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1948-, 서울->영양)
작가 이문열은 1948년 서울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원철(李元喆), 어머니 조남현(曺南鉉)사이의 3남 2녀 중 3남이었다. 그러나 그의 고향은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인데 그곳은 집성촌으로 그의 옛집이 있는 원리동에서 백 가구 가까운 일가가 지금도 살고 있다.
세 살 되던 해에 맞은 6·25와 아버지(서울농대 교수)의 월북, 그후 아버지는 망령처럼 그를 따라다니며 다치기 쉬운 유년시절을 온통 장악하고, 그의 가치관 성립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내 고향은 분명 영양군 석보면 원리동이지만 불행히도 나는 그곳에서 태어나는 인연을 갖지 못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천석 재산을 팔아 허망한 건국사업에 열중하시던 아버님 덕분에 내가 태어난 곳은 서울 청운동의, 지금은 헐려 버린 어느 아파트였다. 그리고 그 뒤로도 2년간 나는 서울거리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자라다가 세 살 때 6.25가 터지면서 어머님의 친정인 영천을 거쳐 고향에 돌아가게 되었다. 갑자기 가장을 잃고 어린 5남매와 시어머니만 남게 되자 아직도 팔리지 않고 있던 고가와 전답에 의지하기 위해 어머님께서 주장하신 귀향이었다." -산문,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중에서
1953년 안동으로 이사하여 1954년 안동 중앙국민학교에 입학했다. 국민학교 4학년 무렵 서울로 이사하여 종암 국민학교를 다녔고 또 밀양으로 이사하여 밀양 국민학교로 전학하는 등 안동, 서울, 밀양을 떠돌아다닌다.
"밀양은 여러 가지로 내게는 감회어린 도시다. 내가 밀양으로 간 것은 열 살 때이고 떠날 때가 열네 살 때였으니 가장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절을 그곳에서 보낸 셈이다. 내 애틋한 유년의 추억은 거의 밀양에서의 것이고 내 친구의 대부분도 그때 사귄 친구들이다. 이제는 만난 지가 40년이 가까워 오는 친구들. 거기다가 그곳에는 내게 유일한 졸업장을 준 밀양국민학교가 있다."
밀양중학교를 한 학기 다니다가 중퇴한 그는 고향에 돌아가서 3년 동안 큰형을 도와 황무지 2만평을 개간하는 일을 도우며 지낸다. 그 후 검정고시를 거쳐 안동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큰 이유 없이 학교를 중퇴하고 끝없는 유적이 다시 시작한다.
"나는 그 편지(형에게 보낸 것)에 우선 목적 없는 내 떠돌이 생활의 쓰라림과 서글픔을 은근하게 과장하고, 속절없이 늘어만 가는 나이에 대한 초조와 불안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내 믿음과는 달리 정말로 그때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벌써 어른들처럼 머리를 길게 길러 넘기고 어른들의 옷을 입고, 술이며 담배 같은 어른들의 악습과 심지어는 시시껄렁한 타락까지 흉내내고는 있었지만 나이로는 여전히 아이도 어른도 아니었으며, 정규의 학교과정은 밟지 않고 있었으나 또한 책과 지식과는 완전히 벗어난 생활도 아니어서 학생이랄 수도 건달이랄 수도 없었다. 당시 내 깊은 우려 중의 하나는 이대로 가다가는 평균치의 삶조차 누리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것도 솔직하게 썼다." -하구중에서-
이처럼 이사와 전학을 수없이 다닌 이유에 대해서 이문열은 이렇게 말했다.
"전체적으로 나의 시대 즉 70-80년대는 나를 뿌리내리게 할 수 없던 시기였다. 집안의 특수한 이유(부친의 월북 및 좌익사상가)로 인해 한곳에 머무르기 어려웠다. 당시 우리 가족은 연좌제 그늘에서 벗어나기 힘들었고, 경찰 당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소리없이 이사를 자주 다녀야 했다. 몰래 이사를 하면 우리가족은 경찰이 우리를 찾는 그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사를 자주 해야만 했고, 어머님은 무자비한 제재의 공포에 많이 떠셨다."
1965년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부산으로 가출해서 건달로 지내다가 1967년 반년쯤 중병을 앓고서야 대오각성하여 대학진학 준비를 했다. 1968년 대입검정고시를 통해 서울대 사대 국어교육과로 진학했다. 첫해는 작가가 될 것을 결심하고 사대문학회에서 열을 올렸으나, 1969년부터 고시 준비를 시작했다.
1970년부터 73년까지 거듭되는 낙방으로 꽤 울분에 찬 실의의 세월을 보냈다. [사람의아들],[사라진거을 위하여],[이 황량한 역에서],[달팽이의 외출] 등은 그 무렵의 작품들이다.
1973년 고시도 안되고 문단데뷔도 실패하자 결혼과 동시에 군에 입대하여 통신보급병으로 서울과 서부전선에서 근무하였다. 1976년 군에서 제대한 후 대구의 학원가를 강사 노릇을 하며 전전했다. 단편 '나자레를 아십니까'로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입선한 후 1978년 매일신문사 22기 기자로 입사하여 편집부에서 줄곧 근무했다.
1979 중편[새하곡]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한때 출판사에 보냈다가 문전박대 당한 장편소설 [사람의 아들]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면서 인기작가가 되었다. 현존하는 한국작가들에게 수여하는 상이란 상은 거의 모두 수상하였다는 점에서도 그의 인기는 입증된다. 1979년 [사람의 아들]로 오늘의 작가상을 1982년 [금시조]로 동인문학상을 1983년 [황제를 위하여]로 대한민국 문학상을 1984년 [영웅시대]로 중앙문화대상을 1987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이상문학상을 1992년 [시인과 도둑]으로 현대문학상등을 수상하였다. 1992년에는 정부에서 문화분야에서 크게 이바지한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대한민국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문열의 작품은 외국어로 번역되어 해외에서도 널리 읽히고 있다는 점에서도 동시대의 다른 작가들과는 구별된다.
작가가 된 동기는 희망이나 동경 때문이 아니라, 어떤 불길한 예감에서 소설가가 되었노라고 고백한다. 마치 방울뱀이나 다람쥐가 적과의 긴장을 이기지 못하면 스스로 자신의 몸을 내던져 버리는 것처럼 자신도 삶의 긴장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작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영남 사대부 가문에서 오는 유전적 요인, 글을 좋아하고 상상세계에서 위안을 찾으려는 타고난 기질, 남달리 큰 가치박탈과 소외를 체험한 환경적 요소, 실패로 끝난 젊은 시절 사랑 등을 들기도 한다.
최근에 있는 한 대담에서 그는 "기본적으로 내가 던져져 있는 상황은 고통과 외로움이었고, 그것을 잊기 위한 가장 좋은 수단으로 택한 것이 글쓰기란 것"이었다고 고백한다. 글을 쓰면서 삶의 괴로움을 상기하는 데에서 느끼는 고통보다는 글을 쓴다는 행위자체로 덜어지는 고통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문열이 이렇게 수동적 운명성으로 끌려 다니는 것에서 능동적 도전을 다짐하게된 것은 오래지 않아서이다. 그의 일기장에서 <설령 내가 찬란한 우주를 빚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한 송이 향기로운 꽃쯤이야 피울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게 내 모든걸 바쳐 얻은 것이라면 한 우주에 갈음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는 생각을 내보인다.
1984년 세종대 정교수로 취임했다가 삼 년 후 그만두게 되었다. "84년부터 87년까지 3년동안 강단에 섰다. 강단에 서기전 대학에 대해 계획과 기대가 컸었는데 작가와 교수의 삶을 양립하기가 어려웠다. 이문열이란 작가는 사회적 이미지가 크기에 내가 강단에 서기가 부담스러웠고, 강의를 앞두고 강의준비를 해야 하는 어려움이 많아 강단을 떠난 것이다."
그후 그는 경기도 이천에 창작실(부악문원)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집필활동을 시작한다. "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7백평, 강당 2개, 숙사 15곳, 장서 1만 5천여권등을 갖추었다. 매년 5명을 선발해 3년동안 숙식제공과 교육을 하며, 주로 한문과 영어를 가르친다. 부악문원이란 이름은 건물이 들어선 뒷동산의 옛명칭인 부아악에서 따왔다. 한편으로는 이곳이 도산서원처럼 되는게 소원이다. 아마 나를 지켜주는 울타리같은 존재일 게다. 도산서원에서 가장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누구보다 퇴계 이황 자신이라고 하는데 나 또한 여기서 창작 집념을 불태우며 공부하고 싶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고정 독자를 갖고 있는 대표적 소설가. 그의 작품 중 가장 안 팔렸다는 『시인』의 판매부수가 20만 부이며, 착실히 모으지는 못했지만 인세수입 총액은 100억원에 육박한다. 문학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그 이상 성공한 작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문열 문학에서 주목할 점은, 우리가 역사에서 혹은 종교에서 혹은 학문에서 흔히 빠질 수 있는 이데올로기나 신념이나 이론체계에 대한 섣부른 믿음을 끊임없이 경계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진보적 문인들로부터 종종 `지식인의 회의주의`로 비판받기도 했으나, 지식인 사회의 주된 흐름에 반기를 들고 그에 대한 반성과 회의의 기회를 제공해왔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당신들은 내 전망의 결여를 걱정하지만 나는 오히려 지나치게 무성한 당신들의 전망을 걱정한다. 당신들은 내 무이념을 의심쩍어하지만 나는 또한 오히려 당신들의 이념 과잉이 못 미덥다.”-[변경] 중에서
훗날 작가가 된 인철의 말에서 보듯 작가 이문열씨는 이념과 전망, 진보 따위에 지극히 회의적이다.“내 정신은 어렸을 적부터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에 대한 혐오와 부정 속에 자랐다”는 [변경] 속 구절은 그같은 보수적 세계관이 `아버지 콤플렉스'로 요약되는 가족사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작가를 두고 보수적이라고 보는 견해에 대한 이문열의 답변이다.
"난 급진을 싫어한다. 불완전한 현대의 문제점과 지적을 한편으로는 인정한다. 진보에 유행처럼 휩쓸려 행동하지 않았음 하는게 나의 바람이다. 그리고 보수란 말이 우리나라에서는 나쁜 편견으로 자리잡고 있는것 같다. 보수란 안주하는 태도가 아니다. 보수나 진보나 완전하지 않은 현실 또는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내가 바라보는 보수는 새로 만드는 것보다 현재를 이루어낸 과거 사람들의 시간, 고민, 고환(苦患),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재는 바보와 악당들이 이뤄낸 것이 아니라 옛사람들의 노고와 눈물이라는 것을 잊지않으려 할 뿐이다. 언젠가 프랑스인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사람에게 “당신네 나라들은 보수란 말을 들으면 어떤걸 떠올리는가?”라고 물으니 보수란 침착, 성실, 인내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보수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이문열에게 글쓰는 재주 말고 하나를 더 꼽는다면 「暴飮(폭음)」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요즘은 「절반 폭음」으로 폭삭 내려 앉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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