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균(1914-1993, 경기도 개성)
김광균은 1914년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난다. 송도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고무공장에 입사한 그는 군산과 용산 등지에서 근무하면 틈틈이 시를 써 발표한다.
그의 시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모더니즘의 기수로 문단을 주도하던 비평가 김기림의 눈에 띄면서부터다. 김기림은 그해의 유망 신인 작가로 김광균을 꼽고 시 [오후의 구도]를 소개한다. 그는 김기림으로부터 "소리조차 모양으로 번역하는 기이한 재조를 가진" 시인이라는 찬사를 듣는다.
당시 문단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던 김기림의 호의에 감격한 김광균은 1937년 5월말 '조선일보사'로 그를 직접 찾아가 처음 만난다. 김광균은 이후로도 김기림을 자주 만나면서 그의 모더니즘 세계에 동화되어 간다. 특히 서구 이미지즘의 특징으로 무엇보다 회화성과 조소성을 들던 김기림의 영향으로 김광균의 서구 회화에 대한 열정은 오히려 실에 대한 열의를 앞지를 정도로 고조된다.
"고호의 '수차가 있는 가교'를 처음 보고 두 눈알이 빠지는 것 같은 감동을 느낀 것도 그 무렵이다. 그때 느낀 유럽 회화에 대한 놀라움은 지금도 생생하다. 세계 미술전집을 구하며, 거기 침몰하는 듯하여 나는 급속히 회화의 바다에 표류하기 시작했다. 시집보다 화집이 책상 위에 쌓이기 시작하였고, 내 정신 세계의 새로운 영양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것 같다."
이처럼 회화성은 그의 의식 깊이 창작의 절대적인 원칙으로 자리잡는다.
그의 시는 사물의 거죽만 담아낼 뿐 속까지 꿰뚫지 못함으로써 추상적 관념시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모더니즘이란 원래 1920년대의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시들을 극복하고자 관련에서 벗어난 객관성을 위주로 하는 정신에서 비롯한 것인데, 김광균의 시에서는 주관적 감정에 사로잡힌 애상성과 낭만성 등이 다량으로 검출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의 비평은 극도로 감정이 배제된 서구 주지주의의 틀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이런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김광균의 시는 오히려 서구 모더니즘의 회화적 기법위에 전통적이고 애상적인 감성을 덧보태 독자성을 띠게 된 한국형 이미지즘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해방 뒤 김광균은 김기림 등의 영향으로 '조선문학가동맹'에 잠시 이름을 올리지만, 곧 동맹의 정치성향과 내부 분열에 회의를 느낀다. 그는 "예술성을 상실한 시란 정치에 기여는 고사하고 모체인 문학까지도 상실하는 우스꽝스러운 결과를 맺을 뿐이다." 라고 비판한다. 곧 김광균은 동맹에서 탈퇴한 후 홀로 묵묵히 창작에 임한다.
공감각을 거느리고 선명한 그림을 그리던 김광균은 1947년 봄에 이르러 갑자기 회화적인 기법이 현저히 감소한 직설적인 노래를 읊게 된다.
"시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나/ 설흔 먹은 사내가 하나 잠을 못 잔다/ 먼- 기적소리처럼 처마를 스쳐가고/ 잠들은 아내와 어린 것의 베갯맡에/ 밤눈이 나려 쌓이나 보다/ 무수한 곤에 빰을 얻어맞으며/ 항시 곤두박질을 쳐오던 생활의 노래."
이 시는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책임과 생활의 피로로 뒤척이는 한 시인의 번뇌에 찌들리고 구겨진 그림 같아서 슬프게 느껴진다. 1950년을 기점으로 마치 시 속의 "설흔 먹은 사내가" 무슨 결심이나 한 것처럼 사실상 문단과 결별하고 사업가의 길을 간다. '건설사업공사'의 사장을 맡아 일하면서도 시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그는 1957년 [기항지] 이후의 작품을 모아 시집 [황혼가]를 펴낸다.
아래는 홍성유 소설가가 생전의 김광균 선생을 묘사한 이야기이다.
"선생은〈와사등〉의 시인으로 뿐만 아니라 실업인으로도 재계에 널리 알려져 있을뿐더러 보기 드문 미식가이며 식도락가이시다. 만일 내가 식도락가에 속한다면 나는 향토미각에 치우친 것에 비해, 선생은 한식은 물론 일식·양식·중국식에 두루 도통한 식도락가며 미식가인 셈이다. 때문에 나와 어느 면에서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어서 문단의 까마득한 후배이며 연령의 현격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자주 나를 불러내어 내 호주머니 사정으론 감히 엄두를 내기 어려운 일류호텔이나 최고급 레스토랑에 초대, 진귀하고 맛있는 음식을 맛보여주곤 하셨다. 뿐더러 외국의 식도락 서적을 손수 구해 보내주실 만큼 자상하기도 하다. 내 서가에 꽃혀 있는 외국의 식도락관계 서적은 대부분 선생께서 보내주신 것들이다. 그런가 하면 선생은 이따금「설렁탕 잘하는 집이 어디냐?」,「꼬리곰탕이 먹고 싶은데 어딜 가면 좋으냐?」,「서울에서 막국수 제일 잘하는 집이 어디냐?」하고 전화로 자문을 구해 오시곤 했다."
'문인 일화(ㄱ-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광섭(1905-1977, 함북 경성) (0) | 2010.08.30 |
---|---|
김광규(1941- , 서울 홍제동) (0) | 2010.08.30 |
김동인(1900∼1951, 평양) (0) | 2010.08.30 |
김유정(1908-1937, 강원도 춘성 실레마을) (0) | 2010.08.30 |
김관식(1934- 1970 , 충남 논산) (0) | 2010.08.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