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ㄱ-ㅁ)

김주영(1939- , 경북 청송)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14:04

김주영(1939- , 경북 청송)

 

 헐렁한 옷차림에 허름한 구두이면서도 작가 김주영(金周榮)씨는 구두닦이를 보면 항상 구두를 닦는다. 격식에 거리낄 것 없는 "순수 자연인" 金씨이기에 구두를 광내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전후(戰後)자신의 슈샤인 보이 시절, 그 신산했던 기억을 다시 불러모으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문학평론가 김화영(金華榮)씨는 金씨의 소설에서 신발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 것은 그의 떠돌이 의식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산으로 첩첩이 막힌 경북 청송의 장터에서 태어난 金씨는 떠돌이 장꾼들의 삶을 보고 자라며 자신도 떠돌이를 택했다. 한 말(韓末)보부상의 삶과 풍속사를 재현한 "객주"를 비롯, "활빈도", "화척" 등 대하소설들은 바로 떠돌이 의식과 삶이 일궈낸 국문학의 한 성과로 볼 수 있다.

다음은 김주영의 글이다.

[중학교 시절까지, 나는 내 소유의 우산이 없었다. 비 오는 날의 우산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다. 비 오는 날 우산 빌리러 간다는 속담도 있듯이 비 오는 날의 우산은 빌릴 엄두조차 할 수 없는 물건이다. 그래서 나는 비가 내리는 날이면 돌각담을 오르는 호박잎이나 마을의 양조장 곁에 있는 작은 연못에서 연잎을 꺾어 우산 대신 머리 위에 얹고 다녔다. 그나마 대용품을 찾지 못하면 책보자기로 이마를 가리고 뛰어야 하는 슬픔을 겪곤 하였다. 그대로 맞고 다녀도 흉허물이 되지 않았던 눈 내리는 겨울날의 정서를 좋아했던 까닭도 거기에 있었다. 언제 내 소유의 우산을 가지게 될까. 찢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우산의 형용만 갖추고 있는 것이라면 좋았다. 그러나 그 뼈아픈 소원은 고등학교에 입학해서야 가까스로 성취할 수 있었다.

나이 육십인 지금 나에게는 무려 다섯 개의 우산이 있다. 그 중에서 네 개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것으로 보관된 지 오래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부터 나의 꿈은 장차 시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한 희망은 고등학교 과정을 거치고 졸업할 때까지 변하지 않고 줄곧 가슴속에 간직했던 열병으로 남아 있었다. 물론 대학에 입학해서도 줄곧 희망하는 시인이 되기 위해 시를 긁적거렸고, 고등학교 시절엔 대구에서 발행되는 일간 신문의 학생 문예란에 투고시를 발표하곤 하였다.

  대구에 있는 농대에 진학하라는 아버지의 삼엄한 강권을 뿌리치고 나는 몰래 서울로 줄행랑을 놓아서 서라벌예대에 시험을 치렀다. 다행히 합격이 되어서, 나는 나 혼자서만 바라던 대로 문예창작과에 입학하였다.

미아리고개에서 자취 생활이 시작되었고, 원하던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나는 열심히 시를 썼다. 그러나 한 학기를 보내면서 나는 자취 생활이나마 서울 유학이란 것이 애당초 무리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학교를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시라는 것이 어떤 가능성을 갖고 있다면, 다리 밑에서 움막을 짓고 산다 하더라도 그 고통을 감당해갈 자신이 있다고 믿기로 하였다.

나는 매우 비장한 각오를 하고 그때까지 썼던 시 몇 편을 정서하여 박목월 선생께 가져갔다. 내 걱정과는 달리 선생께서는 매우 순순히 작품을 받아주시며 읽어주겠다는 말씀까지 해주셨다. 나는 아주 기쁜 마음으로 박목월 선생과의 재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기회는 곧장 찾아오지 않았다.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치 오랜 시일이 지난 뒤 나는 두번째로 용기를 내어 박목월 선생을 찾아갔다.

선생께서는 마침 강의실에서 금방 돌아와 교수실 방 한켠에 설치되어 있는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손을 씻고 있는 선생께 다가가 지난번에 시를 써서 보여드리고자 하였던 학생이라고 말했다. 벽에 걸린 수건을 끌어당기고 있던 박목월 선생의 표정 위로 곤혹스러움이 스쳐간 것은 그때였다. "자넨 산문을 써보는 게 어떤가. 시는 안되겠더구먼."순간 나는 얼굴에 불을 끼얹는 것 같았다. 단 일 분 간이라도 선생님 앞에 서 있기가 민망스럽기 짝이 없었던 나는 인사를 드리는 둥 마는 둥 쫓기듯 교수실을 나왔다.

 내가 군대에 자원 입대하기로 결심을 굳힌 것은 그 해 겨울이었다. 물론 서울의 자취 생활을 더 이상 끌고 갈 용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나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포부도 있을 수 없었다. 나는 버림받은 아이처럼 외톨이가 되어서 여기저기로 마냥 굴러다녔다. 친구들의 술자리에 빌붙어 소주를 얻어 마시고 그들에게 빌붙어서 잠자리를 해결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애물단지로 전락해버렸다. 박목월 선생님의 말 한마디가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자포자기한 청년이라도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탈출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차제에 고민거리로 다가올 병역 의무를 앞질러 마치는 것도 실패한 자의 시간을 메울 수 있다는 생각 끝에 입대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서라벌예대 입학을 계기로 나는 이미 아버지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입대 역시 나 혼자의 결심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시인의 꿈은 그러한 경로를 통해서 나에게로부터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어릴 때 가슴에 품고 있던 꿈의 자국이란 쉽사리 지워지는 법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룰 수 없었던 꿈은 지워지기는커녕 무덤에 갈 때까지 가슴에 품게 된다. 내 주위에 있는 시인들을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아래 글은 <떠돌이 소설의 숨은 힘>이라는 제목의 김주영씨 글을 줄인 것입니다.

 [제 고향은 경상도 첩첩산골입니다만 고향 사람들의 생활 패턴은 강원도와 비슷합니다. 이를테면 옥수수나 감자를 주식으로 해야 된다든지, 겨울에 눈이 많이 오는 것 따위가 그런 예입니다. 태백산맥 기슭에서 살았기 때문에,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북도였지만 생활은 강원도와 닮아 있었습니다. 저는 요즈음에도 양식(洋食)을 먹지 않습니다. 양식에는 옥수수와 감자가 나오니까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렸을 적에 너무 많이 먹은 나머지 질려서 못 먹습니다. 음식은 별로 가리지 않는 편이지만 수제비를 비롯한 몇 가지는 먹기가 좀 힘이 듭니다.

 …저는 그렇듯 좁은 산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바깥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공부도 잘 하지 않고 개구쟁이로 소년 시절을 보냈지만 호기심만은 누구보다 넘쳐 있었습니다. 언덕 위의 성당에 다니시는 분들이 와서 옹기를 많이 구웠어요. 가마에 불을 땔 때면 언덕 위에 옹기 가마가 있었기 때문에 마을 전체가 밤새도록 환합니다. 어떻게 저런 큰불이 있을 수 있을까? 그게 구경하고 싶어서 먹을 것을 주는 것도 아니고 애들이 가면 쫓아내는데도 밤새도록 구경을 합니다. 또 조그마한 장이 열리면 팔고 사고, 서로 싸우고 흥정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학교에도 가지 않고, 가더라도 아프다고 조퇴를 하고 나와서 장구경을 가곤 했습니다. 그릇에 붙은 상표 등을 주워서 구겨지지 않게 주머니에 넣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장사꾼들은 뭘 하고 살까? 어디에 사는 사람들일까?' 하고 골똘히 생각하곤 했습니다.

 60을 넘겼지만, 때로는 담배를 워낙 많이 피우니까 폐암에 걸리지 않을까 하고, 그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하루에 두 갑 정도 피우지만 술은 끊어도 담배는 못 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 기대하는 것은 내가 군에 입대하면서부터 담배를 줄기차게 피워 왔는데, 내 체내에 암으로 전이되지 않는 어떤 방호벽 같은 것이 신체 각 내부에 설치가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자정 능력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신체에도 자정 능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건강하게 지내는 것은 가난한 시절을 보내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가난했기 때문에 등 푸른 생선, 즉 고등어, 꽁치 등을 먹고 장으로 돌아다닐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여름 햇볕에 절어서 냄새 나면 소금을 치고, 굼벵이가 있으면 또 소금을 친 생선, 옥수수, 감자, 고구마, 무청 나물 이런 것들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경험들이 내 문학에 어떤 톤이 되어 주었다고 봅니다. 그와 함께 감수성이 더없이 풍부한 어린 시절에 품었던 바깥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며 호기심이 오늘날의 나로 하여금 떠돌이 문학을 깊이 파고들게 만든 힘의 원천이 되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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