인은 단순히 원고료를 벌자고 신문독자의 저급한 흥미와 호기심을 자극하는 글을 쓰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동인은 원래 몸이 약한데다 생애 후반부에는 불면증으로 고생을 하였고 신경통, 약물 중독 등이 겹치어 잠시도 편할 날이 없었다.

 김동인은 최면제를 거의 상용했다. <과도의 집필을 하는 사람은 일 년중 2백 일은 최면제를 써야 하며>라고 그는 말했다. 또 최면제의 약리적 기능은 의사가 잘 알겠지만 그 증상과 효과에 관해서는 자기만큼 아는 자가 없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 모든 최면제 중에서 제일 부작용 없는 것이 바이엘 아달린이라고 그는 장담하고 있다.

 최면제 중 제일 싼 것이 포수 클로랄이다. 그는 포수 클로랄을 애용했는데,. 값이 싸다고 했지만 그것이 이유는 아닌 것 같다. 이 약은 약이 접촉되는 피부가 상하는 만큼 복용 뒤 위통이 따르며 이튿날 매우 불쾌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것이 <잠들기에는 가장 효과가 많다>고 그가 말해 놓고 있는 만큼 다른 약은 큰 효과가 없었던 것이다.  아달린이나 기타 약한 약이 거의 듣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른 김동인은 효과가 강한 약만 찾았다. 그는 이 약을 집에다 많이 장만해 놓고 상복하였다.

 김동인의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는 성병으로 생식기능을 상실한 한 남자와 행실이 부정한 아내가 나온다. 남편은 낳아놓은 아이를 자기 아이로 믿으려고 애를 쓰는데 닮은 데가 하나도 없어서 무진 고민을 한 끝에 마침내 아이의 발가락이 저를 닮았다고 내 아들이 틀림없다고 좋아하는 내용이다. 횡보(橫步) 염상섭(廉想涉)을 모델로 하였다 하여 큰 논쟁이 벌어져 두 사람(김동인과 염상섭) 사이에는 오랫동안 불화가 계속되었다.

 김동인은 소설 외에 첫 작가연구인 {춘원연구}, 문학 연구인 {조선근대소설고} 등을 남겼다.

 1942년 천황불경죄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기도 한 김동인은 이후 친일 문학으로 기울어진다. 김동인의 총독부로 자진출두해서 친일을 맹세한다. 1939년 여름 박영희, 임학수와 더불어 '성전종군작가'라고 쓴 '다스케'(어깨띠)를 두르고 경성역을 떠나 북지(임둔지방)로 황군위문길에 나선다. 그러나 김동인은 황군위문길에서도 병마의 고통에 시달려야 했으며 돌아와서는 기억상실증에 걸려 고생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군(軍)으로 다시 찾아가 "전일의 기억은 죄다 잃어버렸으니 다시 한 번 현지시찰을 하고 싶다"는 촌극을 빚기도 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징용대상에 포함된 것을 알고 이를 면하기 위해 염치불구하고 조선문인보국회 간사 자리를 간청하여 얻어내기도 하였다. 여하튼 김동인은 그 외에도 {매일신보}에 [태평양송](1942. 1. 6), [감격과 긴장](1942. 1. 13), [반도민중의 황민화-징병제실시수감](1944. 1. 16∼28), [일장기 물결](1944. 1.20), [문화인의 총궐기](1944. 12. 10), [전시생활수감](1945. 3. 8) 등의 글을 실어 '내선일체'와 '성전'(聖戰)을 기렸다.

 동인은 1951년 1월 한국전쟁 중 아무도 지켜주는 사람도 없이 병사 반 아사 반으로 세상을 떠났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김동인의 아내는 약물과용으로 인하여 중태에 빠진 김동인을 두고 한강을 건너야만 했다. 돈 3만 원을 이불 속에 넣어둔 채 조랑조랑 아이들만 데리고 피난하였는데, 다시 돌아와 보니 이불과 3만 원은 없어지고 김동인 혼자 냉돌방에서 싸늘히 식어 있더라는 것이다.

 우리 근대문단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의 자제로 손꼽혔고 {창조}를 직접 발간함으로써 근대문학의 화려한 개척자로 칭송받았으며, 그런 그답게 근대문인 중 가장 호사스럽고 안하무인격인 행동으로 위세를 떨쳤던 김동인이었지만, 최후는 이렇게도 쓸쓸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