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로(1897-1961, 서울)
하루는 변영로와 염상섭, 이관구, 오상순이 모였다. 지금의 성균관대학교 뒷산 사발정 약수터 부근에서 술을 마시고 다들 취했다. 누가 작당을 했는지도 모른 채, 만취한 네 명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벌거벗은 몸으로 소를 타고 동네로 내려왔다. 놀란 주민들 중 한 사람이 신고를 했는지 출동한 순경에게 연행되어 고초를 겼은 적이 있었다.
이들은 말년에 명동 쪽에 단골을 정해놓고 술을 마시러 다녔다. 충정로 1번지에서 위스키를 일단 한 잔 걸친 다음, 명동까지 와서 먹걸리집 '은성'에 꼭 한 번은 들렀다. 수주가 이렇게 술을 좋아하고 많이 마시게 된 것은, 어릴 적부터 술을 마신 이유도 있지만, 총독부의 원고 검열에 분개를 해서 붓을 꺾고 술에 빠졌기 때문이다.
변영로는 미국 유학에서 돌아오자마자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잡지인 <신가정(지금의 여성동아의 전신)>에서 일했다.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자,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단상에 오른 손기정의 모습을 차마 실을 수 없었던 변영로는 <신가정>의 표지에 손기정의 사진에서 다리만 남겨둔 채 싣고 제목을 '조선의 다리'라고 붙여 발행했다. 결과는 뻔했다. 총독부에서 길길이 날뛰며 갖은 방법으로 압력을 행사해서, 결국 변영로는 동아일보사를 그만 두어야 했다. 이때부터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이 더욱 심해졌다. 대부분의 문인들이 친일대열에 합류하고 있을 때에도, 변영로는 붓을 꺾을지언정 일본에 도움이 되는 글은 절대로 쓰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였다. 그 설움을 많은 술로 달랬던 것이다.
다음은 수필가인 피천득이 회상하는 변영로의 모습이다.
"성균관대학교에 나도 강의를 나가고 있었는데 당시는 교수회의 같은 것도 야외나 막걸리집 같은 데서 했어요. 교수들도 딱딱한 사무실을 벗어나 낭만을 즐겼던 거지요. 일취옥이라는 학교 앞 술집이 단골이었습니다. 당시 수주 선생은 강의를 하다가도 밖에서 누가 부르면 강의를 그만두고 술을 마시러 나가던 그런 분이었습니다. "
수주가 술을 처음 먹기 시작한 것은 5-6세부터다.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지만, 변영로는 그때부터 술독에 올라가 술을 퍼먹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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