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승 (1913-1975,평양)
평양에서 아버지 김욱국과 어머니 양응도 사이에서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목회자의 아들로 태어난 다형은 전남에 있는 미션계 숭일(崇一)소학교 입학했고, 1927년 다시 형 김현창이 유학하고 있는 평양 숭실(崇實)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 때부터 위장병이 심해져서 1년 휴학 후 다시 복학하게 되는 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시작(詩作)에 전념하게 된다.
이 무렵 쓰게 된 2편의 장시가 당시 문과교수였던 양주동의 눈에 띄어 다형(茶兄)이 문단에 데뷔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36년 문과 3년 졸업 후, 위장병의 재발로 부친이 계신 전남으로 귀향하였다. 당시 일본에 유학 중이던 동생의 학비마련을 위해 모교인 숭일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 부친의 교회에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신사참배 거부문제로 확대되어 그는 부친, 누이동생과 함께 광주 경찰서에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한 후 투옥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때 누이동생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망하게 된다.
1938년 2월, 광주 수피아 여중고 음악교사인 장은순씨와 결혼했으나, 감옥에 검거·투옥된 사건이 있었기에 교직에서 파면 당하여 생계가 막막한 처지였다. 생계로 전전긍긍하는 동안 그의 생활은 시와 멀어질 밖에 없었고, 급기야는 시작(詩作)을 중단하게 되었다. 해방과 더불어 어둠의 나락에 떨어진 그의 문학열도 다시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모교인 숭일 중학교 초대 교감으로 취임하고, 교장의 자리를 뒤로 한 채 시작(詩作)에 열중하였다.
김현승은 교역자 집안에서 자란 만큼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또한 서구적 분위기와 자주 접하게 되고, 한때 고학을 하면서 선교사 집을 자주 드나들며 커피향에 익숙한 크는 자신의 호마저 다형(茶兄)이라고 불렀다. 체질적으로도 술을 마시지 못한 그는 커피를 매우 좋아하였다. 이른 새벽의 서울역 커피숖에서, 또는 수색의 이름없는 다방에서 다만 홀로 탁자와 커피 잔을 마주하고 앉아 있기를 즐겼다. 동료문인보다 제자들을 사랑했으며, 제자들이나 관계 인사들을 만날 일이 있으면 문인들이 잘 다니는 곳보다 커피 맛이 좋고 정결한 다방으로 약속 장소를 정하기를 좋아했다.
그의 추천을 받고 "현대문학"를 통해 문단에 나온 시인으로는 주명영, 임보, 박홍원, 낭승만, 이성부, 김대환, 정현웅, 문병란, 김광회, 박봉섭, 최학규, 손광은, 이기원, 김규화, 정의홍, 최만철, 권영주, 조남기, 오규원, 박경석, 이환용, 이운룡, 이생진, 박정우, 이병석, 진헌성, 강우성, 오경남, 문순태, 진을주, 김충남, 이병기 등 32명이다. .
김현승을 '가을의 시인', '고독의 시인'이라고 한다. 이는 그가 '가을'에 대한 시편과 '고독'을 탐구한 시편들을 많이 썼기 때문이다. '가을'과 '고독'은 한 잔의 커피와 썩 조화롭게 어울린다. 이러한 시적 주제와 생활 취미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의 성격은 강직하고 맑고 곧은 성격이었다고 한다.
1973년 3월, 김현승은 둘째 아들 결혼식을 마치고 나오다가 고혈압으로 졸도하였다. 다행히 병세가 호전되어 2-3개월이 지난 후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일을 계기로 '시를 버릴지언정 나의 구원인 나의 신앙을 다시금 떠날 수 없다.' 고 굳게 결심하고 하나님께 절대귀의하게 된다.
1975년 4월 10일 오전 11시, 그는 숭전(崇田)대학교 채플시간에 설교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교수와 학생들 모두 모여 일어서서 찬송을 불렀는데, 다형은 끝까지 찬송을 부르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찬송이 끝나고 기도시간 도중 그의 어깨가 한 쪽으로 기울어지며 앞으로 쓰러졌고, 그는 의식이 없었다. 그의 나이 62세, 아무런 유언을 남기지 못한 채 시인은 운명하고 말았다. 쓰러지던 날 아침 부인이 "요단강 건너갈 때는 예수님 손잡고 가야지요" 라고 하자, "요단강은 죽음의 강이라지. 이젠 자신있게 건널 수 있오!" 라고 했다. 그게 그의 마지막 유언인 셈이었다.
다음은 화가 천경자의 김현승 추억담이다.
[너는 사모할 줄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지금 읽으면 시의 그리움과 고독이 산뜻하게 승화된 일면, 연가(戀歌)가 아닌가 느껴지기도 하는 <플라타너스>가 발표됐던 당시, 그러니까 1950년대 초에 나는 엉뚱하게도 새파란 하늘 아래 푸른 넥타이가 팔랑거리는 듯 한, 적이 신선하고도 모던한 감각으로 이 시를 받아들였었다. 실례가 될지 모르지만 실제의 김현승 씨는 매력적이라기 보다는 상당히, 페루의 쿠스코 지방에서 볼 수 있는 야마나 아르파처럼 순수했고 휴머니스트여서 작가와 작품은 다른 점도 있구나 생각했던 것이다.
그 무렵 6.25 수복 이후 광주 역시 비 갠 다음 죽순솟듯 다방이 많이 생겼었다. 젊고 가난한 시인과 화가 등은 터질 것같이 부푼 마음으로 집을 뛰쳐나와 그저 다방에서 대화로 살다시피 했다. 그런데 광주 사람들 중에는 다방을 '타방 타방'하는 사람도 있어 '타방에서 만납시다.'고 잘 했고 나 역시 자칫하면 행복(幸福)을 '팽복'이라고 해 대화하는 상대방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 일쑤였다. 또 매력(魅力)을 곧잘 '미력'이라고 하는 대가도 있었다.
"하하하 혓바닥이라고 하세요, 혓바닥. 쎗바닥이라고 말고 하하하"
역시 다방에서 김현승 씨가 낭랑하게 웃었을 때 나는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도 워낙 그 분이 (적어도 나에게만은) 관대했고 휴머니스트였기에 부끄럽지가 않았었다.
김현승 씨는 커피를 무척이나 즐기는 대신 술과 담배를 못했다.
시장할 때는 으레 빵집을 드나들 게 되는데 서로가 빵을 씹는 분위기란 역전 식당에서 후적후적 천하게 설렁탕을 먹는 것보다도 내게는 삭막하기도 했다.
그 시대에 화폐 개혁이 되어 일시적인 혼란을 겪게 되었을 때 헌돈조차 없는 우리집엔 쌀이 떨어졌었다.
어느 날 저녁, 예쁘장한 중학생이 쌀자루를 메고 찾아와서 "아버지가 갖다 드리래요." 한다.
김현승 씨는 아들에게 쌀자루를 메이고 뒤따라와 세 얻어 사는 우리집을 가리켜 들여보내곤 캄캄한 밖에서 기다리고 섰다가 빈 손으로 나온 아들 모습에 마음을 놓으며 "받더냐?" 고 물었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도 옹색하게 사니까 보다 못했던지 한 해 전에 내가 선물했던 수국 그림을 돌려주면서, 우선 팔아 쓰라고도 했다. 환경이 나를 어지간히 얌체로 만들었던가. 나는 그 그림까지 받아서 팔아먹었다.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이젠 알 것 같다. 내 나이 오십이 넘어서도 깨닫지 못했던 김현승 씨의 절대 고독과 견고한 고독의 경지를 말이다. 그분은 이미 삼십대에 다 깨달았던 것이고 그 숭고한 차원에서 뭇 속물들을 안타까운 눈으로 보았던 것이다.
지금은 타계하고 없는 김현승 씨, 무척이나 나에게 잘해 주었지만 하나도 보답을 못한 터에 겹쳐서, 이런 글까지 써 조금이라도 누가 된다면 어쩔까 염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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