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ㄱ-ㅁ)

김유정(1908-1937, 강원도 춘성 실레마을)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13:39

김유정(1908-1937, 강원도 춘성 실레마을)

 

  맏아들 다음으로 연거푸 딸만 다섯을 낳은 끝에 일곱 번째에 얻은 아들인 유정은 남다른 귀여움을 받았다. 재산이 더 많이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의 아명을 「멱설이」라 불렀는데, 이 귀염둥이 막내둥이는 횟배를 자주 앓았다. 세 살박이 멱설이가 배가 아프다고 하루에도 몇번씩 자반 뒤집기를 하자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담배를 가르쳤다. 아버지가 대에 엽초를 담으면 멱설이는 칼표 권련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어른이 성냥불을 대어줄 때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래서 멱설이는 아무 앞에서나 담배를 피우되 피우는 폼이 어른과 같이 익숙했다.

유정이 휘문고보에 다니던 무렵, 형의 난봉은 절정에 달해 결국 재산을 모두 탕진하기에 이른다. 마침내 1928년 봄에는 서울 살림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되어 고향 춘천 실레로 이사하게 되었다. 1929년 봄에 김유정이 평생동안 고통을 당한 두 가지 병을 앓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치질과 사랑병이었다. 전자가 죽는 순간까지 그에게 육체적 고통을 주었다면 후자는 정신적 고통을 주었다.

 병은 한 여자에 대한 열렬한 짝사랑으로부터 연유한 것이었다. 그의 짝사랑은 장안에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을 정도로 유명한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뒷날 1965년에 인간 문화재 제 5호로 지정 받게 되는, 당대 명창 박녹주에 대한 것이었다. 그 당시 박녹주는 스물 일곱 살이었고 김유정은 스물 두 살이었다. 유정은 박녹주에게 숱한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에는 자신에 대한 소개와 함께 사랑을 애소하는 내용으로 차 있었다.  녹주는 유정이 자신을 연모하는 것을 가당찮게 여겼다. 자신의 사랑도 주체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판국에 낯간지러운 연애 편지에 연연해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가을이 되면서부터 툭하면 집으로 찾아왔다. 나는 절대 만나주지 않았다. 그는 마루에 혼자 쓸쓸히 앉았다 가곤 했다. …겨울이 되자 그의 편지는 비장해졌다. '나는 술로 밤을 새운다. 술을 먹으면 너를 생각한다. 지금쯤 너는 어느 요정에 가서 소리를 하고 있겠지. 이 추운 밤에 홀로 술을 드는 나를 생가해보라. 사랑이란 것은 억지로 식어지는 것이 아니다. 뭣과도 바꿀 수 없다. 지금 이 순간도 너를 생각한다.']-박녹주, <나의 이력서> 중에서

 사랑의 편지는 매일 계속되었으나 반응은 전혀 없었다. 우울한 날들을 주체할 수 없어 유정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아주 이따금 목돈이 생긴 날은 카페에 가서 마셨지만 대개의 경우는 목로주점이나 거리의 선술집에서 취할 때까지 마셔댔다.

 1930년 봄 깅유정은 연희 전문 학교 입학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두 달 17일 만에 '제명'당하고 말았다. 그것은 '성행'이 불량했고(박녹주에 대한 사랑이 장안의 가십거리가 되고 그것이 학교에 알려졌을 수 있다) 성적이 열등하였으며 잇따른 무단 결석 때문이었다. 유정의 마음은 더욱 외곬수로 치닫게 된다. 그의 마음은 반응 없는 녹주에게로 더욱 쏠릴 수밖에 없었다.

 녹주의 글에 의하면 유정의 편지는 날이 갈수록 숫제 협박조였고 혈서를 더러 보냈다. 1930년 초가을에 녹주는 신씨의 배신으로 충격을 받고 자살 소동을 벌였다. 술에 취해 수면제를 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루만에 병원에서 깨어났다. 그 병실에는 남씨, 신씨, 그리고 유정이 와 있었다. 유정의 초췌한 몰골이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켰는지, 처음으로 다정히 오래 얘기했다. 녹주는 유정에게 얼마 있지 않아 신씨와 헤어질 터이니, 그 때까지 열심히 공부를 하라고 타일렀다.

 [그는 두달 동안 하루도 빼지 않고 내 집 앞을 오락거렸다고 했다. 그러면서 결혼문제를 결정짓자고 잘라 말했다. 나는 말을 완곡하게 해서 그의 요구를 거절했다. 창백하던 그의 얼굴은 무섭게 일그러지더니 '도대체 네가 사람이냐?' 하고 소리쳤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던 김유정은 죽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내가 큰 소리를 쳐서 미안해'하고 사과했다. 이윽고 나는 갈 곳이 있어 자리를 떠야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30분만 더 있다 가라고 했다. 우리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30분을 앉아 있었다. 그는 연거푸 술잔만 기울였다. 내가 방을 나오는데도 쳐다보지 않고 술만 들었다. 그것이 김유정과 마지막 만남이었다.]-박녹주, <나의 이력서> 중에서

  1933년 빈털털이가 된 그는 사직동의 누나 집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전차비, 담배값 같은 것도 누나의 눈치를 보며 타내야 했다. 꼭 나가야 할 일이 있어도 누나의 기분이 좋지 않으면 손을 벌릴 수가 없었다. 매형 정씨도 놀고먹는 처지이면서 점차로 유정을 보는 눈이 달라졌으며 말끝마다 은근히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또한 괜한 일로 트집을 잡아 누나를 괴롭혔으며, 점차로 처남인 유정 앞에서도 손찌검을 하기까지 했다. 그럴 때마다 유정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절망감, 수치감 같은 것이 전신을 뒤흔들었다. 냅다 뛰쳐나와 친구에게 가서 술을 퍼마셨다. 점점 그런 생활 속에 길들여지고 찌들어갔다. 경제적인 곤궁과 울화와 폭음이 그의 건강을 날로 악화시켜 갔다. 오후가 되면 신열도 자주 나고 잠들면 악몽에 시달리곤 했다. 몸은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자신의 건강이 매우 나빠졌음을 느낀 유정은 어느 날 서울 시청 위생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는데, 천만 뜻밖에도 폐결핵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병이 하나 더 늘어난 것이었다.

 그런 지경에 이르러서도 술을 삼가지 않고 주먹도 늘어만 갔다. 보통 때는 시무룩하고 말을 조금 더듬었는데 술이 들어가면 호탕해지고 말이 많아졌다. 비위에 거슬리면 주먹질도 사양치 않았다. 김유정에게 있어서 술은 열정의 샘이었고 곤고한 현실을 무화시키는 지우개였다. 목숨을 갉아먹는 폐결핵의 약을 사기 위해 원고를 썼고, 돈을 손에 쥐면 술을 마셨다. 취하면 슬피 울고, 깨면 술을 마셨다.

 그는 李箱과도 친하게 지냈다. 작품은 대조적이었으나 두 사람은 서로 인간적인 이념과 삶의 목적이 비슷했던 것이다. 이따금 이상이 손바닥만한 먹도미 한 마리 사들고 유정을 찾아오면 그걸 안주로 삼아 술을 마셨다.  李箱은 유정의 작품을 좋아했고 인사를 서로 나눈 뒤에 서로 뜻이 통했다. 더구나 그들은 모두 폐병쟁이였다. 이러한 동질감이 그들을 묶어 자주 술집으로 동행하게 했다. 어찌 보면 유정과 李箱은 술을 마실 때마다 서로를 보며 위안했는지도 모른다. 폐병에 술이 독약과 같은 것이라는 경고는 받았을 터였으니 서로 '저 친구도 마시는데 어쩔라구'하는 심정이었을 수도 있다.

 李箱이 쓴 글에서 유정을 묘사한 것을 보면 '겨울에 우굴쭈굴한 벙거지를 쓰고 다니는 유정이 술이 잘 취하고 취하기만 하면 통성명을 다시 해야 할 정도로 딴 사람이 되었다. 주먹을 쥐고 둘째 손가락만 쭉 펴고 머리를 후벼파면 그게 취한 증거였다. 평소 말이 없는 그였지만 술에 취하면 문학 토론에도 열을 올리고, '강원도 아리랑'을 끈적끈적한 목소리로 잘도 내뽑았다'고 한다. 이상의 말대로 '취하기만 하면 딴 사람'이 되었던 김유정에게 술은 깊어가는 병의 마취제였다.

 그는 소설 쓰는 일을 통해서 아직은 절망하지 않고 살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소설을 쓰는 일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유정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었다. 1937년 유정은 다섯째 누이의 집이었던 경기도 광주에서 스물 아홉의 나이로 삶을 마감한다. 20여 일 뒤 멀리 도쿄에 있는 이상도 끝내 김유정의 뒤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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