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보(1168-1241, 개성?)
이규보의 아버지는 호부시랑을 지낸 윤수이고, 어머니는 김씨이다. 생후 3개월에 악종이 전신에 퍼지자 부친이 송악사에서 신에게 길흉을 점쳤다는 기록을 보면 개성에서 출생했다고 추측된다. 무인정변이 발발하기 바로 2년 전이다.
이규보는 글을 잘 지어 9세 때 이미 기동(奇童)이라 이름이 났다. 이규보는 11세 때 숙부가 자기 친구들 앞에서 장난삼아 시를 짓게 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좌중이 모두 놀랐다.
紙路長行毛學士 나긴 종잇길에 모학사(붓)가 가고
盃心常在麴先生 술잔의 마음은 항상 국선생(누룩)에 있다.
이규보는 시험(사마시)에 세 번 떨어졌고, 네 번째 수석으로 합격했다. 그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백운소설에 "당나라 백낙천(白樂天)과는 음주와 광음영병(狂吟詠病)이 천생 같아 낙천을 스승으로 삼는다."라고 쓸 정도로 시주(詩酒)를 즐겼다. 또 시와 술 외에 거문고를 즐겨 스스로를 삼혹호(三酷好)선생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동국이상국집에만 2천수 이상의 시를 남길 정도로 시를 사랑한 이규보이다. 이규보에게 시는 떼어버릴 수 없는 마(魔)와 같은 존재였다.
詩不飛從天上降 시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건만
勞神搜得竟如何 어이해 애태우며 찾으려는가
好風明月初相諭 좋은 바람 밝은 달 처음엔 좋아하지만
着久成?卽詩魔 오래되면 홀리나니 이게 바로 시마라네
위 시는 삼마시(三魔詩)중에 하나로 이규보 자신이 "내가 연로하여 색욕을 물리쳤으되 시주(詩酒)는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시주도 때로 흥미를 붙일 뿐 벽을 이루어서는 아니 되니 벽을 이루면 곧 마가 되는 것이다. 내 이를 걱정한지 오래라 점차 덜고자 하여 삼마시를 지어 내 뜻을 보인다."고 토로하면서 지었던 시다.
25세 되던 해 개경의 천마산(天磨山)에 들어가 시문을 지으며 세상을 관조하며 지냈다. 장자(莊子)의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세상의 번거로움이 없는 허무자연의 낙토)의 경지를 동경하기도 하였다. 백운거사(白雲居士)라는 호는 이 시기에 지은 것이라고 한다.
26세(1193)에 개경에 돌아와 빈궁에 쪼들리게 되었고, 수년 동안 벼슬 없는 처지를 한탄하게 되었다. 이무렵 〈동명왕편 東明王篇>을 지었다. 구전되어온 동명왕의 건국 역사는 '신통하고 이상스러운 일들'로 세간에 인식되어 왔으며, 김부식은 공자 중심의 유학적 질서 하에서 '그런 것은 황당하고 기괴하기에 배격해야 마땅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이규보는 서문에서 "지난 계축년(1193) 4월에 <구삼국사>를 얻어 동명왕 본기를 보니 그 신기한 사적이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믿을 수 없어서 귀(鬼)이고 환(幻)이라 생각했었는데, 세 번 거푸 탐독하고 음미하니 점차 그 근원에 이르게 되어, 환이 성(聖)이며, 귀가 아니고 신(神)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동안의 중화중심주의로 위축된 의식을 떨치고 "우리가 본래 성인의 고장이라는 사실을 알라고자 시를 짓는다"고 이규보는 명시하고 있다.
1197년 조영인(趙永仁), 임유, 최선(崔詵) 등 최충헌(崔忠獻) 정권의 요직자들에게 벼슬을 구하는 부탁의 서신을 썼다. 거기에서는 그동안 진출이 막혔던 문사들이 적지않게 등용된 반면 그는 어릴 때부터 문학에 조예를 쌓아왔음에도 30세에 이르기까지 불우하게 있음을 통탄하고 일개 지방관리라도 시켜줄 것을 진정하였다. 32세 때 최충헌의 초청시회(招請詩會)에서 그를 국가적인 대공로자로서 칭송시를 읊고 나서 비로소 벼슬을 얻었다.
1217년 우사간이 되자 출세의 순조로움에 소원이 충족되는 것 같았고 관리로서의 행복감에 젖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해 가을 최충헌의 한 논단(論壇)에 대해 비판적이었다고 하는 부하의 무고로 인하여 정직당하고 그 3개월 뒤에는 좌사간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집무상 과오를 범한 것으로 단정, 좌사간마저 면직되었다. 이러한 돌변사태는 그때까지 전통적인 왕조적 규범에 의하여 직무를 수행하고자 하였고 그러한 태도를 관리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던 그에게 큰 충격과 교훈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관념이 최충헌의 권력 앞에서 무의미한 것이 되고 자신의 삶을 파탄으로 이끄는 것을 보자, 자신의 사고(思考)와 태도를 바꾸어 보신(保身)에 특별히 마음을 두게 되었다.
1220년 최충헌의 사망에 따라 집권한 최이에 의하여 귀경하게 된 이규보는 최이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길을 걷게 된다. 문필기예의 소유자로서 최씨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충실히 집행하는 것, 그것만이 택할 길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를 일이다. 그 뒤 10년간은 최씨정권의 흥륭기이기도 하거니와 그가 고관으로서 확고한 기반을 다진 기간이기도 하다. 40세부터 70세까지 몇 차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최씨정권 보호속에서 22번이나 관직에 제수되며 영달의 시기를 살았다.
이규보는 개성 서쪽 교외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아담한 별장이 있었는데 사가재(四可齋)라 이름하였다. 농토가 있어 가히 양식을 공급할 수 있고 뽕밭이 있어 가히 누에를 쳐서 옷을 지을 수 있고 샘물이 있어 가히 마실 수 있고 나무숲이 있어 가히 땔감을 조달할 수 있으니 마음에 가한 것이 4가지가 있으므로 사가재라 명명했다.
말년에 몽고군이 고려를 침략하자, 이규보는 임금을 따라 강화도로 피난한 후 그곳에서 74세를 일기로 숨졌다. 그가 죽기 전 집권자 최이는 그의 일생을 정리하는 <동국이상국집>을 간행하도록 조정 차원에서 지원해주었고, 이규보는 마지막 순간까지 최이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규보는 당시 계관시인과도 같은 존재로 문학적 영예와 관료로서의 명예를 함께 누렸다. 권력에 아부한 지조 없는 문인이라는 비판이 있으나 대 몽골 항쟁에 강한 영도력이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정권에 협조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또 최씨 정권의 문인들에 대한 우대와 함수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규보는 국란의 와중에 고통을 겪는 농민들의 삶에도 주목, 여러 편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그의 문학은 자유분방하고 웅장한 것이 특징인데, 당시 이인로 계열의 문인들이 형식미에 치중한 것에 반해 기골(氣骨)·의격(意格)을 강조하고 신기(新奇)와 창의(創意)를 높이 샀다. 자기 삶의 경험에 입각해서 현실을 인식하고 시대적·민족적인 문제의식과 만나야 바람직한 문학이 이루어진다고 이규보는 생각했다.
술과 시, 거문고를 몹시 좋아해서 삼혹호(三酷好)란 호를 가졌던 이규보는 술 못지 않게 차도 좋아했다. 사혹호(四酷好)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 싶다. 이규보 스스로 차를 일컬어 ‘평생동안 지독히 즐기던 것’이라고 했다. 《동국이상국집》에 실린 차시(茶詩)만도 40수 가까이 된다.
끝으로 시 한 편 감상하면,
種花
種花愁未發 꽃을 심을 때에는 피지 않을까 걱정하다가
花發又愁落 꽃이 피면 지는 것을 근심하네
開落摠愁人 피고 지는 것 모두 사람을 시름겹게 하니
未識種花樂 꽃 심는 즐거움을 아직 알지 못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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