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1935-, 충북 충주)
신경림은 1935년 충북 충주군 (지금의 중원군) 노은면 연하리 상입장 470번지에서 4남 2녀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1943년 노은면의 노은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신경림에 있어 영향을 끼친 분으로는 그의 부모 외에 또 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고향에서는 팔방미인으로 알려진, 그와는 친척뻘 되는 당숙이었다. 어린 신경림에게는 어른들의 골 깊은 걱정과는 달리 당숙의 자유롭게 세상을 유영하는 삶이 부러울 뿐이었고, 지금의 산을 좋아하고 여행을 좋아하는 그의 성격에 당숙의 방랑 시인같은 삶의 이력과 역정이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중학교 시절에 해방과 6.25를 맞은 신경림은 해방공간에서의 어수선한 좌우익의 싸움과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특유의 근성과 낙천적인 성격으로 상처받기 쉬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온갖 흥미진진하고도 진기한 얘기에 심취하기도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광산에 올라가 얼굴에 먹칠을 하기도 하고, 뗏목을 타고 오는 장사꾼들의 민요 가락을 들으며 장단까지 맞춰 가는 활발함을 보였다. 고등학교 진학 후 그는 학교 생활보다는 남한강에 더 정을 붙였다.
신경림은 어느날 기어이 일을 저지르고야 만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국어 시험지를 백지로 내고 만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국어 선생님(평론가 유종호 씨의 부친)께서는 신경림을 문책하지 않았다. 대신 시 다섯 편을 써 오면 그가 저지른 잘못을 면책해 줌과 동시에 그것으로 점수를 대신해 주겠다는 제의를 하게 되었다. 국어 선생님은 그렇게라도 해서 신경림의 시적 재능을 살려 주고 싶었던 것이다. 뒷날 신경림은 그때의 선생님들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나에게 문학 쪽으로 영향을 주셨던 선생님 두 분이 계셨어요. 한 분은 유종호 씨 부친이신 유촌 선생님(작고)이셨고, 또 한 분은 정춘용 선생님(현재 변호사)이라고 계셨어요. 이분들은 나하고 이야기해 보시고는 나를 재미있다고 생각하셨는지 일단 학교생활이 끝나면 사제지간이라는 관계를 벗어나서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고...... (중략)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어느 날 학교에서 장거리 달리기를 하는데, 유종호하고 나하고 한 8킬로미터를 뛰어야 하는데 1킬로미터쯤 뛰다가 돌아와 버렸어요. 반환점을 돌면 팔에 도장이 찍히니까 가짜로 도장을 찍었죠. 그리고 중간 등수로 들어와야 하는데 15,6등으로 들어와 버렸어요. 그랬더니 독일어 담당이신 정춘용 선생님께서 "야, 너희들이 그렇게 일찍 들어올 놈들이 아닌데 어디 한번 자세히 보자."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에이, 그거 좀 봐 주면 어떻습니까?"했지요. 그랬다가 실컷 매를 맞고 다음 날은 운동장을 50바퀴 돌고, 반성문 쓰고, 교실에서 무릎꿇고 네다섯 시간 앉아 있었어요. 정춘용 선생님하고는 지금도 술을 같이 마시고 친구처럼 지내지요.」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입학시험공부 대신 일어판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을 독파, 여러 권의 소설과 시집을 읽느라 밤을 세우곤 했다.
1955년 동국대 영문과에 입학한 그는 하숙비를 감당할 수 없어 하숙집을 나와 이 집 저집을 전전하며 외국소설 번역으로 가까스로 학비 및 생활비를 조달했다. 그러다가 『문학예술』지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의 안정적이지 못한 서울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문단에 대한 불신까지 겹쳐 하향하게 된다. 서울을 떠난 그는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전전한다. 1965년 충북 충주에서 영어 강사로 재직하던 중 문우 김관식을 만나게 되고, 김관식의 설득으로 서울로 재입성하게 된다. 홍은동의 김관식의 집에서 신세를 지며 YMCA입시학원에서 영어강사를 맡아 생계를 유지한다.
1970년 신경림은 『창작과 비평』 에 작품을 발표, 문단에 재등장하게 된다. 그 당시 이른바 입으로만 목청을 높였던 문학과 현실이 처음으로 하나의 육체로 만난 것은 그의 시를 통해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신경림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시집 <농무>가 그 뒤 20년 이상 한국 시의 한 흐름을 주도하며 독자들과 후배 시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리라고는 시인 자신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터였다. 이 시집은 다음해 시인에게 제1회 만해 문학상을 안겨 주었고, 다시 한 해 뒤에는 창작과비평사에서 야심적으로 기획한 `창비시선'의 제1권으로 재출간됐다.
이후 그는 장시 「새재」를 준비하면서 본격적으로 민요기행을 시작한다. 그는 민요를 두 가지 측면에서 중시했는데, 그 하나는 장시의 지루함을 방지하기엔 민요가 바람직하다는 생각과 시의 내용이 남한강 일대의 얘기를 재구성한 것 인만큼, 내용이나 형식면에서 민요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그의 이러한 민요에 대한 관심은 사적인 것에서 공적인 것으로 확대되어 후배들과 함께 민요연구회(1984년-1989년)를 만들게 된다.
1980년 5월, 광주 민주 항쟁이 일어나며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투옥되고, 그해 7월 신경림 역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고 조사를 받은 후 두 달만에 공소기각으로 풀려나게 된다. 구치소 생활 마지막 날이었다. 재판에서 공소기각 판결을 받고 나갈 시간을 기다리며 신경림과 구중서가 바둑을 두고 있었다. 첫판은 신경림의 승이었다. 그때 교도관이 정리가 다 되었으니 어서 준비해서 나가라고 성화를 했다. 그런데 구중서가 나가려는 신경림을 가로막았다. 한 판 더 두고 가자는 것이었다. 신경림은 어이가 없었다. 2개월 동안 불편한 구치소 생활에 얼마나 지겨워했던가. 얼마나 밖에 나가고 싶어 안달하였던가. 그런데 지금 공소기각으로 풀려나가게 된 마당에 다른 곳도 아니 구치소 안에서 첫판을 졌다고 다시 한 판을 더 두자고 하다니. 그러나 신경림도 지지 않았다. 둘은 구치소 직원의 어서 나가 달라는 성화에도 아랑곳없이 또 한 판의 바둑을 다 두고서야 그곳을 나왔다. 문인들이 아니라면 상상키 어려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1984년 자유실천문인협회의 고문직을 지내고, 민주화청년운동연합 지도위원을 지냈으며, 1989년까지 민요연구회 의장직을, 1985년에서 1987년까지 민족민주통일운동연합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1987년에는 전민련 감사 등을 지내며 민족가 문화의 부흥을 위해 노력한다.
현재 동국대 국문과 석좌 교수를 맡으며 학생들에게 문학의 참 의미를 전하는 신경림은 여전히 등산을 즐기며, 각 지역을 순회하기도 하며 삶의 소리를 귀기울여 듣고 기록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신경림씨는 "시인을 찾아서"라는 책을 99년 출간했다. 서울 종로에서 낙엽지는 강원도 산골, 흙먼지 이는 남도 들녘까지. 한국시를 빛낸 시인들의 생가, 시비, 그들이 머물렀던 곳을 순례했다. 그렇게 해서 펴낸 것이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우리교육). 발로 쓴 한국 현대시 기행이다.
‘신경림씨가 새로 펴낸 수필집‘바람의 풍경'(문이당)은 산문으로 풀어 쓴‘농무'다. ‘농무'가 잊혀 가는 농촌 공동체 문화에 대한 세세한 기록이라면 '바람의 풍경'은 시인의 자전기, 시인의 고향인 충북 충주 일대의 농촌 풍경이 주요무대다.
시인은“나는 길 속에서 자랐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 길을 보면서 멀리 있는 고장을 생각했고 길을 따라 바깥 세상으로 나왔다. 그러다가 어느날 문득 시인은 고향을 찾아가다가 그 길 위에서 잊었던 일, 지워졌던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길은 밖으로 데리고 나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기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게는 길만이 길이 아니고 내가 만난 모든 사람이 길이었다. 나는 그 길을 통해 바깥 세상으로 나왔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길을 타고, 사람을 타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하니 웬일일까.”
신경림 시인을은 흔히 고은 시인과 견준다. 고은씨와 신경림씨의 이력을 보면 정말 같은 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걸어왔음이 드러난다.
1950년대에 등단하고 60년을 전후한 방황, 70년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등 반유신투쟁, 80년대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예술인총연합 등 민중운동, 그리고 90년대의 환경운동에 이르기까지. 거의 반세기 가까이 두 사람은 같이 걸어왔다. 그래서 흔히 민중시, 리얼리즘 시를 이끌어온 대표 시인으로 함께 묶인다.
그러나 한 꺼풀만 벗기고 보면 그렇게 대조적인 사람도 드물다. 두 사람의 시풍(詩風)이나 성격이 너무나 대조적이라 문단에서는 흔히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로 비유한다.
"고은의 시는 이백처럼 활달하고 자유분방하고 에너지가 넘친다. 반면 신경림의 시는 현실에 밀착해 엄밀하고 조심스러우면서도 형식에 충실해 두보를 연상케한다." (시인 이시영)
"고은은 번득이는 선(禪)적 직관으로 힘차게 써내려간다는 점에서 이백처럼 장쾌하다. 신경림은 현실체험에서 차곡차곡 쌓아올린 것을 곱게 다듬어 풀어내 두보처럼 야물다." (평론가 김사인)
고씨의 '대낮 감포' 와 신씨의 '파장' 은 이런 대조적인 시풍을 말해주는 대표작들. 고씨는 벌거숭이 몸으로 작열하는 태양과 맞서려고 한다. 반면 신씨는 장에 나왔다가 소주 한잔 마시고 밤길을 돌아가는 촌놈이고 싶어한다.
시를 쓰는 태도 역시 이백과 두보처럼 다르다. 고씨는 최근 내놓은 시집 '남과 북' 에 담긴 시 1백34편을 한달 만에 다 썼다. 그는 "시는 변화의 섬광(閃光)" 이라고 말한다. 섬광처럼 번쩍 시상이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에 수백 편을 한꺼번에 쏟아낸다. 그러다 보니 발표작도 많아 저서만도 1백권이 넘는다. 신씨는 반대로 수십년간 시골장터와 일터를 쫓아다니며 채집한 단상들을 꿰맸다가 풀기를 거듭한 뒤에 시 한편을 탈고한다. 민요풍 장시를 쓰려고 10여년 간 전국의 민요를 채집하러 다닌 사람이다. 그렇게 하고도 모자라 몇 달을 품고있다가 꺼내 다듬은 뒤에야 세상에 내놓는다. 신씨는 "스스로 낮고 외로운 자리에 함께 서고, 나아가 그것들 속의 하나가 되는 것이 시의 참길" 이라고 말한다.
두 사람이 걸어온 생애도 시풍과 같다. 고씨의 행적은 폭이 크고 거침이 없다. 그는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6.25의 참상을 보고는 어느날 갑자기 삭발하고 불가에 입문했다. 전등사 주지와 불교신문 주필을 거치면서 불문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다가 4.19를 보고는 12년간 불자생활을 청산해버렸다. 승려신분이면서도 곡차(술)를 즐기고 염문도 심심찮아 주위에서는 "승려이기에는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 이란 소리가 많았다. 환속 후 10년간 허무주의적인 시를 쓰던 그는 70년 전태일 분신사건을 듣고는 반유신투쟁의 선봉장으로 변신했다. 80년대까지 3차례 감방을 들락거리면서 투쟁을 부추기는 참여시를 썼다. 90년대 들어서는 통일, 환경문제 등을 화두로 삼고 있다. 신씨는 이런 고씨의 변화무쌍한 행적에 대해 "그의 시는 한 곳에 못박혀 있지 않다. 외진 시골마을에서 농사꾼의 벗이 되어 서성거리고 있는가 하면, 공장지대 한복판에 뛰어들어 노동자의 대열에 서서 어깨동무하고 내달린다. 질퍽거리는 뒷골목에서 술취한 부랑자와 동무하고 있다가도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종소리가 되어 울려퍼진다" 라며 감탄했다. 고씨 자신은 "내 안에는 여러 시인이 들어 있다. 어느 때는 이 시인이 나오고, 어떤 때는 저 시인이 나온다" 고 말한다.
반면 신씨의 삶은 한결같다. 신씨는 56년 등단 이후 민초들 사이에 뒤섞여 낭인 같은 생활을 해왔다. 처음 10년 간은 고향인 충주에서 친구들에게 술을 얻어마시며 살았다. 66년 서울에 온 후 여러 직업을 전전했으나 늘 궁핍했다. 70·80년대를 거치면서 민주화대열에서 빠진 적은 없지만 항상 둘째 줄에 서 있었다. 80년대 투쟁의 선봉에서 구호를 외치는 대신 민요연구회를 만들어 문화운동을 통한 간접적인 민주화운동에 주력하는 방식이다. 고씨보다 덜 화려하지만 더 끈질기다. 고씨는 이런 신씨의 진득한 삶과 시풍에 대해 "언제나 단정하고 모범적이며, 그 바닥에는 넓은 사랑이 담겨있다" 고 말한다. 두 시인의 시와 삶은 마치 두 사람 모두 술을 즐겨 마시지만 좋아하는 술이 다르고 마시는 분위기가 다른 것과 같다. 고씨는 어떤 술이든 벌컥벌컥 마시고, 취하면 춤을 추고 염불을 외다가 갑자기 옆 사람을 붙잡고 입을 맞추기도 한다. 그러나 신씨는 맥주와 같은 순한 술을 즐기며 조용히 얘기하기를 좋아하고 결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고씨는 "목숨을 벗어 벽에다 걸어놓고 술 마시는 사람" 이고, 신씨는 "같이 있으면 편안한 술꾼" 이라고 한다.
아래는 2000년 6월 19일 문예진흥위원회에서 가진 신경림 시인 강연회의 요지이다.
"중3이나 고1 무렵 처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것 같은데, 그 동기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 때 저로서는 누군가에게 무슨 얘기인가를 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쓰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춘기였으니까 저 나름대로 세상살이에 대해서 궁금한 점, 의심나는 점들이 자꾸 생기면서, 이럴 때 남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궁금해져서 시를 읽기 시작했겠지요. 시를 읽다 보니까 '이 말도 참 근사하지만 나는 나대로 조금은 다르게 생각한다. 나는 나대로 할 얘기가 있다.' 생각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어릴 때 읽은 시 중에서 기억나는 것은 김영랑 시인의 '언덕에 바로 누워' 입니다.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중3 때 읽고서 무척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시를 읽고서 나도 뭔가 먼 데 있는 것, 먼 데 있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 말하자면 제 가슴 속에 뭔가 얘기하고 싶은 것이 있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이 시를 읽고서 나도 할 말이 한 마디 있다는 생각으로, 시를 처음 써 본 것이 첫 경험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결국 시라는 것은 자기가 남한테 하는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저로서는 아주 뒷날의 일이지만, 시는 얘기이되 남한테 명확하고 힘있게 말할 수 있어야 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
저는이렇듯 처음에는 남과 대화한다는 생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도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분명하고 힘있게 들려 주는 시들이었습니다. 그 때 좋아했던 시인 가운데 하나가 해방 후 월북을 해서 한동안 잊혀졌던 이용악입니다. 그의 시를 읽었다는 이유로 잡혀가서 몇 달씩 고생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지만 지금은 읽어도 아무 일 없습니다.
민주화가 된 덕분에 다시 우리 문학사 속에서 복권된 아주 훌륭한 시인이지요. 제가 어릴 때 좋아했던 시 중에 그의 '북쪽'이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읽은 것은 고등학교 2, 3학년 무렵이었습니다. 읽으면서 가슴 속으로 찡하는 울림 같은 것을 받았습니다. .
얼마 뒤 대학교 2학년이 되어 문단에 나왔습니다. '갈대'라는 시로 '문학예술'지의 추천을 받아서입니다. 제가 문단에 나와서 굉장히 실망한 것이 있었습니다. 선배나 동료 시인들을 만나서 굉장히 실망했습니다. 모두들 당대의 시만 읽을 뿐 10년이나 15년 전의 시조차 잘 읽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당장 문예지에 발표되어 여러 평론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시들만 읽고서, 마치 그것이 문학의 전부인 것처럼 얘기를 해요. 이만저만 실망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에 좋은 선생님을 한 분 만났습니다. 국어 선생님이셨는데, 수업 시간에 제가 이용악 시인에 대해서 묻곤 할 때마다, 당시에는 그것이 금기시될 때였는데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는 이용악 시인에 대해서 자세한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이러이러한 시도 있으니까 그것들도 한번 읽어 보라고 권해 주셨습니다. 그 덕에 저는 좋은 시들을 참 많이 읽었습니다. 다른 학생들이 읽을 수 없는 시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지금 연세대 교수이자 문학 평론가인 유종호씨의 아버지인데, 저는 그런 면에서 참 행운아였지요.
그런데 서울에 와서 동료 문인들이나 선배들을 만나 이용악 얘기를 하면, 그 사람은 벌써 옛날 시인이고 지금은 그 사람의 시는 읽을 필요가 없다고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백석의 시도 좋아했는데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소설도 마찬가지로, 홍명희의 '임꺽정' 얘기를 하면 아무도 귀기울여 주지 않았습니다. 그 때 저하고 술자리에서 얘기가 유일하게 통할 수 있는 사이가 작고한 천상병과 유종호였습니다. 저하고 천상병과는 여섯 살쯤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천상병이 저를 어린애 취급을 하고 상대를 잘 안해 주려고 하다가, 내가 현덕의 소설을 읽었다는 소리를 하니까 그제서야 이 사람이 술을 먹다가 깜짝 놀라 바라보았습니다. "야! 임마 니가 어떻게 현덕을 읽었어?" 하는 천상병의 말에, 저는 "내가 왜 못읽어!" 하면서 현덕의 소설 한 대목을 암송해 주었지요. 그랬더니 "진짜로구나!" 하면서 백석 시 이야기로 번지고 하면서 친해졌지요. 인사동에 나오면 르네상스 다방을 찾아 천상병을 만났던 기억이 납니다. 천상병은 원래 돈이 없는 사람이니까 술 얻어먹을 희망은 전혀 없었지만, 그래도 제가 그를 찾아가는 것은 옛날 소설을 읽은 동지로서 유일하게 인정해줬기 때문입니다.
한때 문학을 포기할 생각도 했었습니다. 그 때 실망한 것과 관계가 있는 거지요. 시를 쓸 마음도 안 생기고, 동료나 선배 문인들을 만나면 아무 재미가 없었습니다. 1956년이면 한국전쟁이 끝난 지 겨우 3년밖에 안 되었을 때입니다. 길거리에 팔다리 없는 상이군인이 허다하고, 버스를 타면 옆에 와서 껌 사달라고 생떼쓰는 상이군인들 때문에 불편할 정도였지요. 그냥은 못 갔습니다. 수없이 사줘야 되고, 돈 없으면 욕도 먹어야 했고, 거리마다 무너진 집, 폭탄 맞아서 쓰러진 집 들이 복구되지 못한 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때 당시에 시인들이 쓰는 시라는 것은 신이 어떠니, 까뮈가 어떠니 사르트르가 어떠니 하는 관념적인 소리뿐이었습니다. 그게 아니면 옛날식으로 꽃이 어떻고 님이 어떻고 고향이 어떻고 하는 타령들뿐이었습니다. 저는 자연히 시를 쓰는 데 흥미를 잃었지만 그것 때문에 문학을 그만두려고 한 건 아니었습니다. 제가 만나는 친구들 중에 우연히 사회과학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과 함께 어울렸습니다. 수요회 같은 것을 만들어 가지고 수요일마다 모여서 술도 먹고 했는데, 그런 사람들과 교유하면서 제가 어떻게 보면 세상에 대해서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수요일날 만나면 일주일 동안 읽은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일주일 동안 무엇에 대해서 읽었는지 한 마디 제대로 못하면 병신이 되니까 얘기를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헌책방 찾아다니면서 책을 한 권씩 구해 읽었습니다. 남들이 거의 안 읽었을 책을 구해 읽은 다음 모임에 나가 감동적으로 발표를 하면, 그날의 대장이 됩니다. 돈을 추렴해서 술값을 내는데, 그 사람은 술값을 안 내도 됩니다. 3차 4차를 가도 그냥 먹는 거지요.
시를 던지고 10년 동안 시골에 박혀 지내다 제가 문학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동기는 사실 단순합니다. 그 동안 저하고 함께 책을 읽던 선배가 진보당 사건으로 잡혀 들어갔어요. 죽산 조봉암 선생은 50년대에 우리 나라 최초로 남북통일은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분입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모든 사람들이 다 북진통일을 주장했었습니다. 그 때 북진통일을 주장했던 사람들이 지금 관계에서 한 자리씩을 하고 있습니다만, 당시에는 총칼로 다 뒤집어 엎고 평양까지 가서 북한에 있는 사람 다 때려 죽여야지 통일이 되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지배적인 정서였습니다. 그 때 유일하게 조봉암 선생만이 "그래서는 안 된다. 북한도 같은 동포인데 싸우면 되느냐?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 평화적으로 하지 않고 전쟁으로 한다고 생각하면 이건 백년 천년이 가도 절대 통일이 안 된다. 소련이라는 나라도 약하지 않고 미국도 약하지 않은데 누가 양보하겠느냐?" 고 주장했습니다. 참 합리적인 소린데 그런 소리를 했다고 해서 이 사람을 잡아다 죽였습니다. 이승만 정권 말기 때 일인데 그 사건에 선배가 끌려 들어갔어요. 저는 겁이 많은데다 당장 맨날 누가 잡으러 오는 것 같아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골로 도망을 갔지요. 시골로 도망갔다고 못 잡으러 올 리는 없지만, 일단 시골로 가면 마음은 편하지 않습니까? 박혀 살다 보니까 점점 문학에 대한 정열도 식고, 문학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회의도 생겼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여러 가지 고생도 해봤습니다. 광산에서 일도 해보고, 노동판에도 가보고 농사도 지어보고 장사도 하면서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과연 문학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학이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따위의 갖가지 회의가 일었습니다. '일단 문학을 관둬 버리자. 무얼 할 것인가는 다음에 생각하고 일단 관둬 버리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거의 10년을 시골에 박혀서 살았습니다. 제가 그 때 깨달은 것 가운데 하나는, 지금도 그것만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데, 사람은 결코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남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고 물론 사람은 개인이라는게 중요하지요. 결국은 마지막 책임은 자기가 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결코 남과 함께 살지 않는 삶이라는 건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그 때 깨달았지요. 정리하면 이렇게 되는 것 같아요. 사람은 더불어 혼자 산다. 말이 이상한 얘기지만 남과 더불어 혼자 산다. 남과 더불어 살지만 결국 혼자 책임지니까 혼자 산다. 그러나 이 더불어 혼자 산다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고, 그 때 제가 막연하게 생각한 것은 앞으로 시를 쓸 기회가 다시 온다면 나는 이제 나 혼자만 사는 것, 나 혼자만의 생각, 혼자만의 뜻, 이런 것에만 매달리지 말고 더불어 사는 정서, 더불어 사는 어떤 아름다움, 더불어 사는 의미들을 시로써 표현해야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명확한 건 아니고 막연하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다시 시를 쓰게 된 것은 시인 김관식을 우연히 길에서 만났는데, 그가 술김에 "야, 서울에 올라가자." 하고 잡아끄는 통에 둘이서 서울에 올라옴으로 해서였습니다. 김관식의 집은 홍은동에 있었습니다. 산중턱에 무허가로 집을 크게 짓고 살았습니다. 자기 마누라도 있고 애들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방 한 칸을 무조건 비워 주었습니다. "이 방은 앞으로 신경림이가 쓸 거니까 그렇게 알아라." 하며, 공짜로 방을 내주었습니다. 그래서 서울살이를 시작하게 된 거죠. 처음에는 술김에 올라와서 같이 술먹고 놀았지만, 그때 제가 결혼한 몸이어서 혼자 살 수는 없었습니다. 시골 가서 색시를 불러서 같이 왔지요. 그 집에 데려다 놓았는데 한심한 거죠. 김관식이 우선 쌀을 다섯 말을 주고 김치도 주고 해서 생활을 시작했지요. 그래서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시를 한 10여 년 안 썼다고 하지만 무척 시를 쓰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속에서 뭔가 북받쳐 올라 시를 안 쓰면 못 견딜 때가 있었습니다. 시골 사람들은 돈벌이가 없으니까 양귀비를 재배했습니다. 그걸 집에서 조금씩 만들면 상당한 돈벌이가 되었습니다. 그걸 수집하러 다니는 사람이 있었어요. 제가 수집하러 다니는 사람의 길 안내를 맡은 일이 있습니다.
길 안내를 해주면 돈을 주었습니다. 제가 원래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성미인데다, 공짜로 먹고 돈까지 주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어느 겨울이었습니다. 술을 좋아해서 주막에 들르면 일단 술 먼저 먹는 걸 생애 제일의 뜻으로 삼고 있을 때여서 잔뜩 취해서 잤습니다. 눈이 며칠 동안 퍼부어 길을 다닐 수가 없을 정도가 되어, 한 주막에서 사흘 동안 매일 술을 먹었던 것 같습니다. 원래 그 집 주인이라는 사람은 남로당이라고 총 맞아 죽었고, 여자가 혼자 술집을 하는데 농담을 잘하고 걸직한 소리를 잘했습니다. 매일같이 동무해서 술 먹고 그랬는데, 어느 날 새벽에 일어나 보니 눈이 다 그쳤어요. 울타리가 없는 시골 뒷간에서 일을 보고 있는데, 하늘에 주먹만한 별들이 달려 있고 머리 위에서는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한참 밑에는 공사장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공사장에서 불빛이 비쳐요. 그래서 마음이 얼마나 슬픈지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때는 필기도구를 안 가지고 다녔으니까 일단 속으로 시를 썼지요. 그것을 나중에 조금 정리해서 발표한 게 '눈길'이라는 시입니다. 말하자면 시를 쓰고 싶은 욕망 같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10년 동안에 쓴 시가 그거하고 '그날'이라는 시입니다. '그날'은 조봉암 선생이 사형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절망적인 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시집 '농무' 속의 작품들은 거의 서울에서 썼지만 머리 속에는 메모가 되어 있었던 셈입니다. 메모가 되어 있던 것을 서울에 와서 옮겨놨을 뿐이지요. '농무'를 두고서 어떤 이들은 농민의 저항 의식 등을 쓴 거라고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게 아니고 농촌에 살면서 농민들이 갖는 어떤 농촌적인 정서,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더불어 사는 삶, 남과 함께 하는 삶… 이런 것들을 시로써 한번 표현해 보고자 했습니다.
또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25시'를 쓴 게오르규가 한국을 찾았을 때의 일입니다. 그가 우리 나라를 방문한 1975년도에는 김지하 시인이 사형 언도를 받고 투옥되어 있을 때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지하는 꼭 죽인다고 여러 사람 앞에서 죽인다고 언명을 했다. 그러니 그 사람은 꼭 죽을 것이다'라는 소문이 돌 때였습니다. 그럴 때 게오르규가 정부 초청으로 한국에 왔습니다. 세계적인 명작을 쓴 작가가, 그런 상항 속에서 정부 초청으로 우리 나라에 온 걸 보고 뜻있는 이들은 크게 분개했습니다. 그가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인 시공관에서 '시인의 사명'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잠수함이 바다 밑으로 들어갈 때는 토기를 가지고 들어간다. 왜냐하면 토끼가 수압에 가장 민감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못 견딜 수압이 되면 토끼가 먼저 소리를 지릅니다.' 즉 게오르규는 정치적으로 억압 상황,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 등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었을 때, 못 살겠다고 가장 먼저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곧 시인이라고 은연중에 말했습니다. 한국이라는 상황은 얘기하지 않고 말한 겁니다. 비록 정부의 초청으로 왔지만 마음 먹고 한 마디 하는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어느 일본 시인은 '시에는 본질적으로 절규성'이 있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정치적으로 못 살게 되었을 때, 환경이 나빠졌을 때, 도덕적 타락 현상이 만연되었을 때 못살겠다고 큰 소리를 지르는 것이 시인이라는 건데, 그때 저는 크게 공감했습니다. 절규성이 있음으로 해서 그 시는 역동성을 띠고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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