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효온( 1454∼1492)
남효온은 조선 전기의 학자로 호가 추강이다. 지금의 행주산성 부근을 추강(秋江)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연산군의 큰아버지인 월산대군이 이 곳에서 시를 읊으며 놀았는데,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오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매라
월산대군이 빈 배를 저어온 추강을 아예 자신의 호로 삼은 이가 있다. 월산대군과 같은 해에 태어난 추강 남효온이다. 남효온은 생육신의 한 사람이고, 사육신이라는 말을 생겨나게끔 한 장본인이다.
그는 ‘육신전’(六臣傳)을 지어, 그들의 실체를 역사 속에 분명하게 각인했다. 주모자임이 확실한 성삼문과 박팽년을 제외하고 사육신이 꼭 누구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운데, 단종복위계획의 주동자가 육신으로서 확실히 기록에 처음 보이는 것은 남효온의 『추강집 秋江集』에 나오는 6신전(六臣傳)이다. 여기에는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의 순서로 6신의 이름이 명백히 밝혀져 있다.
“누가 신하가 아니겠는가만 지극하도다, 육신의 신하됨이여. 누가 죽지 않겠느냐만 크도다, 육신의 죽음이여. 살아서 임금을 섬기고 신하된 도리를 다하고, 죽어서 충성하여 신하된 절개를 세웠도다.”
‘육신전’의 서문에서 그는 감히 이렇게 적고 있다. 그의 문인들이 장차 큰 화를 당할까 두려워 말렸지만 죽는 것이 두려워 충신의 이름을 사라지도록 둘 수는 없다며 지은 글이다. 세조의 아들과 손자들이 왕통을 이어가고 있는 세상에, 세조에 반기를 든 역적들을 추모했으니 반체제 사상범인 셈이다. 훗날 그의 글을 보게 된 임금 선조조차도 “저 남효온이란 자는 감히 사사로이 문묵(文墨)을 희롱하고 요망한 혀를 놀려서 국사를 폭로하였으니 심히 패악 부도하여 그 죄는 붓으로 이루 다 쓸 수 없다. 남효온은 우리 조정의 죄인이다”고 말했을 정도다.
추강 남효온은 단종 2년에 태어났는데, 단종이 폐위된 것은 그가 세살 때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한 사건을 목격하지는 못했다. 그저 지나칠 수도 있는 과거사였다. 그보다 19세 위로, 오세 신동이라 불렸던 매월당 김시습은 “나는 세종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니 이런 고생도 마땅하지만 그대는 나와 다른데 어찌하여 세상을 위해 계책을 세우지 않는가”고 남효온에게 벼슬길에 나가도록 독려했을 정도였다.
추강 남효온은 25세 때에, 성종이 유생들에게 조언을 듣기를 바라자 8개 항목으로 된 상소문을 올렸다. 그 안에 세조가 폐한 단종의 어머니 능인 소릉(昭陵)을 복위시켜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에 대해 ‘동문선’을 편찬한 서거정조차 “충격적인 상소를 통해 정계에 진출하려는 비열하고도 얄팍한 수작”이라고 매도했다. 도승지 임사홍(任士洪), 영의정 정창손(鄭昌孫) 등은 그를 국문하기를 주장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위정자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다. 남효온은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게 되었다.
가을 강 가을 흥에 포성주 한통 끼고
배 안에 밝은 달 싣고 낚싯대 드리우네
낚시 거두자 달 지고 밤빛은 칠흑인데
거나하게 취한 술 깨니 가슴 서늘해지네
그가 지은 서호시(西湖詩)다. 서호는 마포 서강을 이른다고 한다. 그는 무악(毋岳)에 올라 통곡하기도 하고 남포(南浦)에서 낚시질을 하기도 했다. 신영희(辛永禧), 홍유손(洪裕孫) 등과 죽림거사(竹林居士)로 맺어 술과 시로 울분을 달래기도 하였다. 산수를 좋아하여 경치 좋은 곳을 찾아 유랑생활을 하며 일생을 보냈다. 남효온(南孝溫)은 어머니의 말을 듣고 술을 끊었던 당대의 효자이기도 했다. 남효온은 술을 끊는 시(止酒賦)를 짓고 10년을 참은 끝에 술을 다시 마시다가 풍병이 생겨 두 번째 술 끊는 시를 쓰고 5년을 안 마셨다.
성종 23년(1492) 39세로 세상을 떠났으나, 1504년 갑자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이었다는 것과 또한 그가 소릉복위를 상소한 것을 난신의 예로 규정하여 부관참시되었다.
그는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김굉필(金宏弼) · 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성품이 온화하고 담백하였으며, 영욕을 초탈하여 세상의 사물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스승인 김종직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우리 추강’이라 하며 높이고 아꼈다고 한다. 세상에서는 원호(元昊) · 이맹전(李孟專) · 김시습(金時習) · 조려(趙旅) · 성담수(成聃壽)와 함께 생육신으로 불렀다.
중종 8년(1513) 소릉복위가 이뤄지자 신원되어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정조 6년(1782) 다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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