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연(1206~1289, 경산)
아래는 신정일의 글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일연은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경산시 압량면 유곡동에서 1206년(희종2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언필이었고 어머니는 이씨였는데, 아버지가 특별한 벼슬을 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아버지 김언필이 일찍 세상을 떠났고, 일연은 홀어머니 이씨에 의해 길러졌다.
일연이 태어나기 전 어머니 이씨는 하늘에 떠 있던 해가 지붕을 뚫고 방안으로 들어와서 몸을 환히 비추는 꿈을 꾸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 밤에도 부인은 똑같은 꿈을 꾸었는데, 이런 일이 있은 후 이씨 부인은 옥동자를 낳았다. 이 아이가 바로 일연이었다. 일연의 처음 이름은 견명(見明)이다. 광명의 상징인 태양에 인연해서 세상에 나왔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었고, 일연은 뒤에 바꾼 이름이다.
일연은 아홉 살 되던 해 부모의 슬하를 떠나서 속세를 등지고 출가한다. 일연이 처음 찾아간 절이 해양 무량사였다. 지금의 전남 광주에 해당하는 해양 무량사는 우리나라 선종의 뿌리를 이루는 가지산문의 한 말사로 추정되고 있을 뿐, 정확한 위치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일연이 정식 승려로 입문한 것은 14세 되던 해 강원도 설악산 진전사에서 였다. 대웅스님에 의하여 머리를 깎고 정식으로 승려가 된 일연은, 이때부터 여러 산사를 순례하며 수도에 힘썼다. 일연이 가는 곳마다 그의 깊은 선리와 높은 법담이 널리 알려졌다. 고종 6년 일연의 나이 22세에 승과에 나아가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 일연은 고향에 가까운 포산(비슬산) 보당암으로 옮겨 수도에 전념했다. 고종 23년 가을 몽고병이 두 번째로 남침하여 전 국토가 또다시 그들의 말 발굽아래 유린되었고, 그때 참선 수행하여 득도한 일연은 조정으로부터 삼중대사라는 승계를 받았다.
고종 36년에 그때의 실력자 최우의 처남 정안의 요청에 따라 남해 정림사로 자리를 옮겼다. 1259년(고종 46년)에 대선사가 되었고, 임금의 부름을 받아 강화도 선월사에 머무르면서 목우화상 지눌의 법을 계승하였다. 1268년에는 조정에서 선종과 교종의 고승 100명을 개경에 초청하여 해운사(海雲寺)에서 대장낙성회향법회(大藏落成廻向法會)를 베풀었는데, 일연으로 하여금 그 법회를 주관하게 하였다. 그의 물 흐르는 듯한 강론과 설법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감화시켰다. 이후 오어사와 인흥사를 거쳐 임금의 명으로 운문사에 머무르면서 선풍을 크게 일으켰으며, 이때부터 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1282년 가을 일연은 다시 왕도인 개경으로 갔다. 그는 충렬왕의 간곡한 부름으로 대전에 들어가 선을 설하고 개경의 광명사(廣明寺)에 머무르면서 왕실 상하의 극진한 귀의를 받았다. 이듬해 3월 국존(國尊)으로 책봉되었다. 임금의 스승인 왕사가 된 데 이어 나라의 스승인 국사가 된 것이다. 이해 4월 왕의 거처인 대내에서 문무백관을 거느린 왕의 구의례(구衣禮 : 옷의 뒷자락을 걷어올리고 절하는 예)를 받았다.
그러나 일연은 온갖 영화를 누릴 수 있는 화려한 서울 생활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일연은 국존이 된 이후 왕경에 그렇게 오래 머물지 않고 인각사로 내려간다. 원에 복속되면서 환도한 개경의 상황은 오랫동안 수행에만 전념했던 일연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분위기였을 것이다. 그리고 가까이에서 어머니를 봉양하고자 하는 일연의 바람도 작용했다.
이후 일연은 군위 인각사에서 두 번에 걸쳐 구산문도회를 개최하였다. 인각사는 일연이 노년에 노모를 지극히 봉양하면서 삼국유사를 비롯한 각종 저서를 저술한 곳이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써서 펴냈던 때는 그의 나이가 여든 살이 넘어서였다.
84세 되던 해 7월 8일 새벽에 제자들을 모은 후 "내가 오늘 갈 것이다."라고 말한 후 입적했다. 그해 10월에 인각사 동쪽 언덕에 탑이 세워 졌고, 6년 후 비를 세웠다.]
다음은 삼국유사에 대한 김정숙의 글이다.
[『삼국유사』는 '遺事'라는 이름에서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삼국사기』에서는 볼 수 없는 많은 고대 사료들을 수록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고조선에 관한 서술과 단군신화는 단군을 국조(國祖)로 받드는 근거를 제시해 주는 기록이다. 그 밖에도 많은 전설·신화가 수록되어 있다. 특히 향찰로 표기된 14수의 향가(鄕歌)가 실려 있어, 향가의 실증(實證)에 있어서도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
『삼국유사』는 당시의 민속·고어휘·성씨록·지명 기원·사상·신앙 및 일화 등을 대부분 금석(金石) 및 고적(古籍)으로부터의 인용하여 집대성해 놓은 생생한 자료집이다. 또한 『삼국유사』는 『삼국사기』가 편찬 당시의 유교적 가치로 말미암아 누락시켰거나 재해석한 고기(古記)의 기록들을 보다 원형대로 수록한 데에 그 특색과 가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육당 최남선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야 될 경우를 가정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것”이라고까지 했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승려가 개인적 차원에서 편찬한 책이어서 간혹 인용 전적(典籍)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도 있고, 잘못 전해지는 사적을 그대로 모아서 수록한 곳도 눈에 띈다. 또한 그의 활동 범위가 주로 영남지방 일원이었다는 제약 때문에 불교 중심 또는 신라 중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북방계통의 기사가 소홀해졌다는 등의 단점도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개인이 저술한 책으로서, 조정에서 편찬한 『삼국사기』와 더불어 민족사에서 그 가치를 서로 보완하고 있는 책이다.
일제시대 중국 내에 망명하고 있으면서 조선상고사를 저술했던 신채호는 이렇게 한탄했다. "내가 『삼국유사』를 한번만 더 얻어 볼 수 있다면, 글을 완성시킬 수 있을텐데, 10년이 흐르도록 그 기회가 오지 않았다." 일연이 사마천처럼 책을 남기기 위해 살았는지, 지성의 고뇌가 책으로 남았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그는 사회가 동요하던 시대 수도생활과 저술로 자신의 삶을 살았다. 그리하여 그 뒤 많은 사람이 그가 남긴 기록에서 시대의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 일연의 삶은 오늘날과 같은 동요의 시대 지성의 의무가 무엇인가를 묻는다. 80을 바라보는 노인은 무엇 때문에 열심히 과거를 적어 놓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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