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ㄱ-ㅁ)

김정한(1908-1998, 부산 동래)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13:54

김정한(1908-1998, 부산 동래)

 

  김정한은 무오사화 때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한 김일손의 16대손으로 1908년 9월 26(음) 경남 동래군 북면 남산동에서 김기수씨의 6남 2녀 8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김일손은 춘추관의 기사관으로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상관인 실록 당상관 이극돈이 저지른 나쁜 일을 그대로 쓰고, 또 세조의 왕위찬탈를 헐뜯은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실었다가 화를 입은 인물이다. 그 때 멸족의 위기를 피해 가까스로 도망한 김일손의 자손들(김해 김씨)이 경상도 땅에 흘러 들어가 숨어 살면서 김정한 씨 대까지 이어온 것이다.

 "우리 집안이 옛날부터 역적으로 몰린 집안이라 그런지 자연히 권력에 대한 반항심이 생기드만." 본인 자신도 조상의 내력이 오늘의 자기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 열한 살의 나이로 범어사에서 운영하던 사립 명정학교에 들어간다. 시간이 좀 지나자 어린 정한 군의 눈에는 불교의 부정적인 측면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범어사의 30∼40대의 스님들이 승적만 가지고 가까운 부락에 가정을 가지고 있으면서 절에는 별로 얼굴을 내밀지 않다가 주지 선거 때가 되면 몇 패로 나뉘어 몰려다니면서 싸움들을 하는 걸 보고 몹시 실망했다. 이들이 이렇게 주지 선거를 놓고 열을 올리는 까닭은 절의 전답을 비롯한 재산과 그와 관련된 개인적인 이해관계 때문이란 걸 알고 지금까지 불교에 관해 가졌던 생각을 바꾸게 됐다. 이와 같이 타락한 일부 불교계에 대하여 그는 이 불의에 붓으로 항거해서 그의 초기 작품 '사하촌', '옥심이' 같은데서 불교의 부정적인 측면이 여지없이 고발된다.

 그는 동래 고보에 다니는 동안 '일본놈을 반대하는 일' 이라면 무엇이든 빠지지 않고 끼어서 중학도 마치기 전에 스트라이크 꾼으로 불령선인 리스트에 올라 경찰서를 자주 출입하게 됐다. 동래고보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반일투쟁으로 이름난 학교였던만큼, 거의 해마다 스트라이크를 했던 터이라 그러한 가운데서 자란 문학정신이 어떠한 것인지는 가히 짐작을 할 수 있다. '민중' 을 위해 사는 방향을 잡은 그는 보통학교 교원 자격 시험을 치러 합격을 하게 되고, 졸업하던 28년 9월 울산 대현 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취임하게 된다.

 그가 교원으로 부임해서 단 석달만에 일본인들과 좌충우돌하면서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노예교사가 되기 싫었던' 그는 '부임 즉시부터 예의 반골 기질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는 교원이 되어서 첫 월급을 받아보니 일본인들이 우리보다 6할이나 더 받는 차별을 당하는 것을 보고 교원 연맹을 만들어 뜻을 펴보자는 취지문을 인쇄하여 경상남도의 교원들에게 발송했다. 그러나 한꺼번에 많은 편지가 배달되는 게 이상했던지 일본 경찰에 이 편지가 압수되어 잡혀가게 된다. 이와 같은 결과가 모여 그는 또다시 불령선인으로 낙인이 찍히게 되었고 부임한지 석 달만에 교직을 떠나야 했다.

 김정한은 이듬해(29년) 일본으로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된다. 일본에 갈 때 부인을 남겨두고 갔던 그는 그 후 일본 유학의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고 중도에 뜻을 꺾고 만다. 3학년 여름방학 때 마침 양산 농민봉기 사건이 터지게 된 것이다. 일본사람들은 낙동강변 좋은 땅을 헐값에 사서 다 차지하고 우리 농민들을 괴롭히니까 양산 농민조합에서 '소작료를 깎아 달라', '흉년에는 못 내겠다' 하고 나섰고 경찰이 농민 조합 간부들을 구속해 버렸다. 그러자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 지서를 습격하고 무기고를 탈취하게 된다. 그 사건이 터졌을 때 때마침 친구들과 고향에 나가 순회강연을 하고 다니고 있었던 그는 농민 조합을 재건하자는 운동을 하고 다니다 세 친구가 다 경찰에 잡혀 구속되고 말았다. 이번에는 직장이 아닌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일생의 운명을 결정지은 중대한 원인의 하나가 되어 버렸고 김정한은 세속적으로 불효자식이 되고 무능한 남편 무능한 애비가 되고, 반일 불온분자가 되었다

 이렇게 되어 집에 돌아와 있던 김정한은 다시 보통학교 교원으로 새 출발하게 된다. 그는 1933년 10월에 남해 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취임해서 4학년을 맡았다. 이 때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범어사 일부 승려의 횡포를 소재로 쓴 소설 '사하촌' 이 당선되었다. 그는 당시의 심정을 "소설을 써서 감정을 나타내고 뜻을 전달하고, 많은 사람들이 따르도록 하자. 이런 마음으로 소설을 쓰기로 작정했습니다" 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가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어 기성작가가 된 것은 더없이 기쁜 일이지만 그 당선으로 그에 못지 않은 화를 입기도 했다. 범어사특 청년들에게 육체적인 괴로움만 당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많은 괴로움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 김정한에게는 다시 커다란 사건이 생기게 된다.  남해읍 신사 앞에 벚나무가 있었는데, 마침 벚나무에 버찌가 익었는지 그걸 학교 다니는 애들이 따먹었다. 그러느라고 가지가 좀 부러진 것을 남해에 산림주사로 와 있던 일본인이 순시를 하다가 애들이 벚나무에 올라가서 열매 따 먹는 걸 보고 애들 둘을 붙들어서 벚나무에 동여맨 것이다.

 그 날 마침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달려간 그는 정말 애들이 묶여있는 걸 보고 벼르고 있었다. 마침 한국 사람집에 생일 초대를 받아 몇 명이 모여 술을 한잔 하게 되었는데 그 때 마침 그 산림주사가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그놈이 교감에게 갑자기 폭력을 휘두른 모습을 보게된 그는 참지 못하고 달려들어 손가락으로 그의 눈을 뽑아버리게 된다. 그는 이 일을 저질러 놓고 한국인 군수를 찾아가 이실직고하고 또 중간에 지방 유지가 나서서 일이 확대되지 않고 불기소 처분됐지만 그 일로 그는 그곳보다 더 벽지인 남해군 남명 공립보통학교로 쫓겨 가게 된다. 그래도 그에겐 그 일이 통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1940년, 일제의 발악이 극도에 달했을 때 그는 과감한 결정을 내린다. "창씨도 해야 했고 우리말 우리글도 가르칠 수 없게 됐고, 그래서 화가 나 있는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없앤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소설을 쓸 것이 아니라 이거 다 내던지고 신문을 살려야 겠다 싶어, 학교에 사표를 내고 빚을 내서 동아일보 동래지국을 인수하게 되었습니다."

 1940년 8월 조선. 동아 양대 지가 폐간됨에 따라 직장도 잃고 퇴직금도 날린 그는 11월에 경남 면포조합 서기로 취직하여 식구들과 연명한다. 그리고 그 후 그는 양복조합 서기로 자리를 옮겨 일하다가 해방을 맞게 된다. 그러나 해방 직전인 45년 5월 18일 그는 그를 위해 갖은 고생을 다해 온 아버지를 잃는다. "아버지는 나한테 저놈은 꾀를 낸다는 게 잡혀갈 꾀만 낸다고 하셨는데 아마 아버지 속에 멍이 되게 들었을 낍니다."

 해방은 그의 딱지를 '불령 선인' 에서 '불온 분자' 로 바꿔 달아 준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힘을 가진 사람들은 불령 선인의 리스트를 일제로부터 상속받아 전래의 비방처럼 그들을 핍박했다. 그런 가운데 그는 건국 준비 위원회 경남지부에 문화부 차장이라는 직책으로 참여하면서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어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승만 박사가 먼저 들어와 자리를 차지했다. 이 때 그는 민주 신보 논설위원이 돼서 이승만 박사를 비난하는 글을 썼다. 그는 부산 중학 교사를 거쳐 부산대학교 조교수가 되어 강단에 서면서도 이와 같은 주장을 버리지 않고 이승만의 독재와 불의에 항거하며 맞섰다.

 그러다가 6.25가 터지자 그는 몇 곱의 앙갚음을 받고 죽음의 늪에 빠져 허우적여야 했다. 이승만을 반대하던 사람들이 6.25때 좌익 불순분자로 몰려서 잡혀가는 것이었다. 그 때 부인과 큰 딸, 큰아들도 함께 잡혀가 고문을 당했다. 이 당시의 극한 상황이 '죽음을 각오하던 날' 이란 그의 글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곧 내게도 몽둥이질과 발길질이 시작되었다.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 이상하게도 그다지 아프지 않았다. 그저 툭 탁, 몽둥이와 발길이 살에 부딪는 둔탁한 소리만이 귀에 어렴풋이 들릴 따름이었다. 어느 방에선가 들려오는 아이들과 여인들의 까무러치는 듯한 비명소리에 섞여서. 자유를, 그리고 조국을 위해 쓰러져 간 사람들의 기막힌 고통과 기쁨을 아울러 생각하려고 애썼다. '

 다음은 그가 감옥에 있을 그 때의 처절했던 모습을 적은 것이었다.

 "감방장 이리 나왓." 그는 이내 나를 불러냈다."웃통 벗어!" 이유를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감방 위에 웃통을 벗은 채 꿇어 앉히었다. 느닷없이 몰강스런 물매질이 시작되었다. 등줄기가 아프다 아프다가 소리만 툭툭 들렸다. 아마 10분 이상을 맞았으리라 싶었다. 끈적끈적한게 등허리춤으로 흘러내렸다. 그러는 동안 그의 입에서는 말이라고는 처음 매질을 시작할 때의 단 한마디 뿐이었다. "이 개새끼." ....가혹한 벌이 끝나자, 나는 불 맞은 짐승처럼 간신히 감방으로 기어 들어왔다. 화석처럼 얼굴들이 굳어진 죄수들 속에서 나는 피를 흘리며 꿋꿋이 앉아 있었다. 시종일관했던 나의 무언은 인간이 인간을 괴롭히는 폭력에 대한 영원한 반항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때 유고의 다음과 같은 시구를 생각해 냈다. 오늘의 문제는 무얼까? 싸움이 있을 뿐이다. 내일의 문제는 무얼까? 이기는 일이다. 모든 날의 문제는? 떳떳하게 죽는 일이다.

 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담배꽁초가 나왔단 말야. 감방장 나오라고 해서 나갔지. '어느놈이 피웠나?' '모른다' '그럼 맛을 봐야 한다.' 그러고 고문을 하는데 허허 이놈들 글세 나를 벗겨놓고 등어리에다 촛불로 지져서 꽃 화(花) 자를 쓰는 기라. 어찌나 뜨거웠던지! 석방돼 나온 다음에도 그게 지워지지 않아서 목욕 가서도 돌아앉아서 씻었지 하하…"

 1960년 4.19가 터졌을 때 그는 그토록 싫어하던 독재와 불의의 정권이 무너지는 걸 보고 이제야 그가 바라던 때가 오는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4.19는 그가 앞으로 겪어야 할 새로운 고난과 시련의 씨앗이 됐던 것이다. 그는 4.19가 터지자 부산에서  교수 데모를 이끌었고, 부산대 교수회의 의장이 돼서 책임 추궁 문제로 어수선한 학교를 수습하는 한편, 문리과 대학 문학 부장으로 학장 일을 맡아보기도 했다. 61년 5.16이 터지자 마침내 시련이 닥쳐왔다. 그가 부산일보 사장 대신으로 교원노조에 나가 축사를 한 것, 4.19후에 대학에 가득 찬 알력과 질시, 또 그에 따른 모함, 이런 것들이 만들어 낸 그의 죄목은  엄청나기만 했다. 그는 또 길고 지루한 피신의 길에 올랐다. 결국 그를 피해 다니게 만든 이 사건은 흐지부지 돼서 그도 부산시경에 자수를 하게 됐고, 그 얼마 후에 풀려 나왔다. 그는 1년여를 이렇게 피해 다니며 살아야 했다.

 63년 6월부터 그는 다시 부산대학에 나가 국문과 강의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전임강사로 복직하게 됐는데 그는 독재를 몰아낸 4.19가 좋아서 일부러 4월 19일에 발령을 내달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65년 4월 19일 57세의 나이로 다시 전임강사가 되어 조교수를 거쳐 69년에 부교수직을 되찾았다. 그는 교직의 길에서도 적잖은 풍파를 만나 곤두박질을 했다가 다시 기어올라가야 했다.

 후학들에 대한 요산의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항상 열심히 정직하게 살기를 당부했고 태작을 내는 문학인에게는 문단에 문학 공해 풍토를 조성한다며 질책을 아끼지 않았다. 언젠가 당신이 무척이나 아끼는 문학인 한 사람이 이혼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단호히 출입금지를 명했다. “어려울 때 힘이 돼준 조강지처를 버리는 것은 남자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비록 안락을 취할 기회가 오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아픔을 준다면 그걸 취해서는 안된다는 뜻이었다.

유신정권에 저항한 수많은 민주 인사들이 영어의 몸이 되자 선생은 손수 내의를 구입하거나 영치금을 마련해 부산 교도소를 찾아 그것들을 전달했다. 그러면서 후학들에게는 “너거가 가서는 안된다. 심부름 하다가 중정에 찍히기라도 하면 우짤기고!”라는 말로 일을 맡기지 않았다.

1966년 그가 58세 때 그는 그의 인생에 있어서 획기적인 작업을 해낸다. 남들은 문단에서 은퇴할 나이에 환갑을 눈앞에 두고 20여년 간 붓을 꺾었다가 '모래톱 이야기' 를 발표해서 문단에 복귀한 것이다. "그 당시 사회 문제를 너무 외면한 문학이 범람했거든. 그래서 좀 답답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황순원씨 같은 분들이 주변에서 권해서 한 번 써 봤는데 논리적인 논설만 쓰다가 소설을 쓰려니 잘 안 써져서 아주 힘이 들었습니다."

 문단에서는 작가 김정한의 문단 복귀를 충격으로 받아들였고 그와 그의 작품에 호평과 찬사를 보냈다. 이에 힘입어 그는 '축생도' '뒷기미나루' 등을 속속 발표하며 화제를 모았고 1969년에는 중편 '수라도'로 제 6회 한국문학상을 받았고 71년에는 제 3회 문화예술상을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76년에는 문화훈장 은관을 받음으로써 그의 오랜 시련과 핍박에 대해 극히 작은 일부분을 보상받았다.

 그는 부산을 떠난 일이 없이 부산에 붙박고 살아왔다. 낙동강 근처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낙동강 유역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 왔기 때문인지 그에겐 '낙동강의 파수꾼' 이란 별명이 붙었다. 또 노작가 김정한은 한 번도 뜻을 굽힌 적이 없이 깨끗하고 정정하게 살아왔다.

그는 자기가 살아온 길을 스스로 '반골인생'으로 표현했다. 부산지방의 유지와 후학들이 성지곡 어린이 대공원에 '요산 김정한 문학비'를 세워, 민중을 위해 애써 온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렸다. 문제 학생, 불령 선인, 불온 분자, 문제 교수, 저항 작가를 거치며 그가 살아오는 사이 눈물겹게 겪은 고초와 간난과 시련에 대한 보상인 셈이다.

 문학비에는 평생을 정신의 꼿꼿함으로 사셨던 선생의 말씀이 새겨져 있다.

[사람답게 살아가라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불의에 타협한다든가
굴복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사람이 갈 길이 아니다.]

 이 말은 그의 소설 '산거족' 의 주인공 황거칠의 좌우명인데 이게 곧 그의 좌우명이기도 했다.

 일제시대와 군부 독재시대를 거치며 늘 진보적 문인이자 지식인으로서 현실을 지켜본 요산 김정한 선생은 굴곡 많은 현대사를 비판의 정신으로 지켜본 뒤, 이제 눈을 감았다. “나 평생을 천대받고 고통받는 이들 편에 서 있다”고 말하던 한 시대의 양심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