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외수(1946- , 경남 함양)
아래 내용은 아버지 이승윤이 밝힌 이외수의 어린시절이다.
[이외수 , 그는 1946년 음력 8월 15일 이른 아침에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날은 추석이라서 맛있는 음식이 풍성하고 식구들이 모두 모인 명절이고 보니 복 받고 태어난 인생이 아닌가. 그래서 이름을 외가에서 태어났다고 바깥 외(外)자를 따고 빼어날 수(秀)자는 항력을 딴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깥으로 빼어날 수 있는 훌륭한 인간이 되어 달라는 작명자(아버지)의 염원도 담겨져 있는 이름이다. 그의 생모는 국민 학교선생을 지낸 자상하고 인자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래서인지 잔정이 유별했고 자식에 쏟는 사랑은 도를 넘칠 정도로 지극했다. 그런데 병에 걸려 외수가 3살 때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외수는 자랄수록 영리해졌고 할머니를 엄마같이 좋아하고 따랐다. 물론 할머니의 사랑과 정성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외수는 만 여섯살 때 국민 학교 1학년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외수가 2학년 때 강원도 고성군 월미산 305고지 전투에서 적군 10여 명을 사살한 전공을 세워 무공 훈장을 받은 그 공과로 육군 본부로 전속되었다. 이때 대구 여자와 재혼했다. 그리하여 외수를 고향에서 대구 삼덕 초등학교로 전학을 시켜 새어머니와 같이 살게 하였다.
촌놈이 도시에 와서도 촌티가 나지 않았다. 입학 수속 때 선생님이 묻는 말에 또박또박 대답해서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그 학교 재적이 수천 명이고 한 학년이 십여 학급이 넘는데도 당당히 우등상을 받았으니 대견스럽고 자랑할 만한 일이었다.
외수는 이때부터 독특한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그림 그리기이다. 학년과 나이에 비해 착상과 표현력이 이만저만 아니게 돋보였다. 새, 고양이, 사람, 경치 등을 다 잘 그렸다. 교내 실기 대회에서는 물론 대회행사 때도 맡아 놓고 입선했다.
3학년 때부터는 또 다른 재능을 보였다. 글짓기에도 소질이 있어 동시와 산문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오늘의 소설가의 싹이 이때부터 트기 시작한 것 같다.
그러나 외수는 외로울 때가 많았다. 아버지가 군인이어서 잦은 전속으로 학교를 네 번이나 옮겼다. 친구를 사귀어 놓으면 떠나야 했으니까 어린 외수는 불만도 많았다. 외수가 다닌 학교를 열거해 보면 고향인 경남 함양군 상내백 초등학교, 대구 삼덕 초등학교, 강원도 화천군 신풍 초등학교, 강원도 양구군 양구 초등학교, 강원도 인제군 기린 초등학교 등이다.
외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천재'라는 말을 들어 왔다. 뿐만 아니라 정의감이 왕성하고 불의를 미워하고 평소의 생활이 정직했다. 어릴 때부터 화가를 희망했는데 부모의 복을 못 타고 나서 경제적인 뒷바라지를 못해서 그렇게도 소원했던 홍익대학교 미술 대학을 보내지 못한 것이 아버지로서 뼈를 깎는 아픔이었다.
그러나 외수는 실망과 좌절을 하기보다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개척했다. 그래서 오늘날 세상에 널리 알려진 소설가가 되지 않았는가. 아버지의 책임을 다 못한 죄책감을 가지고 내 아들 외수의 어린 시절을 더듬어 보았다.]
다음은 소설가 김성동이 밝힌 이외수 이야기이다.
[그는 내가 어떤 소설에서 만들었던 사내처럼 철저하게 말라서 오히려 황홀한 육체의 소유자였습니다. 얼마나 투철하게 자기 자신의 삶을 사랑했기에 저토록 마를 수가 있는 것인가, 문득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 이상한 작가 이외수와 나는 몇 군데의 술집을 더 다닌 끝에 이윽고는 바람 부는 여인숙에 쪼그리고 앉아 밤을 밝혔고, 이튿날까지 밥 대신 술을 들이붓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날밤 우리는 세 번째의 여관에서야 겨우 방을 자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그의 발 때문이었습니다. 방으로 들어가서 나는 우선 양말을 벗었는데 웬일인지 그는 그냥 구두를 신은 채였습니다. 잘 닦아 반짝반짝 윤이 나는 구두를 신고 있는 그에게 내가 말했습니다.
"아니, 왜 신을 안 벗고…" 그는 털푸덕 주저앉으며 이빨로 소주병을 벗겼습니다.
"벗었어"
"어…?"
가만히 보니 구두를 신은 게 아니라 그것은 때였습니다. 거짓말 안보태고 1센티 두께의 때가 양말에 쓸려 잘 닦은 구두처럼 빛나고 있는 것이었고, 그래서 나는 그가 구두를 신고 있는 것으로 착각을 했던 것입니다. 숙박계를 들고 들어오던 아주머니는 그 발을 보고 그만 "아이구머니나!"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방을 뛰쳐나갔고, 우리는 그곳을 쫓겨났던 것이며, 세 번째 집에서는 마침내 쥔아주머니가 떠다준 물에 그가 눈물을 철철 흘리며 발을 씻음으로써 겨우 쫓겨남을 면할 수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발만이 아니라 그는 세수도 양치도 하지 않는데, 이상한 것은 조금도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그가 획득한 어떤 '경지'일 것이며,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가 일부러 그런 기행(奇行)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고 발을 씻는 따위의 일상적 행위를 잊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밥도 잘 안 먹습니다. 최소한의 생존을 유지시켜 줄 수 있는 극소량의 밥을 어쩌다 겨우 먹을 뿐, 늘 술로 때웁니다. 졌다, 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그와 나는 함께 끌어안고 일주일 동안을 서울과 그의 거처가 있는 춘천(春川)에서 뒹굴었는데, 딱 한 투가리의 보신탕을 먹었을 뿐입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일상의 행위를 잊은 지가 한 6년쯤 되는데,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것이었습니다.
"병신 같은 새끼들. 자유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먹고살겠다고..."
그런가 하면 그는 무예(武藝)의 고수입니다. 중국집에서 나오는 대나무 젓가락을 들어 던지면, 5미터 전방의 철제 책상을 뚫고 지나갑니다. 내공(內攻) 또한 상당한 경지일 것으로 추측되며, 고스톱 따위의 투전을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선(先)을 잡을 수 있는 비법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따위는 모두 여담에 불과하며, 그의 본령은 역시 소설입니다.
혼의 소설을 쓰고자 하는 선열한 작가정신입니다.
아아, 다자이 오사무같은 사내. 이 시대 최후의 데까당. 이외수는 내게 끝없이 상처를 주는 참으로 이상한 사내입니다.]
다음은 방송작가 주영미가 쓴 내용입니다.
[탈고할 때까지 자르지도 '세탁'도 하지 않는 머리. 염력으로 구름 모으기, 나비 한 마리로 온 천지에 함박눈 내리기 등 엉뚱한 상상에 빠지기 일쑤인 사람. 걸레승려 중광, 작고시인 천상병과 함께 우리 시대의 마지막 기인으로 불리는 사람. 그는 실제로 도(道)에 관심이 많다. 의형제 이남이(가수), 김봉준(석공예가) 역시 생각이나 그 행색(?)이 비슷하다.
"머릴 감지 않아도 습관이 되면 가렵지 않아요. 때도 시간이 흐르면 비늘이 되고 더 시간이 흐르면 몸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사람은 씻지 않아도 스스로 자기를 깨끗하게 만들죠. 스스로 정화능력이 있는데 일부러 씻을 필요가 있습니까? 천성적으로 게으른 탓도 있지만 씻을 여유도 없었습니다."
참으로 가난했다. 어려서부터 참 많이 굶었다. 생라면 하나로 일주일을 때웠던 시절, 알맹이를 쪼개어 나흘을 버티고 스프를 물에 타마시면서 사흘을 견뎠다. 그래도 없으면 춘천 명동 전원다방 앞에서 네 알의 감자를 살 수 있는 20원을 구걸했다. 하루는 감자를, 다음날은 굶고, 그 다음날은 메뉴를 바꿔 동물성 '번데기'를 섭취했다. 겨울밤에는 홍등가를 찾아가 불동냥을 했다. 연탄불 앞에 모여 앉은 아가씨들 사이에 끼여들어 '고자'행세를 했다. 그런 그에게 술은 절망의 친구였고 고통의 연인이었다. '무박삼일'을 마셔야 직성이 풀렸다. 취하면 개집이나 쓰레기통에서 잠을 잤다. 그렇게 7년을 보냈다. 얼마 전 그는 젊은 날이 참담했던 기억을 비롯해 기인적 삶의 편력들을 수필집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에 담에 세상에 내놨다.
춘천에서만 30년이 넘게 살고 있는 그는 춘천의 안개, 닭갈비보다 더 유명한 인간 문화재이며 호수, 막국수와 함께 '춘천의 3수'로 불리기도 한다. 젊은 날, 그 혹독한 시절은 그의 육신에 반갑지 않은 흔적을 남겼다. "폐결핵에 네 번 걸렸어요. 폐 한쪽은 거의 없어요." 술도 전혀 하지 못한다. 비문증이라는 시력 저하증에 걸려 한쪽 눈도 '맛이 갔다'. 골다골증도 심하다. 담배만큼은 끊지 못해 하루 80개피를 피운다.
그의 작업실은 이른바 격외선실(格外禪室). 안에서는 열 수 없고 배식구가 달려 있는 육중한 형무소 문짝을 달아놓았다. 새로운 작품에 들어갈 때는 머리를 자르고 '수인(囚人)'이 된다. 그 안에서 독수리 타법으로 원고도 쓰고 채팅도 한다.
PC통신에 들어가 '내가 바로 그 이외수'라고 하면 '당신이 이외수면 나는 이태백'이라고 한다. 사실 활동중인 가짜 이외수가 세 명이다. 그의 아들도 보고 놀랐을 만큼 외모가 비슷한 가짜 이외수는 강연까지 하고 다닌다. 요즘은 그도 '내가 과연 진짜 이외수인가?' 헷갈리고 있다. 과연 그 가짜는 행복할까? 진짜 이외수는 행복해지기 위해 글을 쓴다. 두 아들을 사랑하고 마누라를 존경한다.
"누구나 지렁이를 혐오하지요. 한때는 내가 지렁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렁이를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한 마리가 먹어치우고 토해내는 흙의 양은 실로 대단합니다. 아무리 척박한 땅도 옥토로 만들어 놓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 물고기, 심지어 개미까지 지렁이를 공격하지만 아무런 방어체계도 없습니다. 오직 꿈틀거릴 뿐, 오직 '조금만 남겨달라'고 합니다. 몸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한 지렁이는 되살아납니다. 동강이 나면 두 마리가 됩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얼마나 도교적입니까?
꿈틀거릴 수 없는 자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자기의 존재를 부각시킬 수 없습니다. 항상 숨어있지만 끊임없는 꿈틀거림으로 소중한 존재, 전 지렁이를 존경합니다."]
다음은 이외수 스스로 밝힌 술에 대한 수필이다.
[ …기분 좋은 날 술을 마셔도 우는 버릇은 어쩔 수가 없다. 기분이 좋은 날은 기분이 좋다는 사실이 또 눈물겹기 때문이다. 대장부답지는 못하지만 고쳐지지 않는 것은 djEJgrp 하랴. 피도 눈물도 없는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 점차로 늘어나는 이 시대에 나는 그래도 눈물 하나만이라도 풍부하지 않느냐고 자위하면서 사는 수밖에.
그러나 기쁜 일로 마시는 술이건 슬픈 일로 마시는 술이건 내가 술만 입에 갖다대었다 하면 비교적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도망치기에 급급하다. 취하면 삼박사일이고 사박오일이고 합숙훈련에 들어가려 하기 때문이다.
나는 술의 종류에 따라 취하는 편이 아니라 같이 마시는 사람의 분위기에 따라 취하는 편이어서 어떤 사람하고 마시면 맥주 한 잔으로도 취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하고 마시면 맥주 한 상자를 다 마셔도 맨숭맨숭 취하지를 않는 수가 이Te아. 그러나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삼박사일 사박오일 고주망태가 되어 횡설수설하는 곁에 두고 다 받아줄 수은 없는 것이다. 진저리가 쳐질 것이다.
워낙 술을 좋아하다보니, 자연히 술값이 많이 든다. 좀 이름이 알려진 다음부터는 다행히 처음 가는 술집에서도 외상술을 곧잘 준다. 그리고 돈만 생기면 우선 술값부터 갚고 본다. 그러나 너무 취해 필름이 끊어져버리면 어디서 마셨는지 몰라서 못주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물론 극히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바가지를 씌운 집에 한해서는 날짜를 상당히 늦춘다. 억울한 마음이 사라질 때까지.
…의사들 말로는 건강이 너무 악화되어 술을 절대로 마셔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동안 변변치 못한 시정잡배들에게 기대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분들을 실망시키지 않으려면 당연히 좋은 글을 써야만 할 것이다. 그러자면 나사가 좀 빠져버린 느낌도 없지 않지만 건강이 좋아질 때까지 술을 끊어야만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울고 싶어라.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살아가기 힘든 이 세상이여.]
다음은 같은 수필에서 밝힌 무용담이다. 눈오는 크리스마스, 이외수와 후배 둘이서 며칠 굶고 술을 아껴 마시던 밤이었다.
[ … 그때 맞은편 탁자에서 술을 마시던 남자들이 자꾸만 우리에게 시비를 걸어오기 시작했다. 나와 흡사한 나이들이었다.
"자식들 문학 좋아하네."/ "순전히 구라들만 피우고 있구만."/ "요즘 애들은 버르장머리가 도통 없단 말씀이야." "문학을 해서 그런 모양이지."
말꼬리마다 물고 늘어지면서 모욕적인 말 한 마디씩을 던져왔다. 조금씩 이흥모가 흥분의 빛을 띠우고 있었다. 이병욱도 심상치 않은 눈치였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저 사람들 건달이래요, 건드리지 마세요." 여자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흥!" 그제서야 나는 코웃음을 뱉었다.
"새끼들아 문학이 밥 멕여주냐."/ "집구석에 들어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라." 이제 야지는 완전히 우리를 향해 노골화되어 있었다.
"아무리 나이가 나보다 많아도 저런 사람들은 사회적인 선배 대우를 해줄 수가 없어." 이병욱과 이흥모가 동시에 웃통을 벗고 있었다.
"남자답게 우리 밖에 나가 한판 붙읍시다." 이병욱의 말.
"건달이면 모가지가 두 개냐." 이흥모의 말.
"참으세요." 여자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리고 있었다. 나는 이제 내가 나서야 할 때라는 생각을 했다. 그들이 건달이라고 하지만 나도 그 바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만큼 알고 있느 터였다. 나는 조용히 일어섰다. 그리고 씹어 뱉듯이 말했다.
"늬들 하루만 살고 말 거냐." 그때 그들 중의 하나가 흠칫 몸을 사리는 듯했다. 내 손에는 이미 젓가락 두 개가 들리워져 있었는데 그는 혹시 순간적으로 그것을 칼로 오인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당신들 이 형을 몰라서 겁 없이 까부는 모양인데 오늘같이 좋은 날 괜히 눈알이라도 한 개 빠지지 말고 나가쇼." 이병욱이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어 다시 나는 경고해두었다.
"빨리 계산을 끝내고 나가주라, 난 전혀 살고 싶지 않은 놈이야. 늬들 둘이서 같이 죽어준다면 저승길이 심심치는 않을 거지만."
순간적으로 젓가락 한 개가 반짝 빛살을 튕기며 주방 베니어판에 날카로운 소리로 날아가 꽂혔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지만 그건 치기무쌍하던 때의 내 장기였다.
"자, 우리 조용히 앉아서 술이나 마시자."
우리는 조용히 앉아 다시 아까처럼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 그들은 그 술집 안에서 소리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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