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ㅂ-ㅇ)

원효(경산 자인, 617-686)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17:32

원효(경산 자인, 617-686)


 원효는 신라 26대 진평왕 39년(617)에 현재 경북 경산군 자인면 당시 압량군(押梁郡) 불지촌(佛地村)의 밤나무 아래에서 태어나서 신문왕 6년(686)년 70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불지촌은 발지촌 또는 불등을촌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지금도 경산군 자인면의 한 언덕에는 신문왕 당시 원효가 지었다는 금당 자리가 남아 있고, 그 밑 골짜기에는 그의 아들 설총의 출생지로 전하는 자리가 남아 있어 그 자리가 바로 원효가 태어난 곳이 아닌가 생각된다. 현재 원효의 생가는 복구 중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효는 그의 어머니가 유성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하였으며, 그를 낳을 때에는 오색의 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그를 임신하였을 때 집 근처의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갑자기 산기를 느끼고 해산하게 되어 집에 들어 갈 사이도 없이 남편의 털옷을 그 밤나무에 걸고 그 밑에 자리를 마련하여 원효를 낳았다고 한다.

소년 시절에는 화랑의 무리에 속하였으나 도중에 깨달은 바가 있어 출가할 것을 결심하고 자기 집을 헐어 초개사라는 절을 세웠다. 그가 언제 출가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원효는 648년(진덕여왕 2) 황룡사에서 중이 되었다. 일정한 스승을 모시지 않았다고 하지만 시대 상황으로 보아 원광과 자장으로 부터 불도를 배웠을 가능성이 많다.


원효는 경전을 연구하고 수도하다가 당시의 풍조에 따라 의상과 함께 34세의 나이로 도당의 길을 떠났다. 그러나 첫번째 시도는 고구려를 통과하다가 순라군에게 잡혀 좌절된다. 10년 뒤 다시 해도로 의상과 함께 입당하기 위하여 백제 땅이었던 항구로 가는 도중 비 오는 밤길이라 어느 토굴에서 자게 되었다. 아침에 깨어 보니 그 곳은 오래된 무덤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날씨 때문에 그 곳에서 하룻밤을 더 지내게 되는데 그날 밤에 갑자기 귀신의 동티를 당하는데 이때 그는 자기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곧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법(法)이 일어나고 마음이 멸하므로 토굴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알았다.(則知心生 故種種法生 心滅故龕墳不二)" 또 그는 '삼계(三界)는 유심(唯心)이요, 만법(萬法)은 유식(唯識)이다.'라고 깨우쳤다. 즉 일체의 현상은 마음에서 일어난다는 도리를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의상과 헤어져 돌아왔다.

여기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았던 해골바가지의 썩은 물을 마셨다는 설화는 후대에 그럴듯하게 포장된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원효는 요석 공주와의 사이에 설총을 낳는다. 이것은 원효 나이 39세에서 44세 사이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던가 한다. 원효와 요석공주와의 관계는 원효의 생애에 큰 전환점이었다. 원효가 지어 경주 시내의 아이들 사이에 유행시킨 노래가 있었는데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빌려 준다면 내 하늘을 떠받들 기둥을 베어오련만"이라는 알쏭달쏭한 노래였다. 무열왕이 이 노래를 듣고 단숨에 숨은 의미를 파악하였다. 원효가 남산에서 시내로 들어오려고 다리를 건널 때 왕의 신하가 숨어 있다가 원효를 고의로 물 속에 빠뜨려 옷을 말리자는 구실로 요석궁으로 데려간다. 요석궁은 요석 공주가 거처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원효는 사흘을 머문 뒤 떠났다. 그후 요석공주는 설총을 낳았다. 원효가 지어서 퍼뜨린 노래 가사 중에 자루 빠진 도끼는 여자이니 바로 요석공주이며, 하늘을 떠받들 기둥은 나라의 현인이니 바로 설총이었다.


원효의 꿈은 거대하였다. 그는 복잡다단한 불교 사상을 뛰어 넘어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수립하여 대중들에게 환원시키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또한 재능도 있었고 왕실이란 든든한 경제적 후원자도 있었을 것이다.


원효는 스스로 복성거사나 또는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칭하고 속인 행세를 하였다. 어느날 한 광대가 이상한 모양을 한 큰 표주박을 가지고 춤추는 놀이를 구경하고 깨달은 바가 있어, 광대와 같은 복장을 하고 불교의 이치를 노래로 지어 세상에 유포시킴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을 무지한 대중에게까지 잘 알 수 있도록 하였다. 그 노래의 줄거리는 <화엄경>의 이치를 담은 것으로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나니"라는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노래였다. 그 노래를 원효 스스로 '무애가'라 불렀다. 원효는 부처와 중생을 둘로 보지 않았으며 오히려 "무릇 중생의 마음은 원융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니, 태연하기가 허공과 같고 잠잠하기가 오히려 바다와 같으므로 평등하여 차별상이 없다."라고 하였다. "일체의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고 말한 것처럼 무애사상은 그의 사생활에서도 잘 나타난다. 원효는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거나 거사(居士)들과 어울려 술집이나 기생집에도 드나들었다. <화엄경>을 강의하기도 하고, 음악을 즐기기도 하고, 명산대천을 찾아 좌선을 하기도 하였다.


의상의 화엄사상이 지배층 중심의 통화사상(統和思想)이었던 데 반해 원효의 화쟁사상은  일반 민중을 중심으로 한 화합사상이었다. 원효의 사상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하는 기본 원칙 위에서 출발하고 있는데, 성인(聖人) 뿐만 아니라 악인(惡人)도 성불할 수 있다고 한 그의 주장은 고통 받고 있던 당시의 민중들에게 크게 환영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