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1737∼1805, 한성)
아래의 내용은 박영규의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박지원은 1737년 한성 서쪽 반송방의 야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학자와 고관을 배출한 명문이었다. 5대조 박미는 문예 서도의 대가로서 선조의 부마이기도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 박필균은 정2품의 지돈녕부사를 지냈다. 하지만 아버지 박사유는 그가 어릴 때 미처 관직에도 임용되지 못하고 요절하였으며, 어머니 역시 일찍 세상을 떴다.
그는 부모를 일찍 여읜 탓으로 조부에 의해 양육되었다. 조부 박필균은 노론측 인사였지만 당쟁을 싫어했던 탓에 당론 시비에 휘말리는 일이 없었고 또한 청렴하여 축재에 관심이 없었으므로 가난하게 살았다. 이런 조부의 가르침을 받으며 그는 건강하고 영민한 청년으로 성장해 1752년 16세 때 이보천의 딸과 혼인했다. 이보천은 비록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지만 사람 보는 눈이 좋고 성품이 뛰어난 선비였다. 그는 박지원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교리로 있던 아우 이양천에게 부탁하여 그에게 학문을 가르치게 하였다. 그 전까지 박지원은 글자를 몰랐다고 한다. 장가를 간 박지원은 아내가 자꾸 이것저것 물어보자 자신이 무식하다는 것을 깨닫고 공부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는 이양천에게 주로 <사기>를 비롯한 역사 서적을 배웠고, 문장 쓰는 법을 터득하여 많은 논설을 습작하였다. 그리고 처남 이재성과 학문을 교제하며 서로 충실한 조언자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처음에는 무식한 사람이었지만 학문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박지원은 늙어서까지 항상 공부하는 자세를 가졌다.
1760년 조부가 죽자 생활은 더욱 곤궁해졌다. 그리고 1765년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고, 이후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1768년에는 집을 파고 백탑 근처로 이사하였는데 그곳에서 박제가, 이서구, 서상수, 유득공, 유금 등과 학문적 교유를 가졌다. 그리고 이 시기를 전후하여 당대 최고의 학자 홍대용, 이덕무 등과 자주 토론하였고 또한 유득공, 이덕무 등과 어울려 서부 지방을 여행하기도 한다.
이 당시 정국은 홍국영이 세도를 잡고 있었고, 그 때문에 노론 벽파에 속했던 그의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어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는 상태가 되었다. 그는 위협을 피해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에 은거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그의 아호가 연암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그는 연암협에 있는 동안 농사와 목축에 대한 장려책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1780년 처남 이재성의 집에 머물러 있다가 삼종형 박명원이 청의 고종 70세 축하 사절 정사로 북경을 갈 때 수행하여 압록강을 거쳐 북경,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이때 보고들은 내용을 정리한 것이 <열하일기>이다.
그가 자원하여 청을 다녀온 것은 홍대용의 영향 때문이었다. 홍대용은 그에게 중국 여행담을 들려주면서 그곳의 산업과 과학, 그리고 신학문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시켰다.
그가 쓴 <열하일기>는 1780년 6월 24일 압록강을 건너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요동의 성경(봉천)과 산해관을 거쳐 북경으로 가고, 거기서 다시 청황제의 피서지인 열하에 도착하였다가 북경으로 되돌아오는 8월 20일까지 약 두 달 동안의 여행 체험을 날짜별로 기록하고 있으며, 특별한 부분은 별도 항목을 마련하여 덧붙여놓았다. 이 저술로 인하여 그의 명성이 선비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호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 후 1786년(정조 10년) 50세에 음서로 선공관 감역에 제수되면서 녹봉을 받는 관리가 된다. 1789년에는 평시서주부, 1791년에는 한성부 판관, 이듬해에는 안의현감, 1797년에는 면천군수, 그리고 1800년 양양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1805년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는 안의현감 시절에 북경 여행을 토대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했으며, 면천군수 재직시에는 <과농소초>, <한민명전의>, <안설> 등을 저술한다. <열하일기>와 더불어 이 책들 속에는 그의 현실 개혁에 대한 포부가 잘 나타나 있다.
북학 사상으로 불리는 그의 주장은 비록 적대적 감정이 쌓여 있긴 하지만 청의 문명이 우리의 현실을 풍요롭게 한다면 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또한 청이 조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의 잘못을 비판하면서 그 개선책을 제시하고 있으며, 역대 중국인들이 우리 민족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는 방법을 서술하기도 했다.
이 같은 그의 현실주의적인 사상은 노론들에 의해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정조 대의 젊은 선비들에 의해 긍정적으로 수용되어 북학파를 형성하는 중심 사상이 되었다.
그의 현실 개혁적 사상은 <연암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허생전>, <민옹전>, <광문자전>, <양반전>, <김신선전>, <역학대도전>, <봉산학자전> 등의 소설 속에 잘 용해되어 당대와 후대 학자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 소설들은 대개 시대상을 풍자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접근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양반전>에서는 조선 봉건 사회의 와해와 그 속에서 기득권을 주장하며 군림하는 사대부 계층이 처한 현실과 한계점을 잘 지적하고 있고, <허생전>에서는 허위적 북벌론을 배격하면서 중상주의적 사상을 통해 이상향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소설들은 그의 사상을 나타내는 이론의 근거이자 배타적으로 인식한 조선 사회의 현실과 이상향으로 추구한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염원을 표출한 것이다. 따라서 당대 지배층의 사고방식과 많은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그의 저술들이 오랫동안 불온한 서적으로 취급한 이유가 되었다.
그의 문집이 처음 출간된 것은 그가 죽은 지 1백 년이 지난 1900년이었다. 손자 박규수가 우의정을 지낸 인물이었지만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연암문집>은 그때까지 간행되지 못하다가, 20세기 벽두에 김만식을 비롯한 23인의 학자들에 의해 겨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이강엽은 '열하일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명문가의 후예로 태어나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한평생 학문에만 몰두했던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황해도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하고 있던 그에게 어느 날 청나라를 여행할 수 있는 뜻밖의 기회가 주어진다.
이 때의 견문을 정리하여 쓴 여행기가 그의 대표작이자 우리 고전의 걸작인 『열하 일기』이다. 이 책에는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여 낙후된 조선 사회를 개혁하자는 그의 주장과 함께 수많은 일화가 담겨 있다. 참신한 문체와 독특한 수법으로 쓰여진 『열하일기』를 살펴보며,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연암 박지원이 던지는 물음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열하 일기』는 전체 26권 10책이나 되는 매우 방대한 작품이다. 그만큼 여느 일기나 기행문과는 색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박지원은 청나라 황제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해 사신으로 가는 팔촌 형을 따라 청나라 황제의 피서지인 열하와 북중국, 남만주 일대를 두루 돌아보게 된다. 이 때 그는 그 곳 문인들과 교유한 내용이라든지 그 곳의 신기한 문물 등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했다.
그런데 이 여행이 1780년 5월에서 10월까지 겨우 5개월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렇게 엄청난 분량의 글을 썼다는 것 자체가 신기에 가깝다. 하지만 그는 여행 중에 보고 들은 일을 기록한 문서를 한 보따리씩 가지고 다녔다고 하니 이런 작품이 공연히 나온 것은 아닌 듯하다.
이런 명편(名篇)을 만드는 데에는 그의 기록 습관에다 박학 다식함이 더해졌고, 또 무엇이든 예사로 보지 않는 뛰어난 관찰력이 크게 작용했다. 게다가 사실 박지원은 팔촌 형 덕분에 사신 일행에 끼여들기는 했지만 특별히 공적인 임무가 없었기 때문에 한가하게 자신의 기록에 열중할 수 있었으니 기행문을 쓰기에는 더욱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열하일기』에는 중국의 문물 제도 소개, 중국 학자들과의 문답, 중국 주위의 이민족문제, 종교나 음악 관련 논의 등 거의 백과 사전을 방불케 할 정도의 엄청난 내용이 담겨 있다.
박지원과 함께 중국에 갔던 사신 일행은 280여 명이었다고 한다. 요즘처럼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에 그 정도의 인원이 중국을 다녀온다는 것은 생각만해도 끔찍한 일이다. 그런데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북경에 도착하고 보니 그들의 인사를 받아 줄 황제가 피서를 떠나고 없어 사신 일행은 하릴없이 돌아와야 할 처지에 놓이고 만다.
그러나 조선 사신 일행은 다행히 황제의 '은혜'를 입어 피서지까지 가서 인사를 드릴 수 있는 '영광'을 얻는다. 그리하여 불과 일주일도 못 되는 사이에 북경에서 만리장성을 거쳐 열하까지 무려 200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다시 이동했던 것이다.
유명한 「일야구도하기」가 바로 이런 급박한 상황을 소재로 한 글임을 생각해 두자. 혹시라도 예민한 사람이라면 이 글의 문학적 우수성 여부를 떠나서 왜 밤중에 강을 아홉 번이나 건너야 했는지 의아했을 것이다. 그러면 황제의 명령을 받고, 있는 힘껏 열하로 내달리던 조선 사신의 딱한 처지를 헤아려 보는 것도 좋겠다.]
박지원이 살았던 18세기에는 한·당의 문체를 모방하고 그것과 비슷하게 되려는 풍조가 휩쓸고 있었다. 박지원은 고문(古文)에 대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옛사람의 글을 흉내낸다든가, 고법에 구애된다든가 해서는 생명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당대의 진실을 문제삼으려면 상스러운 말도 버릴 수 없다고 했다. <영처고서(瓔處稿序)>에서 방언을 문자로 옮기고, 민요를 운율에 맞추기만 하면 자연히 문장이 이루어진다 하고, 답습을 일삼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무엇이든지 표현하자면서 복고적 사고방식과 결별하자는 주장을 명확하게 나타냈다. 훌륭한 문학을 한다는 것은 작가가 살아가고 있는 당대의 현실을 그 당대의 언어로 진실되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박지원은 생각했다.
그의 소설도 대개 풍자적·사실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다. 시대는 변화하고 있는데 그 흐름에 발맞추지 못하는 사오정 같은 위정자, 학자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던 박지원은 그들을 혼낼 수 있는 방법으로 풍자를 선택한 것이다. 그리하여 박지원의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풍자의 똥침을 맞고 우스운 꼴을 보여주게 된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술낚시」로 감투를 얻은 이야기는 유명하다. 연암은 집이 가난하여 좋아하는 술도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 손님이 와야 아내는 겨우 두 잔의 탁주를 내놓을 뿐이었다. 그래서 연암은 그럴듯한 풍채의 인물만 보면 가짜 손님으로 끌어다가 술 마시는 미끼로 삼았다. 하루는 자기 집 앞을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마침 사인교를 타고 지나는 분이 있었다. 연암은 무작정 길을 가로막으며 가벼운 음성으로 말했다. 「영감, 누추한 집이나마 잠시 들렀다 가십시오. 저의 집이 바로 여기올시다.」 「나는 지금 입직(入直)하는 길이라 틈이 없소.」 「흥! 임금을 모시는 분이라 도도하군. 담배나 한 대 피우고 가라는데, 그렇게 비싸게 굴 것까진 없잖소.」 연암은 도리어 호령조로 말했다. 사인교를 탄 분은 이 승지였다. 선비에 대한 예의는 아는 인품이어서 연암의 뒤를 따라 방에 들어갔다. 「손님이 오셨으니 술상 내오너라.」 탁주 두 잔과, 안주로는 김치가 나왔다. 연암은 자기 잔의 술을 쭉 들이켜고는 손님잔의 술까지 마셔 버렸다. 이 승지는 물끄러미 연암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영감! 뭐 이상히 여길 것 없소. 오늘은 영감이 내 술낚시에 걸려 들었소, 하하…….」 「도대체 당신은 누구시오. 그리고 술낚시는 무슨 뜻이오?」 연암은 그제야 술낚시에 대한 내력을 이야기했다. 그 날 밤 이 승지는 정조에게 이 이야기를 하였다. 이 선비가 누구인지 모르고 하는 이 승지의 얘기를 듣자 정조는, 「그 사람은 분명히 연암 박지원이다. 자기 재주를 믿고 방약무인이 지나쳐 벼슬을 안 주었는데, 그다지도 궁하다니 참으로 안됐어.」라 말하고 곧 초시(初試)를 시키고 1년 내에 안의(安義) 현감을 시켰다.
현재 박지원의 사적비가 안의 현청이었던 안의 초등학교에 자리하고 있다. 박지원은 안의 현감으로 이곳에서 지내면서 40여편의 저작을 남겼다. 중국에서 배워온 벽돌 만드는 기술을 활용하여 동헌의 건물을 짓기도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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