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ㅂ-ㅇ)

이미륵(1899-1950, 황해도 해주)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17:35

이미륵(1899-1950, 황해도 해주)

 

 아래 내용은 김영신 기자의 글을 바탕으로 첨삭을 한 것입니다.

[이미륵. 1946년 자전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발표, 전후 독일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며 100여 곳이 넘는 언론에 서평이 게재됐고, 초판이 곧 매진되어 1950년에 재판이 나오는 등 선풍적인 인기를 누린 작품이다. 독일 중고등학교 교과서에까지 실렸다. 이 책은 1960년 전혜린에 의해 우리말로 변역 되었고, 이 작품의 2부로 생각되는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는 1973년 정규화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이미륵(본명 이의경, 미륵은 아명)은 1899년 3월8일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했다. 해주보통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인 18세부터 서울에 올라와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다니던 그는 3·1만세운동에 가담했는데, 일제의 탄압이 자심해지자 상해를 거쳐 독일로 망명한다. 1921년부터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과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의학공부를 했지만 건강이 나빠져 휴학한 뒤 뮌헨대에서 다시 동물학을 전공, 1928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이미륵은 자기의 전공분야보다 창작에 열중했다. 그는 주로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단편과 이야기들을 독일의 신문과 잡지에 발표했는데, 마침내 1946년에는 자신이 1930년대 중반부터 심혈을 기울여 집필해온 대표적인 자전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뮌헨의 피퍼 출판사에서 출간하게 된다.

 이 책은 대원어머니가 사십구 일 동안이나 미륵불에게 기원을 올려서 낳아서 이름을 미륵으로 짓게 된 까닭이며, 사촌인 수암과 보낸 소년 시절, 구식 교육과 신신 교육, 그리고 구한말에서 일제의 침략 시기에 이르기까지의 집안과 학교에서의 생활, 삼일운동에 가담한 후 일제 경찰의 추적을 피해 압록강을 넘어서 독일에 안착하기까지의 과정이 그려진 자전적 소설이다. 당시 서양인들에게는 아직도 낯설기만 했던 동양의 내면 풍경과 대면할 기회를 제공하는 책이었다.

 특히, 작가의 유년시절 묘사는 문화의 차이를 뛰어넘어 독일인들에게 인간본성에 대한 원초적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장롱 위의 꿀을 훔쳐먹다 들켜 혼난 일화며 손톱에 봉숭아 꽃물들이던 기억, 쑥뜸의 공포, 잠자리채 이야기 등은 아주 토속적인 한국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누구나 갖고 있을 유년에의 동경이었다.

 서울대 독문과 박환덕교수는 "패전후 물질적, 정신적으로 황폐해 있던 독일인들에게 '압록강…'은 단순한 자전소설이 아닌 인간적, 본원적인 것에 대한 갈망을 채워주는 작품으로서 국가나 민족을 초월한 감동을 줄 수 있었다. 또한 이박사의 독일어 수준은 독일적 정서가 살아 있고 카프카나 베른하르트에 견주어질 만큼 문장이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면서도 매우 뛰어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실제 이미륵은 삼일운동 직후 압록강을 넘은 뒤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이미륵에게 '압록강'은 우리의 정신적 고향이며 지주로서, 모든 우리의 감성과 사고가 비롯되는 근원의 강, 그 가슴 속에 항상 흐르고 있는 어버이 나라에 대한 향수와 정신적 발원지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50년 3월20일, 독일 뮌헨 근교 그레펠핑에서 이미륵은 숨을 거두었다. 오랜 위암 투병 끝의 죽음이었다. 그는 뛰어난 작가였고, 동물학자이자 동양학자였으며, 그를 아는 독일인들에게 친근한 이웃이자 친구요 존경받는 스승이었다. 나흘 뒤 그의 장례식날, 자리를 같이 한 200여명의 조문객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의 명복을 빌었다.

 이미륵의 작품세계 저변에 흐르는 주제가 한결같이 휴머니즘으로 귀결됐던 것처럼, 그의 따뜻한 인간성과 겸손한 생활자세는 그를 아는 많은 독일인들의 흠모와 사랑을 받았다. 30여년간 그를 후원한 자일러 교수 일가를 비롯해, 이미륵이 뮌헨대 동양학부 강사로 있을 당시 그의 강의를 우연히 듣고 의학을 전공하다 과를 바꿔 세계적인 한학자가 된 고 볼프강 바우어 교수의 일화 등은 그것을 증명하는 사례다. 또 10대에 일찍 결혼해 고향에 두고온 처와 두 자식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던 듯, 이미륵은 자신을 연모하던 독일여인들의 사랑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고, 유품 중에 유독 어린아이들과 기쁘게 놀아주는 사진이 많이 눈에 띌 만큼 아이들을 귀여워했다. 이미륵 사후 독일인 지인들은 '미륵 리 게젤샤프트'(이미륵협회)를 구성해 줄곧 그를 추모하는 모임을 가져 왔다고 한다.

 현재 이미륵이 국내에 남겨두고 떠났던 아들 딸 남매의 소식은 알 길이 없고, 누님의 손자인 이영래씨가 기념사업회 일을 돕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