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ㅂ-ㅇ)

신석정(1907-1974, 전북 부안)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15:55

신석정(1907-1974, 전북 부안)

 

 신석정은 1907년 7월 7일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에서 출생하였다. 석정의 나이 8세때 한약방을 경영하던 부친이 남의 보증을 잘못 섰다가 그 책임에 몰려 가산을 처분하고 부안읍에서 약 3킬로 떨어진 신안면 마택리 서옥 부락을 위시하여 동률면 창북리, 금산리 등을 전전하다가 선은동(仙隱洞)에 정착했다. 이 선은동은 이름 그대로 신선이 숨어 살 정도로 아름다운 고장이었으며, 석정의 시와 관련있는 꿈의 마을이었다. 이 고향 마을의 인상은 그의 소년기를 회상한 글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꿈 많은 소년이었다. 항상 우리 고을 주변에 알맞게 자리잡고 있는 나지막한 구릉의 잔디밭이 아니면, 산 언저리 백화 등이 칭칭 감고 올라간 바위 밑을 찾아가서는 어슴어슴 황혼이 먼 바다를 걸어올 때까지, 오랑캐꽃빛 섬이나 저녁 노을 붉게 타는 수평선을 덧없이 바라보면서 아득한 꿈을 멀리 띄워 보내고 망연자실하는 것이 내 소년 시절을 거의 차지하던 일과였다.

 노령산맥이 동남으로 병풍 두르고 눈이 모자라도록 넓은 벌을 끼고 있는 이 고을 뒷산에 오르면, 서해 바다의 수평선이 한 눈에 들어오고, 그 산 옆에 아름드리 고목이 울창한 서림공원(西林公園)은 내 젊은 꿈이 한 그루 한 그루에 새겨진 유일한 산책의 길이었다.  그 숲 속에서 베를레느의 「가을 노래」를 읊으며 해를 지웠고, 그 숲길에서 구르몽의 「시몬」을 부르면서 낙엽을 밟던 것이 바로 엊그제련 듯 하건만…]

 이후 신석정은 18살의 나이로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한다. 이 무렵에 정신적 방황도 심했던 것 같다.

[나는 섣불리 들어선 문학(文學)의 길을 단념할 것을 맹세하고 일삼아 써오던 일기, 잡문, 시 나부랭이를 고스란히 불사른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그 나이에 찾아오는 풀길 없는 인생(人生)의 고독과 낭만은 역시 문학밖엔 의지할 데가 없었던지, 다시 책을 모아들이고 사전을 찾아가면서 톨스토이와 투루게네프를 탐독하게 되었고, 아내의 결혼반지를 팔아다가 시집을 사들이곤 하였다.]

 이후, 불전공부와 문학 공부사이에서 번민하던 석정은 어머니 상을 당한 후 후자의 길을 택해 1931년 불교강원의 1년 공부과정을 마치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시골로 떠나면 문학하는 데 시간적 여유는 있겠지만 자극을 받을 길이 없으니 내려가지 말고 더 견뎌 보라는 김기림의 간곡한 만류도 뿌리치고 귀향한다.

 석정은 낙향 3년만에 가까스로 자기 집을 마련하여 스스로 청구원이라 이름 지었다. 청구원은 측백나무의 생울타리에 둘러싸여 있는 조그마한 삼간의 초가집이다. 앞뜰에는 은행나무, 벽오동나무, 자귀대나무, 백목련, 산수유, 철쭉, 시누대 등 온갖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데 모두 신석정 시인 본인이 직접 심은 것이었다. 등나무 밑에 놓여 있는 나무의자가 손님을 접대하는 응접실 구실을 하여 주었다. 집 뒤에는 바람이 일지 않는 아늑하고 부드러운 언덕의 오솔길이 있었다. 거기서 조금만 산책의 발길을 옮기면 눈앞에 황해 바다와 갈매기의 흰 나래가 보인다. 이 청구원(靑丘園)에서 첫 시집 『촛불』과 두 번째 시집『슬픈 목가(牧歌)』가 쓰여졌다.

  그의 작품이 발표될 때마다 현실세계를 넘어선 유토피아의 세계라 하여 현실에서 멍들은

사람들은 그 작품을 읽고 위안을 받았다. 이 무렵에 멀리 황해도에서 찾아온 문학 소년이 바로 중학을 갓 나온 장만영이요, 또 중학2년을 다니던 서정주도 이 때에 처음 만나 문학소년이었다. 이들이 거의 매년 청구원을 찾아준 반가운 손님들이었다고 한다.

  장만영은 그런 인연으로 그의 동서가 되었다. 장만영과 신석정은 서로 통하는 점이 적지 않았다. 장만영은 당시 중앙시단에서 활동한 시인으로 시골의 석정에게 서울 이야기를 전해주곤 했다. 백석과 편지를 주고받았던 것도 이 시기였다.

 1970년대에 오면 석정은 모든 것을 정리하게 된다. 마지막 시집 출간하고, 교직에서 물러났다. 20년 가까운 교직생활을 청산하고, 말기에 그는 눈물이 많아진다.

[기구한 인생의 허구한 편력(遍歷)을 거쳐 오는 동안 언젠가 한 번은 웃음다운 웃음을 실컷 웃어 보고, 울음다운 울음을 뼈저리게 한번 울어 보자는 것이 내 평생 소원이었는데, 이제껏 그렇게 웃어 본 적도 없거니와 그렇게 속 시원히 울어 본 일도 없다. 더구나 망국의 백성으로 내 청춘을 고스란히 빼앗기는 동안, 웬만한 눈물쯤은 그저 가슴 깊숙이 흘려보내기 마련이었고, 씁쓸한 피는 꿀꺽 참아 넘겨 오다가 해방이 되던 날 비로소 벅차던 기쁨에 뜨거운 눈물을 펑펑 쏟아 본 것이 고작이었다.

  해방을 맞던 해가 서른 아홉 나던 해였으니, 그 때만해도 삼십대의 벅차 오르던 꿈을 좀체 주체할 길이 없어 그 길로 바로 서울로 뛰어갈까 하다가, 몇몇 뜻 있는 친구와 더불어 고향에 중학교를 세우기로 의견을 모아, 그해 9월 부랴부랴 '중학 설립 기성회'를 만들고 이듬해(1946) 3월 1일을 기해서 중학교 문을 열게 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개교를 앞두고 서울에 올라가 모셔 온 선생님이 겨우 여섯 분, 우리고을에서 대학을 나온 친구들을 규합해서 가까스로 선생님은 거의 모시게 되었으나, 국어 과목만은 구할 길이 없어서 부득이 당분간 맡는다고 맡아 오게 된 것이 끝내 정년에 이르는 오늘까지 맡게 되고 말았다. 오늘에 이르도록 인생을 제대로 걸어오지 못하고, 새치기로 끼어 온 내가 국어 교사 역시 새치기로 시작한 것이 막상 정년까지 끌고 올 줄은 나도 미처 몰랐다. 그렇다고 새삼 후회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토록 오래 교육계에 몸담아 오면서도 이렇다 할 이바지될 만한 일 한 가지 남겨 놓지 못하고 떠나게 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할 따름이다.]

 키가 훤출하고 코가 늘씬한 석정은 마도로스 파이프를 물고 술을 즐기던 멋쟁이였다. 좌우명이 지재고산유수(志在高山流水)로 뜻을 항상 저 높은 산과 흐르는 물, 즉 지조에 두었던 듯 하다. 그러면서도 천진스런 일화를 많이 남겼다.

 시인 이기반씨에 따르면 1950년대, 지금 경원동 부근에는 석정의 단골술집이 있었다고 한다. 석양 무렵 허름한 그곳에는 손님들이 많이 몰려들어도 석정 자리는 항상 비워둘 정도였고 그집 여주인을 문인들은 석정댁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는 나무중 태산목을 유난히 좋아했고 꽃이 필 무렵이면 가까운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태산목 잎에 술을 부어 마시는 풍류를 즐겼다. 한번은 술에 취해 전주상공회의소 앞길에서 교통경찰을 밀치고 자신이 수신호로 교통정리를 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또한 소년을 무척 좋아해서 어린 학생들이 지나가면 볼을 부벼 대었다고 한다.

  석정은 1972년 교육계에서 물러나고 난 다음에 자택에서 시작에 몰두하다가 고혈압으로 인하여 6개월간 투병하다가 1974년 7월 6일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