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ㅂ-ㅇ)

박용래(1925-1980, 충남 논산)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15:34

박용래(1925-1980, 충남 논산)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자 그의 사고은 일변했다. 그는 여기저기 부탁한 끝에 한밭중학교 국어교사로 취임했으며 다음 해에는 대우가 좋은 당진군 송악중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광덕산이 높이 솟은 가학마을에서 그는 홀로 자취를 하며 학교를 오갔다. 아내와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 술잔을 기울이는 날이 많았다. 5년이 세월을 보낸 끝에 사표를 내던지고 대전으로 돌와왔다.

 서울에 올라간 그는 이문구와 술잔을 마주치며 말했다. "야, 문구야. 사람들이 나를 애보개라고 놀린다. 제 자식 업어 주는 것두 흉이냐? 제 자식이 귀여워 업어주는 것두 흉이여? 야, 문구야. 너도 내가 슬프냐? 제 애 업고 돌아다니는 것이 슬퍼 보이냐?"

 아이들이 성장하여 그의 등에서 하나둘 떠나가자 그는 홀로 되어 갔고 주량이 늘어갔다. 어떤 날은 시내를 빠져나가 들길을 걷다가 황혼녁에 교외 술집을 들어가 밤새 마셨다. 친구들의 전화를 받고 나가 마시기도 했다. 그는 거의 매일 늦잠을 잤으므로 전화벨이 울었다 하면 수화기를 들었다. 친구들은 "술 한잔 하지?" 하고 불렀다. 그는 달여나가 안주도 없이 깡술을 마셨다. 마시면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교외로 나가 우는 날도 있었다.

 어느 해는 금주선언을 한 적도 있었다. 친구들의 전화를 거절하고 교외로도 잘 나가지 않았다. 아이들은 기적이라며 달력에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동그라미를 쳐 갔고, 스무 개의 동그라미를 그리고 나자 감격하여 만세를 불렀다. 아내도 박용래도 클클클 웃었다. 그는 금주 20일 돌파 기념으로 소주병을 사다가 입에 부었다. 박용래의 집에는 술잔다운 술잔이 없었다. 술을 심하게 마신 다음 날에는 아내도, 그 자신도 술잔 비스름하게 생긴 것들을 담에 던져 박살내 버렸다. 유리잔이 박살나고 김치 보시기, 숭늉그릇도 사라졌다. 하루는 홍희표 시인이 찾아오자 고추장을 담았던 접시를 술잔으로 꺼내왔다.

 임강빈과 이문구가 찾아온 어는 겨울날은 밤새도록 이 술집, 저 술집 돌아다니며 박용래는 꺼이꺼이 울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임강빈이 출근한다고 나서자 이문구의 손을 잡고 말했다.

 "문구야, 딱 한 잔만 마시고 헤어지자. 이 동네에서 한 잔만 더 마시면 작별해도 될 게야."

 박용래는 이문구의 손을 잡고 들어갔다. 아침 술을 마시던 지게꾼, 품팔이꾼, 거간꾼들이 그가 들어서는 것을 보고 일어서 인사했다. 주모도, 주모의 남편도 인사했다. 감격에 겨운 박용래는 첫 잔을 마시자 다시 울기 시작했다.

 박용래 시인은 1980년 10월 말집 위에 눈발이 붐비고 감나무가 앙상하게 가지를 드러내고 있는 그의 정신적인 고향으로 돌아갔다. 교통사고 때문이었다.

-최하림, 시인을 찾아서, 프레스21, 1999.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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