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동 (梁柱東, 1903∼1977, 경기도 개성)
그의 수필집 『文酒半生記』는 온통 술에 대한 글이다. <내가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은 열 살 때부터라 기억한다.> 이는 바로 열한살 때부터 학동들로부터 월사금 대신 술을 한 병씩 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양주동의 술의 내력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다. 아버지는 어린 양주동에게 술은 남자가 꼭 마셔야 하는 것으로 인식이 고정되는 계기가 제공된 것이다.
다음의 수필집의 일화를 살펴보자.
[내가 처음 술에 크게 취하기는 아마, 열살 때라 기억한다. 집에서 술을 빚어 그 독을 광에 두었는데, 그 그윽한 내음과 향기가 그애말로 부엌을 지나, 마루를 건너, 사랑에까지 미쳐 소년 <장부>의 비위를 건드림이 자못 심하였다. 마침 어머니가 없는 틈을 타서 내가 큰 사발을 들고 광에 침입하여 술독의 뚜껑을 젖히고 우선 한바탕 내음을 쾌히 맡아본 뒤 몇 사발을 연거푸 마음껏 퍼먹었다. 안주는 무엇이었을까? 광에 북어쾌가 걸렸었겠으나, 아마 마른 북어를 찢었겠지. 아무튼 그 뒤엔 기억이 없다.]
그리고 여기 술에 관한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양주동이 대학을 졸업하고 평양 숭실전문대에 재직할 무렵 수학여행 인솔시 묘향산에서의 이야기이다. 장로교 미션계 학교이기 때문에 집에서만 술을 몰래 먹었던 위장 금주시대였다. 학생들은 묘향산 상원암까지 길을 떠났으나, 양주동은 여관에 남아 무료한 시간은 보내느라 여관주인을 시켜 "白酒 한 되 한 병을 가져오라." 명하여 몇 컵 들이키고, 그것도 부족하여 또 다시 두 병을 청해 마시는 사이 산에 올랐던 학생들이 내려오는 행렬을 보고 도망을 친다. 학생들이 "선생님, 왜 먼저 가십니까?" 물으니, 양주동이 "어어, 집에서 갑자기 아내가 출산을 한다는 소식을 받아서 부득이 먼저 가네"라고 버스를 타지만, 여관주인의 <술값 1전 3원 60전야>라는 계산서 때문에 들켜버렸다는 이야기이다.
양주동은 우정을 중요시한 인물로 보인다. 대학 예과시절에는 유엽과 백기만과 깊이 사귀었다. 그들과는 욕으로 시작하고 욕으로 끝나는 그런 관계의 우정이었다. 양주동의 가장 가까운 친구는 자살한 古月이었으니, 이는 양주동의 가슴을 가장 무섭게 적셨던 우정이었다. 이장희는 술도 마실 줄 모르면서 늘 따라다니다가 안주만 많이 집어먹는다고 핀잔을 받을 정도로 양주동과의 만남을 중히 여긴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양주동이 동경으로 떠날 때 혼자 역에 나와 떠나는 양주동의 포켓 속에 1원짜리 위스키를 건네주던 일이나, 「연」이라는 시를 건네주던 일화도 있다.
古月이 죽자 신문에 7회에 걸쳐 연재한 「落月哀想」은 둘의 우정이 얼마나 간절하고 돈독하였던가를 가늠케 하는 名文으로 양주동의 나이브함과 내성적인 또 다른 인정을 엿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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