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1912-?, 평안북도 정주)
백석은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아버지 백시박과 모친 이봉우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백석이 태어난 평안북도 정주는 역사적으로 서양의 신문화가 일찍 유입된 곳이요, 동시에 문단사적으로 보면 이광수, 김억, 김소월 등의 대가들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기도 하다.
백석은 7살이 되던 1918년에 오산소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13살이 되던 1924년에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8세가 되던 1929년에 오산고보를 졸업하였다. 오산학교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은 그 학교의 교사로 우리 근대소설사의 선구자인 이광수가 부임하여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또한 우리 근대시사의 앞자리에 놓이는 김억이 이 학교의 교사가 되어 역시 우리 근대시사의 문제적 시인인 김소월을 이 학교에서 발굴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 미술사의 문제적 화가인 이중섭도 오산학교 출신이다.
백석은 1930년 1월의 《조선일보》 신춘문예 공모에서 소설부문에 당선한다. 백석의 아버지는 사진을 매우 잘 찍고, 사진기술이 뛰어나서 조선일보의 사진반장으로 부임하였는데, 백석은 부친의 권유로 조선일보 후원 장학생 선발에 합격하여 일본 유학길을 떠난다. 일본의 동경에 있는 청산학원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한다. 귀국 후 백석은 조선일보사 교정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백석은 1936년에 이르러 『사슴』이라는 제목의 첫 시집을 선광인쇄주식회사에서 100부 한정판으로 간행하였다. 시집의 뒷면에 인쇄된 내용을 보면 백석의 시집 『사슴』은 그 당시 정가가 2원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 가격은 '조선 초유의 고가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비싼 것이었다. 그러나 백석은 이 시집을 출간함으로써 일약 1930년대 우리 시단의 신예시인으로 그 자리를 확고하게 굳히며 많은 관심 속에서 중요한 논의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백석은 조선일보사에서 1936년 월 초순, 함흥영생고보의 영어교사로 자리를 옮겼다. 함흥고보에 교사로 재직하면서 백석은 학생들의 연극반 활동에도 관심을 가졌고 축구부를 지도하는 교사였던 것으로도 또한 알려져 있다.
백석이 함흥영생고보에 재직한 것은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약 2년간이다. 이 기간 동안 백석은 그곳에서 한 술집에 들어갔다가 권번 출신의 김자야라는 여성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된다. 이 김자야와의 만남은 3,4년에 불과한 일이었지만 백석의 생활과 그의 문학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최근에 김자야에 의하여 그가 백석과 나누었던 사랑 이야기의 비밀이 『내 사랑 백석』이라는 이름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나는 시인 백석과 1936년 가을 함흥에서 만났다. 그의 나이 26세, 내가 스물 둘이었다. 어느 우연한 자리였었는데, 그는 첫대면인 나를 대뜸 자기 옆에 와서 앉으라고 했다. 그리곤 자기의 술잔을 꼭 나에게 건네었다. 속으로 나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지만, 그의 행동거지에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자리가 파하고 헤어질 무렵, 그는 "오늘부터 당신은 이제 내 마누라요"하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의 의식은 거의 아득해지면서 바닥 모를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듯했다. 그것이 내 가슴 속에서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는 애틋한 슬픔의 시작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급속히 가까워졌다. 함흥 교사시절 그는 하숙을 했고, 나도 하숙생활을 했다. 그의 첫인상은 외국사람같이 키가 크고 허여멀쑥한 느낌이었는데, 야릇하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그는 회색 계통의 수수하고 품이 넉넉한 양복을 입었는데 그 후에도 이런 색깔의 옷을 즐겨 입었다…
어느 날 내가 서점에 들렀다가 『당시(唐詩)선집』하나를 사왔는데, 백석은 그 책을 한참 읽고 나더니 문득 나에게 '子夜(자야)'란 호를 지어주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백석의 '자야'가 되었고, 이 호는 아마 지금도 세상에서 우리 둘만이 알고 있는 이름일 것이다. '자야'란 무론 당나라 시인 이백의 「자야오가(子夜吳歌)」란 시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그런데 하루는 그 편지가 뚝 끊어지더니 열흘 정도 소식이 없었다. 몹시 궁금히 여기고 있던 어느 날 그가 에고도 없이 불쑥 나타났다. 부모가 하도 맞선을 보라 해서 맞선을 보았다는 것과 그게 가책이 되어 편지를 못 내었노라는 내력을 말했다. 뒤에 알고 보니 그는 편지가 끊어진 그 열흘 동안 맞선만 본 게 아니라 초례(醮禮)까지 치렀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는 장가든 지 사흘 만에 집을 나와 함흥의 나에게로 달려왔던 것이다. 각시의 얼굴을 한번도 쳐다보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행위가 너무도 야속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가 학교에 출근하는 걸 보고 그 길로 이불이랑 짐보따리를 꾸려서 낮 11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아주 내려와버렸다. 1937년이 저물어가던 무렵이었다.
…그 몇 달 뒤인 이듬해 봄, 어느 주말 오후였을 것이다. 그때 나는 청진동에서 11간짜리 아주 작은 집을 구해 살고 있었는데, 사동(使動)이 웬 쪽지를 들고 찾아왔다. 펴보니 백석이 보낸 메모였다. "몇달 만에 이렇게 찾아온 사람을 허물하지 마시고 나 있는 데로 속히 와 주시오. 사동에게 물어보니 그는 지금 우편국 앞 제일은행 부근의 한 오뎅집에 있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그동안 쌓인 모든 含怨(함원)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이튿날 그는 출근하기 위해 밤차로 함흥으로 떠났고, 나는 서울에 남았다. 우리는 서로 떨어져 있었지만 절대로 갈라설 수 없는 하나임을 새삼 느꼈다.
백석과 나는 앞서 말한 나의 청진동 집에서 살림을 차렸다. 함흥시절은 그가 교사의 신분으로 남의 이목도 있고 했기에, 그가 나의 하숙으로 와서 함께 지내다 돌아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젠 아무데도 구애받지 않아서 좋았다. 마당 한뼘 없는 작은 한옥이었지만 안방, 건넌방, 그리고 쪽마루에 딸린 작은 찬방(饌房)이 하나 있어서, 우리들에겐 그지없이 단란한 보금자리였다. 그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나오는 "아내와 같이 살던 집"은 바로 이 청진동 집을 말한 것이다.
…그는 각별히 즐기는 취미나 오락은 없었다. 술을 좋아하기는 했으나 경음가(鯨飮家)는 아니었고 오히려 애주형에 가까웠다.
…백석은 사람을 만나 그가 먼저 주도해서 교제를 이끌어간다거나, 누구를 새로 사귈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인간 백석이나 그의 시에 홀딱 반해버린 사람이 아주 그에게 제 스스로 엎어져오기 전에는 도무지 사교의 능력이라곤 없는 사람이다. 얼른 보기에 무심한 편이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는 그 누구에게도 특별한 친밀감을 표시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한 중에서도 함대훈, 허준, 정근양, 그리고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조○○는 비교적 가까이 지내던 친구였다.
1939년 유월 어느 아침이었다고 생각된다. 백석은 그날 충청도 진천으로 한 주일 가량 출장을 다녀오겠노라고 했다. 나는 그 순간, 여자의 육감으로 그가 먼젓번처럼 필시 장가들러 가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는 약속한 한 주일이 지나고, 보름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가 이번에도 좀 늦어지긴 하겠지만 틀림없이 돌아오리라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마음에 달갑지 않은 것에 대한 그의 차디찬 성질, 그리고 나를 향한 열정을 무엇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때 청진동 집에서 조선일보까지는 불과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나는 찾아가기는커녕 전화 한 번조차 걸지 않았다. 점차 매섭게 타오르는 내 가슴속의 독(毒)과, 또한 나의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웬만한 살림을 대충 챙겨서 나는 명륜동 언덕으로 숨어버렸다.
어느 석양 무렵이었는데, 집 뒤로 난 골목길에서 누가 "자야"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석양을 등지고 퀭한 얼굴로 서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두 달 만에 다시 만났다.
…우리는 날이 갈수록 그저 묵묵해지기만 했고, 서로의 일과를 화제로 떠올리지도 않았으며, 이런 우리들 사이는 심상찮은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하루는 그가 보낸 메신저가 왔다. 왕십리역 대합실 구내다방으로 나오라는 것이다. 그때의 왕십리란 보잘것없는 초가와 들판뿐인 아주 시골이었는데, 동대문에서 전차를 타고 종점인 왕십리까지 가서 내리면 사방에서 거름 썩는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려고 그 변두리 먼곳까지 나오라 했던 것 같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대뜸 자기와 함께 만주에 가지 않겠느냐고 했다. 사실 이러한 권유는 함흥시절부터 심심찮게 들어오던 터라 조금도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날따라 그의 표정은 너무도 심각한 듯 여겨져서, 나는 적지 않이 당황하였다. 나는 그때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후에 그는 만주 신경(新京)으로 훌쩍 떠나 버렸다. 나에게 단 한마디의 그 어떤 기별도 남겨두지 않은 채…….]
이 책에서 김자야가 밝힌 내용에 따르자면, 백석은 김자야와 실질적인 부부생활을 해가면서도 부모들의 권유와 강압에 못 이겨 두 번이나 봉건적인 중매결혼을 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때마다 백석은 결혼식만 치르고 뛰쳐나와 김자야에게로 달려왔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도덕적으로 납득하기는 어려워도 그와 같은 백석의 처지가 그를 얼마나 고통과 갈등 속으로 휘몰아 넣었을까 하는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함흥시절을 청산하고 서울로 다시 돌아와 조선일보사 출판부에 재입사했던 백석은 바로 입사한 그 해 말에 《여성》지 편집일을 사임하고 서울을 떠나 만주의 신경(현재는 장춘)으로 갔다. 백석은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북만주로 떠나려고 할 대, 김자야에게 같이 가자고 제의를 했다고 김자야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김자야는 백석을 사랑하면서도 그가 정식으로 결혼을 한 두 번째 여성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도덕적인 논리에 부담을 느껴서 백석을 피해 다니다가 마침내는 백석만을 만주로 떠나보내고 만 것이다.
백석이 북만주의 신경으로 떠난 것은 그의 나이 28세 때인 1939년 말이었다. 그는 직장을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문우들을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고 만주땅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었다.
백석은 만주의 신경으로 떠난 이후에도 작품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국내에서 발행된 당시의 문학지《문장》이나《인문평론》등에 「北方에서」,「힌 바람벽이 있어」등의 시를 발표하였고, 《조광》지나《야담》지 같은 데는 러시아 작가의 소설을 번역하여 수록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1940년에 조광사에서 토마스 하디의 소설『테스』를 번역, 출간하는 등 거처만 서울에서 만주로 바꾸었을 뿐 국내문단과 관계를 갖고 여전히 작품활동을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백석 작품에는 북방의 서늘한 분위기와 뿌리를 잃은 당대 지식인의 우울한 내면세계가 담겨 있으며 백석의 작품 중 절창이라고 불리우는 몇몇 작품이 들어있다. 이 점은 백석이 이곳에서 어느 때보다도 내외적으로 절박한 상황 속에서 살고 있었다는 점을 반증해주는 사실이기도 하다.
백석은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곳에서 측량보조원, 측량서기, 소작인 생활 등을 하다가 안동의 세관에 근무하였다고 한다.
해방이 되자 백석은 신의주로 거처를 옮겼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을 보면 제목 그대로 이 작품이 그가 신의주로 거처를 옮기고 유동에 있는 박시봉 씨 집 방에 살면서 쓴 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백석은 신의주에서 잠시 머물다가 이내 고향인 정주로 갔다. 백석의 북한 거주가 어느 정도 선택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그가 적어도 1961년까지는 공산당 산하 조선작가동맹에 문인으로 소속되어 조선작가동맹 기관지인 월간 《조선문학》지에 작품을 지속적으로 발표하고 있다는 점을 보아서도 얼마간 짐작된다. 백석이 《조선문학》지에 발표한 글로는 아동문학평론, 창작시, 수필, 번역시가 있다.
백철은 말했다. 백석은 김소월과 함께 정주가 낳은 영원한 시인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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