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1876-1949, 황해도 해주)
이하의 내용은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김구는 27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어 온 민족 독립운동가이다. 김구의 가계는 안동 김씨로서 신라 경순왕과 고려 김방경의 후예이다. 김구의 아버지 순영(淳永)은 4형제중 둘째로 의협심과 정의감이 넘치고 양반에 대한 저항심이 강한 분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현풍 곽씨(이름, 낙원)로 l4의 나이에 열살 위인 신랑을 맞아 17세 때 난산 끝에 김구를 낳았다. 김구가 옥에 갇혔을 때 옥바라지를 맡아 위로와 용기를 주었을 뿐 아니라 '안악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때에는 "경기감사를 하는 것보다 더 자랑스럽다"고 말함으로써 김구에게 큰 격려를 주었다. 일찍 죽은 며느리를 대신하여 손자 인(仁)과 신(信)을 양육했으며, 김구가 독립운동을 하는 데에 지장되지 않도록 두 손자를 이끌고 귀국했다. 김구가 일지(逸志)를 쓸 때 그 자세한 연월과 일시를 일일이 자문할 정도로 만년에까지 총기를 간직하셨다.
김구는 1892년 과거에 낙방하는 것을 계기로 인생의 활로를 새롭게 모색한다. 19세기말의 민족적 수난을 감지하면서 동학에 입문한 김구는 최시형으로부터 황해도 팔봉접주로 임명받아 해주성 공격에 앞장섰으나 청군의 철수로 실패하였고, 황해도 동학군의 자중지란으로 세력을 잃게 되자 안중근의 부친 태훈의 호의를 받아들여 부모를 모시고 청계동으로 들어가 잠시 우거하였다. 그는 거기서 일생동안 자신에게 사상적 영향을 끼친 척사위정(斥邪衛正)계의 유학자 고능선을 만나 그의 섬세한 가르침을 받았다.
이 때 국내에서는 명성황후가 '왜놈' 들에게 시해당한 데다가 단발령 시행으로 백성들의 분기가 탱천하여 이곳 저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방랑길'에 오른 김구는 1896년 대동강 하류인 치하포 주막에서 만난 일본인을, 그가 명성황후를 죽인 미우라(三浦梧樓) 공사이거나 그 일당의 하나일 것이라고 단정하고 살해하였다. 그 일본인은 '육군중위' 쓰치다(土田)였다. 당시 김구 선생은 인천감옥에 수감된 후 사형선고까지 받게 되었다. 고종은 그 사실을 사형선고 이후에서야 알게 되었다. 사형집행 당일 보통 때 같으면 낮에 집행함이 원칙이나 김구 선생이 수감되어 있던 인천 감옥소의 관리들이 저녁때까지 시간을 끌고 있던 중 천행으로 고종의 사형집행 연기결정이 떨어졌다. 이 때 사용된 연락수단이 3일전 개통된 한성-제물포 간 행정전화였다. 전화의 개통이 없었더라면 김구를 살리고자 하는 고종의 마음은 사형이 집행된 후에나 전달되었을 것이다.
감옥 밖의 구출운동이 한계에 이른 것을 안 김구는 탈옥의 비상수단을 감행하였다. 탈옥에 성공한 김구는 삼남 지방을 주유하다가 공주 마곡사에 이르러 승려가 되어 원종(圓宗)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탈옥에 따른 위험을 감추기 위해서는 승려로 신분을 위장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구는 평안도의 영천사 생활을 끝으로 일년여 동안의 승려 생활을 청산하고 환속, 귀가하였다.
1902년 부친상을 당한 김구는 그 이듬해 예수교에 입교함과 동시에 구국교육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예수교와 관련을 맺게 된 것은 예수교가 애국계몽운동에 가장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과거 시험을 위한 공부와 잡학(雜學)에서 시작, 동학·유학·불교를 거쳐 예수교에 정착하는 사상적인 방랑을 경험하였다. 김구는 장연의 광진학교와 봉양학교, 문화의 서명의숙 등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한편 사범 강습회를 열어 교사를 양성, 훈련하였다. 1907년에는 안창호·전덕기·이승훈 등과 함께 비밀독립운동 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장기적인 독립운동에 대비하였다.
김구는 고능선의 손녀와 혼약이 깨어진 후에 결혼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평양 사범강습 중(1904)에 최광옥의 소개로 안창호의 동생 신호를 만나 약혼 단계에 이르렀으나 신호 측의 사정으로 결혼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 해 말에 최준례를 만나 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약혼하고 최준례를 서울의 정신학교에 유학시킨 후 곧 결혼하였다.
김구는 1909년 안중근의 의거로 잠시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으나 무혐의로 곧 출감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 연말 '안악사건(일명 안명근 사건)'에 연루되어 15년 징역을 언도받았고 수감 중에 터진 '105인사건' 에 걸려 또 2년을 추가받아 17년의 징역에 처하게 되었다. 처음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다시 인천 감옥으로 이감되어 항만 축조공사 등에 강제 노역당했다. 그는 옥고를 치르는 동안에 이름 김구(金龜)를 김구(金九)로 바꾸고, 호 연하(蓮下)를 백범(白凡)으로 바꾸었다. 이름을 바꾼 것은 일제의 호적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이고, 호를 바꾼 것은 "우리 나라의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지금의 나의 정도는 되고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소원을 가지자"는 뜻에서였다. 하층민과 함께 하려는 김구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
1914년 인천감옥에서 가석방된 김구는 안악으로 돌아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김구는 자유롭게 뛰어들지 못하는 자신의 가석방 신세를 생각하면서 민족독립을 위한 새로운 결단을 내린다. 망명이었다. 3월 3일 사리원에서 경의선 열차를 타고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넌 김구는, 1945년 11월 23일 그의 나이 70세에 임정 정부의 주석으로 임정 요인을 이끌고 환국하기까지 27년간 근대사에서 가장 긴 시간을 버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붙들게 되었다.
망명 길에 오른 김구는 바로 애국계몽운동 시절의 선배이며 임시 의정원 의장인 이동녕(李東寧)을 찾아 임시정부에 참여하게 되었다. 김구는 안창호(安昌浩)를 통하여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자원하였다. 초창기 임시정부를 주도하던 안창호는 국무회의 결의를 거쳐 김구를 경무국장에 임명하였다. 김구는 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을 모시고 임시정부의 보위임무를 수행하였던 것이다. 20여명의 정복 또는 변복(變服)의 경호원을 거느리기는 했지만, 일제측의 파괴공작과 임정요인 위해 공작으로 김구는 한 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김구는 1931년초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임시정부의 운명을 가늠하는 특수공작의 전권을 위임받고 극비로 열혈 구국청년을 모아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치밀한 준비를 갖추어 1931년 1월에 일왕 폭사 응징을 위한 이봉창의 동경의거(東京義擧)와 그해 4월에 윤봉길의 홍구공원(虹口公園) 의거(義擧)를 차례로 거사함으로써 한중 양국 인민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윤봉길은 거사 날 아침에 김구를 만나 자신의 6원짜리 시계를 김구에게 건네고 2원짜리 김구의 낡은 시계를 받아갔는데, 윤봉길의 시계는 김구의 유품으로 전하고 있다. 일제는 홍구공원 의거 직후 김구의 몸값을 30만원에서 60만원으로 올리는 등 백범 체포 혈안이 되어 있었다.
1940년에 임시정부는 임시정부를 내외에 대표하는 주석과 그를 보좌하는 부주석제를 채택하여 김구가 주석에, 그리고 김규식이 부주석에 선임되었다. 김구는 이와 같이 임시정부를 강화하면서 연래의 숙원인 한국광복군을 창설, 지청천을 총사령관, 이범석을 참모장에 선임, 항전을 시작하였다. 처음 30여명의 인원으로 미주 교포의 성금을 바탕으로 발족한 한국광복군은 김원봉(金元鳳)이 지휘하던 조선 의용대까지 통합하면서 병력을 증강, 1945년 8월 해방전후에는 700여명 내외의 임시정부 국군으로 성장하였다. 그동안 광복군은 OSS훈련이라 칭하는 미군과의 합작 특수공작 훈련도 받았고, 대일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 2차대전에 참전, 본토 수복을 위한 국내 작전을 준비하던 중 일제의 패망과 조국 해방의 소식을 들었다.
김구 이하 임시정부 요인은 그 해 11월 장개석 국민당 정부의 뜨거운 환송을 받으며 중국 군용기 편으로 꿈에도 그리던 조국을 향하여 중경을 이륙하였다. 이 환국의 비행은 바로 임시정부의 금의환국(錦衣還國)이었으나 상해에서 미국기로 옮겨 타면서 임시정부의 법통은 무시되고, 임정 요인들은 조국을 잃었던 망명객의 개인 자격 환국이라 지칭되었다.
12월 19일 임시 정부 환영대회가 열렸을 때, 김구는 답사에서 "임시 정부는 결코 어떤 일계급, 어떤 일파의 정부가 아니라 전민족 각계급 각당파의 공동한 이해에 입각한 민족 단결의 정부였습니다. 친일파 민족반도를 제외한 우리 동포는 단결해야 합니다. 오직 단결이 있은 후에야 우리 독립 주권을 창조할 수 있고, 소위 38도선을 물리쳐 없앨 수 있고 친일파 민족 반도를 숙청할 수 있습니다" 라고 했다. 좌파가 계급 국가를 지향했다면 김구는 모든 계급의 공동 이해에 입각한 국가를, 이승만이 친일파까지 단결을 지향했다면 김구는 친일파를 숙청한 단결을 추구했다. 그리하여 환영대회가 끝나고 김구가 민족 세력의 총집결체로서 특별정치위원회(特別政治委員會)의 구성을 준비하자 정가의 주목을 한 몸에 모았던 것이다.
그런데 뜻과는 다르게 정국은 흘러갔다. 좌파의 인민 공화국은 임시 정부와 대등한 정부적 존재로 자처하였고,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임시 정부 이상의 권위를 행사하려고 했다. 그런 가운데 한민당이 친일파 숙청을 주장하고 있던 임시 정부와 대립이 심화되어 자연 이승만과 한민당의 결속이 진행되었다.
1943년 신탁 통치안을 노골화한 모스크바 삼상회의(三相會議)의 결정 소식이 전해왔다. 5년간의 신탁 통치와 그 기간에 필요한 임시 정부를 미소 주둔군사령관으로 구성된 공동위원회(共同委員會)가 한국의 정당과 협의하여 수립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오자 김구는 곧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반대 결의를 하고 각 정당 대표와 종교 언론 관계자를 모아 반탁 운동을 새로운 독립 운동으로 선포하면서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信託統治反對國民總動員委員會)를 결성했다. 김구가 선두에 선 시민 대회를 서울 운동장에서 개최하는 한편, 임시 정부에서는 같은 날 국자(국자) 제1호를 선포하여 전국의 행정과 경찰 기구를 접수한다는 것과 국자 제2호로써 "국민은 우리 정부 지도하에 제반 사업을 부흥하기를 요망한다"고 주권행사를 선언함으로써 미군정에 정면으로 맞섰다. 이것은 분명히 자주 독립의 적극적인 표현이었으나 미군정으로 보면 반탁 정변이었다. 혹은 반쿠테타라고도 한다. 미군 점령하니까 반탁 쿠테타이기는 해도 외세를 배격하는 김구의 투철한 의지가 극명하게 드러난 역사적사건이었다.
인민 공화국 중앙위원회는 1월 1일 임시 정부에 대해 두 정부를 해체하고 통합할 것을 제의하고 이튿날 10시까지 회담할 것을 요구했다. 그것이 거절당하자 좌파는 북한의 찬탁 정국에 맞추어 2일 신탁 통치 찬성으로 돌변하고 3일 찬탁 대회를 열었으며 김구를 공격하고 나섰다. 이에 찬탁 반탁정국은 좌우익의 대립구도로 대치되어갔고 그 가운데 김구는 반탁과 우익의 영수로 자리 잡혀져 갔다.
미소의 대립이 냉전 체제로 치달아 남북의 국토 분단으로 전이됨에 따라 정국도 좌우 구도로 고착되어 가는 것을 약소 민족의 지도자인 김구가 극복하기란 용이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이승만의 정읍(井邑) 발언이 들려와 그후부터 이승만과 반탁 운동을 함께 전개하면서도 노선을 달리했다. 즉 김구의 반탁은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은 이승만의 단정안을 지원하였다. 이승만의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시켜 11월 14일 한국 총선거안을 가결하였고 유엔 한국임시위윈단을 설치하였다. 김구는 총선거안에 반대할 이유는 없었지만 단독 정부로 몰고 갈 것을 막기 위해 12월 22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이후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하여 혼신의 힘을 경주하였다.
1948년은 연초부터 단독 정부 수립안이 기세를 올렸다. 1월 8일에 입국한 유엔 한국위원단의 입북을 소련 측이 거절하자 미군정과 이승만과 한민당이 합작하여 단정 수립을 추진하였다. 이에 대하여 김구는 김규식과 합작하여 단정 반대 운동에 발벗고 나섰다.
결국 1948년 8월 15일과 9월 9일에 남북에서 각각 단정이 수립되어 김구의 통일 노력은 봉쇄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김구는 남북 정부 모두의 냉대를 받았고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건국실천원양성소 활동까지 탄압을 받다가 1949년 6월 26일 12시 45분,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운명하였다.
안두희(당시 32살)는 45구경 미제권총에서 4발의 총탄을 발사했다. 김구는 머리를 책상 위에 얹고 손은 테이블 한 모서리를 쥔 채 쓰러졌다. 사건 뒤 체포된 안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가 곧 15년형으로 감형되고 50년 7월 소위로 복귀했다. 그는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대령까지 진급했으나 이승만 정권 몰락 뒤 뜻있는 이들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암행을 계속했다.
"선생님이 안두희 총탄에 쓰러진 것과 거의 동시에 서대문서 경비주임이 경교장으로 뛰어들어왔어요. 그리고 잠시 뒤 군복차림의 정체불명 청년 4~5명이 들이닥쳐 안을 지프에 태워 어디론가 데리고갔습니다."
암살사건 당시 백범의 수행비서로 현장에 있던 선우진씨는 당시 범행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는 경찰과 군 등 당국이 이미 선생의 암살작업을 주도면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김구 선생을 암살한 뒤에 숨어 지내던 안두희씨가 오늘<96.10.23>오전 자신의 집에서 버스기사인 박기서에게 끝내 피살됐다. 김구 암살 이후 47년만의 일이었다. 안씨의 행적을 지속적으로 추적해온 권중희씨의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라는 책에 감명받았다는 버스 운전기사 박기서씨가 정의봉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40cm 길이의 방망이로 안씨를 살해했다. 안두희의 죽음으로 김구 죽음의 비밀은 수수께끼로 남을 확률이 높아졌다.
김구가 마지막 맞던 새해, 1949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유일한 최고의 염원은 조국의 자주적 민주적 통일뿐이다. 소련식의 민주주의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공산 독재정권을 세우는 것은 싫다. 미국식 민주주의가 아무리 좋다해도 독점 자본주의로 무산자를 괴롭힐 뿐 아니라 낙후한 국가를 자기 상품 시장화하는 데는 찬성할 수 없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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