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목월(1916-1978, 경주)
한낱 시골 청년이던 木月을 발견하여 문단 에 뽑아 올린 「文章」지의 추천시인 鄭芝鎔(정지용)이 그를 추천하면서 했던 말은 이제 영원히 변치 않을 금강석이 되었다. 「한국에는 두 개의 달이 있으니 북에는 소월이요, 남에는 목월이라…」라고.
박목월은 대구의 계성중학교 시절 <통딱딱 통딱딱>과 <제비맞이>를 잡지에 발표하면서 동요시인으로 문학을 시작했다. 음악교과서에 실렸던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란 노래도 박목월의 작품이다.
해방후의 문단은 친일 잔재의 냉엄한 청산보다도 양분된 이데올로기 청산이 과제였다. 그가 소속된 조선 청년문학가 협회는 사회주의 문학가 단체에 대항하는 "순수문학 진영의 문학적 전위세력" 이었다. 그는 해방 공간의 문단대립 상황에서 순수 문학 진영을 선택했고 그 전위세력의 한 사람으로 변모해갔다.
또한 1946년 조지훈 박두진과 3인시집 "청록집"을 발행해 커다란 문학사적인 획을 그었으며 김동리, 서정주, 유치환, 조지훈, 박두진 등과 함께 조선문필가협회를 결성, 그해 12월 한국 문학가 협회를 만들고 사무국장으로 활동했다.
<청록집>을 낸 때는 1946년이었지만 목월과 지훈은 그 전에 이미 상대방의 문학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1941년에 목월은 자신의 시 <나그네>를 보여주었고, 지훈은 그 시에 대해 장문의 편지로 화답했다. 그리고 그 해 봄에 지훈은 경주에 있는 목월을 찾아 내려왔다. 서로 면식이 없었던 터라 목월은 자신의 이름을 쓴 깃발을 만들어 지훈을 맞았다. 그날 밤 두 시인은 밤새 술을 마시며 끝없는 대화를 나눴고, 목월은 지훈에게 <밭을 갈아 콩을 심고>라는 또 한 편의 시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목월 시 <나그네>에 대해 조지훈이 화답시로 <완화삼>을 지어 건넨 것은 아니었다. <완화삼>은 지훈이 오대산 월정사에서 외전강사로 있을 때 지은 것이다. 어쨌든 목월은 <나그네>라는 시로 지훈이라는 평생 문학동지를 얻게 되었다.
1946년 2월 하순, 박두진이 경주에 있는 목월에게 곧 상경하라는 전보를 띄웠다. 무슨 일인가 하고 이튿날 상경해서 두진이 근무하던 을유문화사로 찾아간 목월에게 두진은 말했다.
"을유에서 시집을 하나 내보라 하니 우리 몇 사람이 어울려 내 봅시다."
물론 이의가 있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이렇게 뜻을 모아 그날 해질 무렵 함께 조지훈을 성북동 자택으로 찾아갔다. 그날 밤 세 사람의 합의에 따라 나오게 된 것이 청록파라는 이름을 시사에 남긴 시집 『청록집』이다.
박목월의 시는 자연시에서 인생시로 변모하는 과정을 거친다. 해방과 6.25로 이어지는 역사적 사건, 가정적으로는 동생의 죽음등이 영향을 미쳤다. 목월의 중기 시에서는 의식주 등 개인의 생존권에 해당되는 문제뿐만 아니라 가족구성원의 삶과 죽음, 연인과의 사랑과 이별 등 인간이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부딪히게 되는 여러 문제들이 폭넓게 다루어지고 있다. 후기에 이르면 그가 존재 일반의 본질에 대해 날카롭게 투사하고 있음을 본다. 존재의 본질을 무(無)라고 인식하고 인간존재의 유한성과 한계성을 절감했다. 이는 신앙적 깊이를 더하게 한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였다. 목월이 후기에 쓴 시들은 대부분이 신앙시이다. 사후인 79년 1월 부인 유익순 여사에 의해 발간된 "크고 부드러운 손"은 성숙한 신앙의 고백으로 이루어진 71편의 신앙시가 수록돼 절정을 이룬다.
박목월과 육영수 여사의 인연도 세간에 화제가 됐다. 1963년 11월 어느날 목월은 찾아가면 만날 수 있겠느냐고 묻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이윽고 찾아온 그 신사는 목월에게 뜻밖의 제의를 했다. 대통령 당선자 박정희의 부인 육영수의 문학관계 개인교수가 되어 달라고 한 것이다. 대통령이 정식으로 취임하게 되면 부인도 퍼스트 레이디로서 내외의 많은 귀빈들을 자주 만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럴 경우 어떤 화제가 나와도 막힘없이 대응하기 위해서는 폭넓은 교양을 쌓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한 교양교육의 일환으로 문학 분야를 담당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목월에게 제의된 내용이었던 것이다. 1주일에 두어 시간 정도면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 개인교수의 추천은 학생시절부터 목월의 시를 좋아했던 육영수가 직접했다는 말도 상대방을 덧붙였다.
"경솔하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젭니다. 일주일만 말미를 주십시오." 집으로 돌아온 목월은 부인에게 이 일을 알리고 의견을 물었다.
"하나님께 기도해서 결정합시다." 그녀의 대답이었다. 며칠 뒤 그녀는 목월에게 그 제의의 수락을 권했다.
"대통령 부인이 문학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갖는다면 문학인 전체를 위해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정부가 문화정책을 세울 때도 그것이 반영될 수 있는 거구요."
이리하여 목월은 제3공화국의 정식 발족 직전에 육영수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는 한 때 모교인 계성중학교 교사로 있다가, 62년부터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한양대학교 문리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했다. 그가 73년 창간한 월간 시전문지 "심상"은 문단의 유수한 시인들을 배출하고 있다.
아래는 <나의 기억 속에 담긴 박목월 시인>이란 제목으로 아들 박동규 교수(서울대)가 아버지 박목월 시인을 회고한 내용이다.
[아버지 박목월 시인이 세상을 떠난 것이 1978년이다. 21년이나 지났다. 지난 봄 원효로4가 우리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목월 시비(詩碑) 제막식을 앞둔날 밤, 혼자 비석을 찾아갔었다. 아버지의 시비가 선다는 기쁨과 함께 '시를 쓰며 살아온 아버지의 생애'에 대한 나의 기억이 새삼 팽팽한 풍선처럼 떠오르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경주 근처 모량에서 자라 십여리 떨어진 건천에 있는 초등학교를 다녔다. 중학교는 대구계성중학교로 갔다. 벌써 이때쯤 시인 박목월의 마음에는 자연을 노래하는 마음이 움트지 않았나 생각된다. 내가 어렸을 때 고향에 가면 아버지는 내손을 잡고 고향집 앞 야트막한 야산에 올라 기차역으로 난 논둑길을 가리키며 "아버지는 보자기에 책을 싸서 허리에 매고 저 논둑 길을 따라 건천에 있던 초등학교를 걸어다녔다. 네 할머니는 이 야산마루에서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버지를 기다렸다. 어느 눈보라 치는 밤이었지. 학교에서 학예회 준비를 하고 돌아오는데 너의 할머니가 산마루 나무 밑에 짚단을 둘러 쓰고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겠니. 눈이 짚단에 내려 하얗게 되어 할머니인 줄 몰랐지."
그리고 나서 할머니의 얼어붙었던 차디찬 손을 잡았던 기억을 나에게 들려주었다. 아버지는 대구에 있는 계성중학교에 입학하자 고향을 떠나 대구에서 자취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 학년은 그럭저럭 보낼 수 있었으나 2학년에 올라가서 집안 형편이 나빠져서 늦가을이 되었을 때 방세를 내지 못하여 자취방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갈곳이 없어진 것을 안 담임 선생이 학교 온실에서 방학까지 지내게 하였다.
어린 아버지는 온실 한구석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밤이면 가마니를 깔고 그 위에 요를 펴고 이불을 덮고 누우면 이마 위에 별들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때의 기억을 나에게 이야기하곤 했다. "내가 별을 보고 있으면 별들이 내 가슴에 와서 속삭이곤 했지. 나는 눈물 어린 눈으로 별들을 맞이하곤 하다가 보니 밤새 별과 내가 친구 사이처럼 이야기를 주고받곤 했지."
내가 대학을 다닐 때였다. 엉뚱하게 "아버지는 나만 온실에서 잠을 자야 한다는 것에 대한 분노 같은 것은 없었나요?" 하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웃으며 "이놈아, 유리창 위로 빛나는 별을 덮고 누워 있는 것이 서러웠으면 시를 쓰지 않았겠지. 가난한 서러움을 벗어던지려고 돈을 버는 사람이 되지 않았겠니" 하였다.
아버지가 청년이 되어 「문장」지로 등단할 무렵 내가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때의 기억을 나에게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다. 그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경주에 있는 어느 집 마당 한쪽에 있는 초가집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어머니가 저녁 무렵 진통이 와서 아버지에게 산파를 불러와야겠다고 하였다.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 그런데 진통 끝에 안집 주인 아주머니가 달려오고 결국 내가 세상에 나왔을 때까지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나가 산파를 찾았지만 눈에 산파집이 들어오지 않았다. 마음만 급해서 자전거를 급히 몰다가 전봇대를 박아 앞바퀴가 휘어지고 만 것이다. 결국 자전거를 들고 산파집을 찾아 허둥거리다 그냥 돌아왔을 때 이미 나는 태어난 것이었다. 어머니는 이 말을 할 때면 언제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였다. 그리고 꼬리에 "그러니까 시를 썼지" 하였다. 어머니는 현실의 바닥을 보지 않고 멀리 산과 하늘과 별과 바람과 함께 사는 아버지의 천성을 알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였다. 아버지는 한밤에 서재에 앉아 시를 쓰곤 했다. 아버지가 지금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을 나는 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알 수 있었다. 때로는 어머니가 마당에 서성거리고 있거나 안방에서 성경을 보고 있으면 알 수 있었다. 집안에 들어가서 내 방에 앉아 있으면 마치 작은 소리로 혼자 노래하는 것처럼 웅얼거리는 소리가 아버지 방에서 새어나와 안개처럼 온 집에 흘러다니는 것이었다. 이때쯤이면 온 가족이 숨을 죽이고 우리 다섯 형제들은 각기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누구도 시켜서 한 것은 아니지만 습관처럼 오랫동안 몸에 밴 것이었다. 때로는 밤새도록 가끔은 "커피 한잔 타줘요" 하는 소리가 들릴 때도 있었다. 이러한 아버지의 시를 향한 산고(産苦)는 하룻밤에 그치는 경우도 많았지만 며칠씩 가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이런 긴장을 싫어하지 않았다.
내가 어느 날 밤늦게 집 앞에 섰을 때였다. 누가 내 등을 소리 없이 잡는 것이었다. 돌아보니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내 소매를 끌고 골목길로 내려가면서 "아버지, 시가 잘 써지지 않는 모양이다" 하시며 조금 있다가 들어가자는 것이었다. 덧붙여 어머니는 "아버지가 우리를 보면, 저것들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것인데, 하는 마음이 들어서야 시가 되겠니. 잠시나마 아버지 눈에서 비켜서 있자"고 말씀하셨다. 나는 어머니의 이 말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시를 쓰는 순간만이라도 아버지의 어깨에 매달린 생활의 고통을 덜어주지는 못하지만 보이지 않게 하려고 애쓰는 어머니의 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또 아버지는 유별나게 가족에게 따뜻한 사랑을 지녔기에 어머니는 이를 알고 그런 것이었다.
아버지 박목월 시인은 아들의 눈에도 시밖에 다른 것은 없는 천성의 시인이었다.]
목월은 피난 시절인 30대 초반에 담배를 배웠다. 그리고 커피는 중독이라고 말할 정도로 좋아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블랙커피를 두 잔 마셨다. 글을 쓰기 위해 원고지를 꺼낼 때에는 항상 커피와 담배가 곁에 있어야 했다. 글이 잘 안 써진다거나 생각이 막힐 때면 무의식적으로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담배에 불을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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