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ㄱ-ㅁ)

나희덕(1966-, 충남 논산)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14:12

나희덕(1966-, 충남 논산)


아래는 박상건 시인의 글이다.

[ 그이는 66년 충남 논산 연무대 에덴원이라는 보육원에서 태어났다. 고아 아닌 고아로서 말이다. 아버지는 회사에서 결재서류 서식 등을 의뢰 받아 밤새도록 철필을 긁어 글씨를 쓰던 필경사였다. 청년시절에는 종교 이상주의를 꿈꾸던 교회 종지기였다. 순수 신앙공동체를 꿈꾸었고 함석헌 선생의 글들에 매료되었던 분이었다. 아버지는 신앙 공동체에서 어머니를 만나 결혼했다. 어머니는 친지가 운영하는 보육원 총무 일을 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그이도 고아 아닌 고아로 이곳에서 태어나 열살 때까지 자랐다. 서울 면목동으로 이사와 스무 살 처녀 때까지 어머니 천직을 따라 애향원이라는 보육원에서 성장했다. 부모는 있었지만 부모 없는 외로운 아이들과 함께 공동체적 분위기에서 젖어갔다. 자신의 끼를 발산하고 투정 부리던 시절도 생략된 채 부모 없는 아이들과 똑 같이 밥 먹고 옷 입으며 지극히 평등한(?) 시절을 보냈다. 또래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생활하고 감정을 절제하는 법까지 터득했다.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소녀 나희덕. 소녀는 유달리 예뻤다. 그래서 양자나 양녀를 구하러 온 사람들에게 늘 먼저 지목 받곤 했다. 그 때마다 부모님은 소녀를 숨기곤 했다. 그럴 때마다 부모와 그이가 불편하고 불안했던 것은 다른 아이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타인을 향한 생각뿐이었다. 또래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아직도 깊고 커서 그 때의 일들을 시의 소재로 쓰지 않고 있을 정도이다. 행여 친구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줄까봐서 말이다.


그러나 때로는 울적했고 그 울타리를 벗어나고 싶을 때도 있었다.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어린 나이였을 게다. 생활 환경과 풋풋하고 높은 꿈을 꾸며 살던 시절과의 거리에서 오는 정신적 혼란을 겪었다. 어느 가을날 보육원을 나서 노을 길을 따라 혼자 걷던 적이 있다. 툭 뚫린 여러 갈래의 길이 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 길이 호남고속도로 인터체인지였다. 보육원으로 돌아와 혼이 났던 소녀는 그네를 뛰며 마음을 달래곤 했다. 그 때의 기억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산 너머 고운 노을을 보려고/그네를 힘차게 차고 올라 발을 굴렀지" 그리고는 "아름다움에 취해 땅끝을 찾아갔지/그건 아마도 끝이 아니었을지 몰라"라고.

그 시절을 거치면서 남루한 생활도 생활이지만 아버지에 대한 사랑 또한 애틋했다. 그 사랑이 절절하게 그려진 시가 '누에의 방'이다.


"가리방 긁는 소리가 밤새 들리던 밤/목에 둘렀던 수건을 감아 뜨거운 전구알을 갈던 모습이며/쥐가 난 다리를 뻗어서 두드리던 모습이며/전구 위에 씌웠던 종이갓이 검게 타 들어가던 모습이며/자줏빛으로 죽어가던 손마디와 팔꿈치를 문지르던 모습이며/내가 반쯤 뜬 눈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을/아버지는 알고 계셨을까 그 방을 벗어나고 싶어했다는 것을"


희미한 백열등 아래서 가리방(철필)으로 긁어가며 대신 글을 써주는 게 생업이었던 아버지는 좁은 방에서 뒤척이는 식솔들의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그 시절 곳간이나 헛간에서 쓰던 아스라한 십오 촉 불빛에 기대어 일을 했다. 그나마 종이와 수건으로 전구를 감싼 채 눈을 비벼가며, 손마디와 팔꿈치를 문질러 가며 밤을 지샜다. 그 모습을 훔쳐보고 가슴 아파하는 큰딸, 한편으로 가슴이 저렸고 한편으로는 이런 삶으로부터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아버지는 본디 글을 쓰고 싶어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딸이 법대에 가서 아버지의 못 다한 삶을 보상하여 주길 바랐다. 우리시대 모든 아버지가 그랬듯이.

그러나 딸은 시인이 되었다. 아버지가 가고 싶어하던 길을 딸이 시인의 이름으로 간 것이다. 그것도 남루한 가난을 가난인 채 울러 매고 운명적으로 걷는 시인 말이다.


그이가 처음 문학과 인연을 맺은 것은 중3 때의 일이다. 선생님 권유로 백일장에 나가 상을 받으면서였다. 고등학교 때는 문예반 활동에 푹 빠졌고 방학이면 종로서적이 바로 도서관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종로서적으로 등교(?)하기를 되풀이했다. 저녁이 오도록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김춘수 박재삼 김수영 강은교 시인 등의 시집과 세계시인선을 읽었다.


대학에 입학하자 최루탄, 돌멩이들이 기다렸다. 그 시절 이녁은 글쓰기에는 너무나 평범한 학생이라고 생각했다. 그이의 꿈은 학자였다. 그러나 80년대 캠퍼스 상황은 그리 쉽게 놔두지 않았다. 한 때 사회과학 동아리에서 활동한 적도 있었지만 2학년 때 문학회로 옮겼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돌 던지고 최루탄을 덮어 쓴 채 분노하고 남들처럼 돌멩이를 마음껏 던져보지 못했던 일, 어깨에 어깨를 걸고 거리로 뛰쳐나가 보지 못한 일들이 빚으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움켜쥐고 살아온 손바닥을/가만히 내려놓고 펴보는 날이 있네/지나온 강물처럼 손금을 들여다보는/그런 날이 있네/그러면 내 스무 살 때 쥐어진 돌 하나/어디로도 굴러가지 못하고/아직 그 안에 남아 있는 걸 보네//가투 장소가 적힌 쪽지를 처음 받아들던 날/그건 종이가 아니라 뜨거운 돌이었네/누구에도 그 돌 끝내 던지지 못했네/한번도 뜨겁게 끌어안지 못한 이십대/화상마저 늙어가기 시작한 삼십대/던지지 못한 그 돌/오래된 질문처럼 내 손에 박혀 있네"('뜨거운 돌' 중에서)


80년대 대학 시절은 시대적 아픔 못지않게 개인적 고통도 깊고 질긴 것이었다. 다섯 개의 아르바이트까지 해가며 학비를 벌어야 했고 대학을 다니며 가족까지 부양했다. 집안의 종교적 분위기와 겹쳐 정신적 갈등을 견뎌내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수도원, 기도원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모든 운명이나 숙명이라는 것이 스스로 깨닫고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을 확인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젊은 날의 아픔과 갈등이 결국은 시의 불꽃을 긋는 큰 전기를 만들어 주었다. 삶의 연륜에 비해 버겁기만 했던 특이한 가족사와 사회적 격랑을 한 몸에 끌어안고 오갔던 나희덕 시인.


그런 삶의 편린들이 마침내 가슴속에서 시로 우러나오고 있다. 그것이 시인 나희덕의 작품의 특징이기도 하다. 아무리 잘 나가는 시인이라도 한 생애에 대표작은 두어 작품에 불과하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지금 그이는 가래떡을 뽑아내듯이 희고 고운 시편들을 쏟아내고 있다. 꺼이꺼이 울다 지칠 때마다 속울음으로 꽉꽉 눌러 죽인 울음들을 비로소 터뜨리듯이 말이다. 연이은 문학상 수상 소식은 그런 질곡의 시간들이 강물처럼 카타르시스화 되는 모습이다. 최근 김수영 문학상에 이어, 김달진 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한동안 그렇게 문단의 주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캠퍼스에서 못 던진 돌멩이 대신에 차돌처럼 단단한 시적 토대를 만들어 가는 나희덕 시인. 쉬이 울지 않고 쉬이 언어화하지 않으면서 절제되고 안으로 굳어진 의식의 씨알들이 상상력을 타고 시의 대지에서 시나브로 피어나고 있다. 그것은 나름의 창작 원칙을 지키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시라는 것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의 소재를 착상하면 안에서 우러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마음 속에 오래도록 간직해 두는 편이다. 생감이 홍시가 될 까지. 홍시감이 찔근찔근한 곶감이 다 되도록, 시상이 영혼과 함께 익어가 영혼의 언어로 발효될 때에야 작품을 발표한다. 시란 삶과 일심동체라고 믿는다. 삶이란 것이 세워 둔 계획표처럼 진행되는 것이 아니듯이 시 역시 방향을 정해 놓고 만드는 것이 나리라고 믿는다. 하루 하루 열정을 다하는 삶이듯이 시에 있어서도 그 어떤 의도성을 배제한다.


한동안 시간을 내어 그 시가 걸어온 뒤안길을 바라보면 이녁이 걸어온 길이 보인다. 그것이 바로 이녁의 인생 길이다. 걸어온 길, 흘러온 그 강물만큼 한 흐름을 바라보는 삶의 관조 앞에서 시는 신성할 수밖에 없다. 시인은 경건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 지, 시가 이야기해 주고 시가 내 마음의 갈피를 갈무리해 주는 삶. 그것이 그이와 그이 작품의 일체화가 아닐는지.  


그이를 인터뷰하러 간 날은 때마침 안도현 시인의 특강이 있는 날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학교 앞 '메종'이라는 호프집에서 뒷풀이가 있었다. 학생들 질문이 쏟아졌다. 백일장 특차생으로 입학한 소위 백일장 킬러 등 여러 문학도들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희덕 교수는 이런 답변을 했었다.


"글은 무엇을 확인해 주는 것이 아니다. 읽어주고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충족감이다. 스스로의 만족이다. 외적인 것을 기대하면 스스로 소외되고 실망한다. 성적은 몇 등이라고 점수를 매겨주지만 문학은 그런 것이 아니다. 상을 위해 상금을 위해 백일장에 나가고 그런 성적에 얽매이면 바람직하지 못하다. 글을 쓰는 업으로 살아야 한다" 라고.


그렇다. 문학은 그런 것이다. 그런 문학가의 작품이 아름답다. 쓰고 차디찬 시대의 한복판을 지나쳐 온 그이는 어려운 고개를 넘으면서도 그런 시를 쓰기 위해 늘 전업의 길을 꿈꿨다. 대학 졸업 후 생활이 어려워 교사를 택했고 해당 학내 복잡한 문제에다 전교조 창립 문제 등으로 골치가 아팠던 시절,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기도 했다. 이중삼중의 고통이 뒤따랐다.


한 때 방송작가 일도 했지만 피폐한 자신과의 싸움을 위해 전업의 길을 걷고자 했던 것. 늘 그랬던 것처럼 학비 대책도 없이 대학원에 진학했다. 생활이 나아진 것이 없었지만 장애물을 피해가려는 마음은 손끝만치도 없었다. 생업으로써 일주일에 무려 20시간을 뛰어다니던 시간강사 시절도 거쳤다. 본디 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그이는 지금, 이제 그 길을 걷고 있다. 꿈꾸는 무등산에 등 기대고 삶도 학문도 푸르게 푸르게 짙어가고 있다. 강사시절보다 강의 부담이 없어 조금은 쉼 호흡을 하면서 걸을 수 있게 됨에 감사한다.


그렇다고 시간과 생활이 넉넉한 것만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꿈꾸는 세상이 아름답고 그런 세상과 아름다운 동행에 만족한다. 96년 3년간 머물렀던 진명여고를 떠나면서 학생들에게 마지막 인사말로 던져준 말이 있다. "습관으로서가 아니라, 매순간 새로운 충격과 활기 속에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스승으로 삼아 열심히 배우십시오". 9년간 교사 생활을 하며 갖고 있던 그 생각은 대학 강단에 서서도 변함이 없다.


배추벌레 한 마리가 배추 속에 갇혀 못 나오면 어떡하나를 걱정해 배추를 동여매지도 못하는 사람, 흩어지는 잔디씨에도 그림자는 있다고 노래한 시인, 자연에 놓인 그 자체를 하찮다고 하더라도 인정하고픈 사람, 그런 눈높이 사랑과 나눔 정신, 삶의 지혜들에서 길러내 고스란히 시로 쓰는 시인이 바로 나희덕 시인이다.


그런 삶의 오솔길이 아름다운 것은 달려온 젊은 날들이 깡그리 어둠에 갇혀 있었음에도 늘 밝음을 지향하며 노래하는 시인의 정신 때문이다. 쉼 없이 뒤척이고 소리치며 밀려온 파도가 밤새 조약돌을 들이치고 마침내 그 조약돌 사이로 스며드는 화해와 포용의 아침을 맞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그래서 해조음은 아름다운 것이고 젊은 날 핏줄 선 기개만 불거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네 부뜨막의 연탄불 기운으로 다가서는 시의 매력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렇게 시로써 우리네 겨울밤을 데워주는 그이는 이렇게 말했다. "어둠도 시에 들어오면 어둠만은 아닌 게 되는지, 때로 눈부시고 때로 감미롭기도 했죠. 그런 암전(暗電)에 대한 갈망이 이 저물녘의 시들을 낳았나 봐요. 어두워진다는 것, 그것은 스스로의 삶을 밝히려는 내 나름의 방식이자 안간힘이었던 셈입니다". 어둠이 빛을 찾아 몸부림치는 사이에 빛이 어둠에 스며드는 인생의 반전 같은 것. 그래서 세상은 살만한 것이 아닐까. 빛과 어둠의 사이좋은 조화. 그렇게 구체적인 체험이 깃든 시이기에 더욱 실감을 더해준다.


거기에 서정적 리듬을 깔면서 독자의 가슴으로 후벼 든다. "숨을수록 햇빛은 더 크게 소리쳤다", "바람에 눈이 찔린 나무", "아주 먼 데서 온 바람이 숲을 건드리자", "시들기 직전의 꽃들이 내지르는 향기" 등처럼 자연을 묘사하되 힘없이 주저앉지는 않고 톡톡 쏘는 경쾌하고 상큼한 메시지가 들어있다. 건강한 생명력이 일렁인다.


그런 일면을 잘 보여준 시가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라는 작품이다. 복숭아나무 여러 겹과 인간의 여러 마음을 대비시켰다. 너무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다가서기 싫다고 우화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이내 편견을 버리고 복숭아나무 그늘 아래서 깨달음의 저녁을 맞고 서 있다. 새해를 맞는 우리 모두에게 던져주는 삶의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꽃과 분홍빛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전문)]


아래는 나희덕 시인의 수필 <돌멩이가 묻고 있는 것>이다.


1.

교실 청소를 끝내고 나온 오후, 세상은 온통 먼지투성이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까지 걸어가는 동안에도 입 속에서 모래알이 자금자금 씹히는 것 같았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에도, 황사가 찾아오지 않는 계절에도, 학교에는 늘 먼지가 많았다. 어쩌면 아이들은 학교에 공부를 하러 오는 게 아니라 먼지를 일으키러 오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옷자락의 비벼댐, 쿵쾅거리는 신발에서 떨어지는 흙먼지, 칠판 위에서 글자들이 지워질 때 하얗게 쏟아지던 분필가루…… 학교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리창들은 먼지를 삼키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생각까지 든다.

고아원에도 먼지가 많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치고 박고 싸우는 아이들, 마당 가득 땅따먹기, 오징어, 삼팔선, 망까기의 영토를 그렸던 막대기들, 돌조각을 튕기고 던질 때마다 피어오르던 흙먼지, 오래 빨지 않은 이불을 털 때 햇빛 속에서 웅웅거리던 먼지들…… 우리의 놀잇감은 흙과 돌멩이, 그리고 때가 새까맣게 눌러앉은 서로의 몸뚱이뿐이었다. 아침저녁으로 각 방의 실장에게 청소검사와 용의검사를 받았지만, 빗자루와 물에 쓸려나가는 먼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먼지들은 끈질기게 돌아와 우리를 둘러싸고 구석구석 쌓여갔다.           

학교와 고아원. 매일 그 사이를 오가면서 내 마음 속에도 먼지가 쌓여갔다. 어떤 빗자루로도 좀처럼 쓸려나가지 않는 어떤 무력감, 두려움, 막막함, 이질감 같은 게 일찌감치 자리를 틀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그걸 일찍 철이 들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학교에 가면 고아원 패거리라고 놀리고 고아원에서는 총무 딸이라고 따돌림을 당하면서 나는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아이로 자라났다. 최대한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적대감의 대상이 되지 않으려고 몸과 마음을 한껏 구부리고 살았던 시간들. 그래서인지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그때의 기억들이 부옇게 흙먼지가 낀 것처럼 현상되곤 한다. 하지만 그 황사의 시절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기다려 준 친구가 있었다.

“아직까지 있었어? 이번 주는 청소당번이라 기다리지 말라니까……”

“괜찮아. 문제집 풀고 있었어. 어제 배운 문제인데도 왜 이렇게 어려운지. 난 아무래도 머리가 나쁜가 봐.”

“그래도 열심히 하면 중학교 가선 잘 할 거야.”

“그럴까? 니가 설명할 땐 알겠는데, 막상 나 혼자 풀려면 정말 모르겠어. 자아, 책가방 이리 줘. 내가 들어줄게.”

“싫어. 그러지 마. 자꾸 이러면 나 너랑 못 다닌다아.” 

“몸 약한 친구 가방 좀 들어주는 게 어때서 그래?”

“그래도 남들이 보면 총무 딸이 친구 부려먹는다고 뭐라 할 거라구.”   

“너는 나 공부 갈쳐주는데 나는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잖어.”

매일 이렇게 실랑이를 벌이다가 s는 끝내 내 책가방을 뺏어 들고야 말았다. 한 손에는 제 가방을, 다른 한 손에는 내 가방을 들고 가면서 s는 그때만큼은 행복하고 떳떳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반면 빈 손으로 걸어가야 하는 나는 좌불안석이었다. 그 불편함을 무릅쓰고  s에게 가방을 내맡겨야 했던 것은 그녀가 나를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만족감을 차마 빼앗을 수 없어서였다.

따악.

갑자기 뒤에서 돌멩이 한 개가 날아왔다. 돌아보니 고아원 남자애들 몇이 낄낄거리며 웃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 중 누가 돌을 던졌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K가 내 손목을 겨냥한 것이라면, 명중이었다. K는 도벽이 있는 아이답게 손놀림이 빠르고 정확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손목을 쥔 채 땅에 주저앉고 말았다.

“넌 손목아지가 없냐? 가방은 몸종이 들게 하고……”

K가 내뱉고 간 말이 귓가에서 아프게 맴돌았다. 내가 멍하니 땅바닥에 앉아 있는 동안 S는 팔을 걷어부치고 남자애들을 쫓아갔다가 돌아와 씩씩거렸다.

“나쁜 새끼들! 잘 알지도 못하고 지랄이야. 근데, 너 괜찮아? 많이 다쳤어?”

S는 팔목을 감싸쥔 내 손을 걷어내고 상처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울지도 못하고 그 돌멩이를 주워 들어 바라보았다. 돌멩이에는 왠지 피와 소금의 냄새가 묻어 있는 것 같았다. K가 나에게 돌을 던진 것은 단지 S에게 가방을 들게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부모를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돌멩이를 맞아야 했다. 그것은 K가 세상을 향해, 또는 수없이 불렀지만 끝내 대답이 없는 부모라는 존재를 향해 던졌을 증오의 돌멩이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 돌멩이는 내 손목에 시퍼런 멍을 남겼고,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보이지 않는 멍자국이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K는 나와 한 반이었고 나보다 공부를 잘했다. 유난히 영리하고 자존심이 강한 아이였지만, 그 아이가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은 주로 싸움과 도벽을 통해서였다. 학급에서 번번이 일어나던 도난사건이 K의 짓이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말하지는 못했다.

K는 고아원에서 싸준 도시락 중 반찬통은 일부러 빼버리고 매일 맨밥만 가져왔다. 그리고는 점심시간이면 맨밥에 학교에서 무상으로 주는 급식우유를 부어서 말아먹으며 보란 듯 떠들어댔다. 

“무슨 고아원이 반찬도 안 싸줘. 총무 딸만 입 있냐?”

K는 우유에 젖은 비릿한 밥알을 목으로 밀어넣으며 나를 조롱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S와 다를 것 없는 내 반찬통을 내려다보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먹다 만 도시락을 책상 속에 넣고 교실을 나왔다. 운동장에 날리는 흙먼지는 눈물과 뒤섞여 이리저리 뭉쳐졌다.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교실로 들어왔는데, K의 식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이게 얼마나 맛있는 줄 알아? 너희도 이렇게 먹어봐. 해봐. 해보라구.”

K의 허풍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나는 자리로 돌아와 등 뒤에 날아와 꽂히는 그 소리들이 그치기만을 숨죽여 기다렸다.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K의 집요한 적대감 속에는 나에 대한 사랑의 감정도 뒤섞여 있다는 것을. K에 대한 나의 감정 역시 남다른 데가 있었다. 그러나 사춘기에 가까워진 우리는 서로에 대한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줄 몰랐고, 우리가 놓인 상황 역시 그런 감정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K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나에게 그토록 많은 상처를 입혔고, 결국 어느 해 겨울 고아원에서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2.

나에게 유년은 마음껏 누려야 할 천국의 시간이 아니라 힘겹게 건너야 할 터널 같은 것이었다. 고아원 울타리의 안과 밖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나는 병약한 몸과 내성적인 성격으로 그 시절을 견뎌야 했다. S는 그 무거운 짐을 진심으로 나누어 지려고 했던 친구였고, K는 그 나눔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것을 잔인한 방식으로 가르쳐 준 친구였다. 그 환대와 적대 사이에서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스무 살까지 부모 없는 아이들과 성장기를 보냈다는 것이 시인이 된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내 인생의 상당한 기간을 차지하고 있는 그 시절은 기질이나 감수성, 삶의 태도 등을 형성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자식이 너무 많으신 우리 어머니 / 나의 어머니라고 고집부리고 나면 / 웬지 미안해지는 우리 어머니”(「우리 어머니」)라는 구절처럼, 나는 어머니조차 공유해야 했다. 또한 “합창기도가 끝나자마자 숟가락은 달그락거리기 시작했다 칠십 개가 넘는 그 소리는 칠십 개가 넘는 종소리가 되어 식당과 우리의 눈동자와 가슴을 끝없이 울렸다 밥 먹고 돌아서기가 무섭게 느껴지는 배고픔을 위하여”(「종소리에 대하여」) 의 집단적 식욕과 배고픔은 고스란히 나의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아이들에게 없는 단하나의 잉여, 부모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숨죽여 살아야 했다. 차라리 내가 고아였다면 마음이라도 편했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일반 가정집의 아이들이 당연히 누리는 권리를 나는 부당한 특혜처럼 여겨야 했고, 그로 인해 먼저 배려하고 양보하고 참아야 하는 쪽은 늘 나였다. 매일 S의 숙제를 도와주고 공부를 가르쳐 주었지만 생색을 부리거나 그 대가로 S를 부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S의 호의를 뿌리치지 못한 것은 그녀가 주눅들거나 미안해하지 않도록 한 배려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배려는 오인되었고 적대적인 반응을 불러왔다.

K가 던진 돌멩이는 나에게 묻고 있었다.‘너는 누구냐’고. 그 돌멩이는 부모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첨예하게 가르고 ‘나’와 ‘그들’ 사이에 뚜렷한 경계를 그으며 날아왔다. 이청준의 소설에서 ‘너는 누구냐’고 묻는 전짓불 앞에서의 공포가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처럼, k가 던진 돌멩이는 이후로도 수시로 날아와 그 고통스러운 질문을 내게 던지곤 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고 설명할 수도 없었다. 그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일까. 나는 고아원에서 이십 년을 살았고 그 후로 이십 년을 시인으로 살아왔지만, 정작 그 시절에 대해서는 별로 쓰지 못했다. 첫 시집 『뿌리에게』에 몇 편의 시가 실려 있을 뿐, 고아원 친구들에 대해 쓰려고 하면 어떤 완강한 힘이 마음을 가로막곤 했다. 극적인 삶을 수없이 보았지만 그것을 문학적 소재로 삼는 순간 그들을 대상화하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누군가의 엄마 아빠가 되어 살고 있을 친구들이 우연히 자신과 연관된 글을 발견하고 어떤 생각을 할까 두렵기도 했다. 내 문학적 의도가 다시 오인 받을까봐 두려웠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자주 만나지 못했고 자연히 우리들 사이의 거리감도 더해졌다. 처음엔 모임에 이따금 나갔지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자신이 이질적으로 느껴져서 그마저 그만두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공장이나 식당에 취직한 친구들이 먹고사는 일의 어려움을 토로할 때, 나는 대학에 다니며 시를 쓰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르바이트를 몇 개씩 하면서 고단한 대학시절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그것도 부당한 특권처럼 여겨졌다. 내 시는 그런 불편함에서 시작되었고, 오랫동안 부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지금도‘그들’의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거나 위선적인 노릇을 면하기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에 대해 쓰는 것이 불편하다면 ‘나’에 대해 쓰면 되지 않는가, 라고도 반문해 보았다. 그러나 그들을 배제한 나의 모습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기억의 실꾸러미는 이미‘우리’라는 이름으로 단단하게 묶여 있다. K가 던진 돌멩이는 ‘나’와 ‘그들’을 가르며 날아왔지만, 내 마음은 S와 K를 여전히 피붙이나 다를 바 없이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도 공유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간극들은 내 글쓰기의 장애물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일종의 동력이었는지도 모른다.‘우리’에 의해 자주 거부당하거나 소외되었던 ‘나’, 그러면서도 ‘나’의 개체성을 한 번도 떳떳하게 주장해 본 적 없는 희미한 목소리. 그 부재의 존재감이야말로 지금까지 ‘나’에 대한 질문을 내려놓지 못한 이유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럼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그들에 대해 쓰지 못했지만, 그들은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했다고.

고흐는 “내가 세상과 관련을 맺는 유일한 순간은 세상에 대해 어떤 부채감과 의무감을 느끼는 때이며, 또한 감사의 마음으로 소묘나 회화로 몇몇 작품을 세상에 남기기를 원하는 때이다”라고 말했다. 그러고보면 내가 오랜 세월 지고 온 부채감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s나 k에 대해 느끼는 것은 감사의 마음에 가까운 것이다. 발터 벤야민의 글에 자주 나오는‘꼽추 난쟁이’처럼 그 친구들은 나에게 불편한 시선이나 질문을 던지면서도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구하는 유년의 파수꾼이기 때문이다.

 

'문인 일화(ㄱ-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종환(1954- , 충북 청주)  (0) 2010.08.30
노천명(1912-1957, 황해도 장연)  (0) 2010.08.30
남효온( 1454∼1492)  (0) 2010.08.30
나도향(1902 - 1926, 서울)   (0) 2010.08.30
김현승 (1913-1975,평양)  (0) 2010.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