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ㅈ-ㅎ)

정완영(1919-, 경북 금릉)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22:01

정완영(1919-, 경북 금릉)

 

아래 내용은 김중근 기자의 글에서 발췌했습니다.

정완영은 1919년 경북 금릉에서 출생했다. 호는 백수(白水)이다. 1960년국제신보 신춘문예 등단 이후 60여 년동안 <오동잎 그늘에 서서>, <나뷔야 靑山 가자>, <백수산고>, <고희기념시화집> 등 10여권의 시집과 산문집을 냈다.

 이 땅의 정신과 정서와 삶의 가락이 담긴 시조 짓기에 평생 전념한 시조시인 정완영 옹은 “사람은 늙었지만 시(詩)는 어립니다. 오늘도 3장6구 속에서 헤메고 있을 뿐 아직까지도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어요”라는 말로 60년 시작(詩作)활동을 간추린다.

 고향, 자연 그리고 사찰을 주로 시조에 담아온 정옹은 시조를 사랑하고 시를 즐겨읽는 사람들은 민족을 사랑하고 불교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정완영 옹은 우리 국민의 정신적 고향인 사찰마다 시비가 많이 있었으면 한다.

 “시(詩)라는 한자를 풀이하면 말씀(言)과 절(寺)입니다. ‘말씀의 도량’으로 시는 곧 부처님 말씀이란 뜻이지요. <법구경>을 비롯 모든 경전들이 게송으로 되어 있습니다. 구경에는 시와 불교가 하나가 됩니다. 세계의 수많은 종교 가운데 불교가 가장 높은 시적 경지에 다다르고 있기 때문에 인류 최고의 이상적인 만다라를 이룰 수 있습니다. 불교자체는 시의 덩어리이며 매장량이 무궁무진합니다. 시의 정신이 불교인 것처럼 부처님의 옷자락은 넓습니다.”하고 말하거나,

  “절 입구에 백가지 풀이 부처님의 어머니라는 ‘백초시불모(百草是佛母)’를 새겨 놓으면 누가 함부로 자연을 파괴하겠습니까. 자연히 엄숙하게 되지요. 이것이 불교이지 법문만 듣는 것이 불교는 아닙니다.”

 라고 말하면서 불교적인 내용의 시 한수가 한 인간의 생애에 변혁을 일으킬 수 있고 만인을 교화시키며 또 그 자체가 화두가 되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시인은 진인(眞人·참사람)이 되어야 하고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왜일까. 시는 부드러움, 여유, 타이름, 치유라는 근본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과 시정신이 사라지면 세상은 복잡한 아수라의 세계가 될 수밖에 없다. 시를 많이 읽고 시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가 행복하고 건전한 사회이고 그런 곳은 곧 정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살이는 문명이 발달할수록 여유가 없어지게 되지요. 옛날에는 한끼 양식만 있어도 여유가 있었는데 요즘에는 10년 먹을 양식이 있어도 여유가 없습니다. 시정신이 생활에서 상실됐기 때문입니다. 또 시는 거칠어지고 굳어지는 것을 부드럽게 순화하고, 생활에 여유를 주며, 정신에 든 병을 말끔히 치유해 줍니다.”

 이처럼 그는 시를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문학장르로 꼽는다.

“내적인 수행과정을 거치면 선사들처럼 오묘한 깨달음의 세계가 열리지요. 이때가 되면 시적 감흥은 손자가 할아버지 품에 사랑스럽게 안기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다가오게 됩니다. 이 순간 문자를 매개체로 종이에 옮겨 놓는 것이 시인이지요.” 라고 말하면서,

 “그런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시인은 끊임없이 내적인 수행과 정화를 통해 우주의 진리를 자유자재로 요리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완영 옹의 아호는 백수(白水). 글자의 뜻대로 하면 ‘흰 물’이다. ‘검은 물’이 오염되었거나 혼탁한 물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흰물’은 깨끗한 물, 오염되지 않은 물, 아니 세속의 때를 씻어내는 물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백수 정완영 옹은 ‘흰 물’처럼 맑고 조용하고 정갈하다.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정갈함을 잃지 않기 위해 그는 52년 동안 매일 일기형식의 글을 쓰고 있다. 이런 그의 심적 정화작업으로 인해 태동한 시어들은 혼탁한 겨레의 가슴을 맑히고 있다.

 깨달음에 이른 시인의 시는 소리로 화하여 꽃이 되고, 꽃이 그대로 세상이 되고, 그것이 온통 삶임을 깨닫는 조화로움을 보여준다. 그래서 시는 속세인에게는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하지만 뭇사람들에게 어둠을 밝히는 지혜의 등불처럼 환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마치 확철대오한 선사들의 오도송처럼.

 그의 시는 고향에 대한 동경과 지극한 부처님의 자비심으로 향한다. 인간의 고향이 속세의 현상학적인 것들과는 멀리 있는 것이어서 늘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문답하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버려진 인간성을 다시 찾고자 흐트러진 심중에 늘 불심을 다지며 시상에 빠져있다. 그의 이러한 휴머니즘은 자연의 목소리이며 곧 부처님의 목소리이다.

“문지방에 드리운 산그림자 아무리 쫓아도 안나가고, 마당에 드리운 달그림자 아무리 비로 쓸어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제는 무엇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어요. 그저 순리대로 겸허하게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어요.” 가을을 맞아 조계사 근린 수송공원으로 산책을 나온 원로시인 백수 정완영 옹의 심경이다.

 

 다음 내용은 송정란 시인이 정완영 옹을 인터뷰한 내용 중 일부입니다.

 관악구 남현동은 원래 오노촌(五老村)이라 불리운 곳이다. 미당 서정주 시인과 소설가 황순원 선생, 연극인 이해랑 선생, 아동문학가 이원수 선생까지 다섯 분의 원로 예술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그러나 몇년 사이 모두 세상을 떠나시고 이제 정완영 시인만이 이곳을 지키고 계신다. 오피스텔에서의 독거(獨居) 생활이 외롭지 않으신지 조심스레 여쭈어보았다. 근처에 큰아드님이 살고 있어 바깥 약속이 있을 때 외에는 그곳에서 식사를 하시고, 밤에는  대학졸업반인 손주가 와서 함께 잔다고 했다. 시라는 든든한 동반자까지 있으니 적적하시진  않으시겠다고 했더니, 시인은 자식이 아무리 많아도 아내 없이 혼자 사는 일은 외로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시조를 쓰기 시작한 지 20년만에야 문단에 등장한 시인. 이미 500여 편에 이르는 작품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것도 일정 수준 이상에 다다랐을…. 시인이 들려준 늦깎이의 변은 다음과 같다. 심사라는 통관의례를 거쳐 등단하고 싶지 않았던 문학청년으로서의 혈기왕성한  치기와 누가 감히 내 시를 심사할 수 있는가 하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오만이었다고.(그것이 교만이나 거만으로 바뀌면 안 된다고 덧붙이면서) 시인은 본격적인 시조 창작의 시기를  23세 때인 1941년으로 잡는다. 경북 상주에 있는 조선철도자동차주식회사 영업소 주임으로  근무하고 있었으며, 시조 창작으로 일본 경찰에게 고문을 받았던 해이다.

 이때는 일제의 핍박이 심해졌던 시기로 한글로 시를 짓는 일은 사상범에 해당할 만큼 큰 죄였다. 게다가 집에는 조선어사전을 비롯, 임화나 윤곤강, 이용악, 이태준 등의 문학 서적들이 잔뜩 쌓여 있었으니 일제가 말하던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심한 고문을 받아 지금까지 손과 팔을 사용하는 데 불편함을 느끼는 후유증이 있다고 하신다. 해방을 맞아  목숨을  부지했으나, 해방된 조국은 또다시 좌우익의 갈등으로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신탁반대운동이니  대구폭동이니 하여 시국은 한시도 잠잠한 날이 없었고, ‘말이 없이 여위어가는’ 조국에  대한 안타까움은 「조국」이라는 시로써 형상화되었다.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애인 사랑// 손 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 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 메이면/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 맺힌 열 두 줄은/ 구비 구비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이/  학처럼만 여위느냐.] ―「조국」  전문

 조국으로 표상된 ‘청산’을 향해 시인의 마음은 ‘가얏고’가 되어 애절하게 울리고 있다  달이 떠오르는 진양조에서 통곡에 이르는 휘모리까지 가얏고의 울림을 따라 조국에 대한  시인의 사랑은 한층 고조되어 간다. 그러나 통곡도 다 못할 정도로, 피가 맺히도록 온마음을  다해 조국의 평화를 기원하지만, 조국은 학처럼 여위어가며 시인을 절망하게 한다. 시인의  불길한 예감은 그대로 적중하여 이 시가 씌어진 2년 후에 6·25전쟁이라는 민족 상잔의 비극이 일어났던 것이다.

 “시조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보통학교 4학년 때였지. 안동사범을 갓 졸업한 이위응(李渭應) 선생께서 부임해 오셨는데 대단한 민족주의자셨지. 선생께서는 일주일에 두 시간만 있는 조선어 시간이면 칠판에다 시조를 쓰시고는 큰소리로 읽어주셨어. 시조를 통해 우리들에게 민족의 혼을 불어넣어주려고 애쓰신 분이셨어.” ‘

 동창이 밝았느냐’ 등의 옛시조를 그때 처음 알게 되었으며, 건성이었던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시인은 열심히 몰입하여 시조를 배우고 창작을 했다고 한다. 그러한 시인을 이위응  선생이 유달리 아끼고 사랑했음은 물론이었다. 그러나 한글로 시를 짓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큐슈 출신의 일본인 담임에게 받은 박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변소청소를 도맡아 하면서  혹독하게 검사받았고, ‘커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이 될 거라며’ 늘 꿀밤을 맞아야 했다. 그럴수록 내성적이면서 자존심이 강했던 시인은 더욱더 시조창작에 매달렸고, 일본 역사(당시  국사)  시간에는 몰래 학교를 빠져나가는 등 반항적이 되어갔다. 이위응 선생은  ‘네가 쓸모가 있는 놈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핍박받는 것’이라며 늘 시인을 북돋아주곤  했다고 한다. 뒷날 시인이 시조창작으로 일제의 고문을 받게 된 것도 어린 시절부터 이러한  민족의식과 저항의식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위응 선생은 1년만에 다른 학교로 전근갔는데, 아무리 수소문해도 찾을 수 없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선생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영어(囹圄)의 몸이었으며  이름도 이상헌(李商憲)으로 개명했던 것이다. 해방후 부산대 교수로 재직중이던 선생은 시인이 국제신보에 당선하자 연락을 취해왔다. 당신의 제자를 시인의 집으로 보내 시조를 배우게 했으며, 대구에서 김춘수 시인의 사회로 열렸던 시인의 첫시집  출판기념회에는 비행기를 타고 직접 오셔서 축하해주셨다. 그리고 송구스럽게도 시인에게 선생’이란 존칭을 쓰며  예대했는데, 몸둘 바 모르며 아무리 사양을 해도 제자를 넘어서서 한 사람의 시인으로 대접해 주셨다고 한다. 참으로 크고 넓은 도량을 지닌 분이 아닌가 한다.  

 “시인은 자신의 작품세계에 긴장하지 말고 스스로에게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해. 작품에다 힘을 쓰는 건 남에게 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무슨 말이냐 하면 자기자신의 정신세계를  늘 긴장시켜 깊이 있게 하면, 그것이 시에서는 술술 쉽게 풀려나온다는 거지. 그런데 스스로를 닦지 않으면서 시에서만 깊이를 주려다보니 시만 어려워지고 제대로 써지지 않거나 거짓으로 씌어지게 되지.” 나이가 들수록 시적 긴장이 현저히 떨어지는 대부분의 시인들에 비해 여든이 넘도록 끊임없이 질량감 넘치는 시들을 발표하고, 그 시들을 줄줄 암송하는 시인의 모습은 바로 내면 성찰의 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기에 시와 시인 모두가 5,60대의  장년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닐까.

 시인의 호인 백수(白水) 역시 시인의 정신적 지향점을 잘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호는 누가 지어준 것인지 궁금해하자 스스로 붙인 것이라 하신다. 고향인 김천(金泉)의‘泉’을 떼어놓으면 ‘白水’가 되니 고향을 뜻하기도 하고, 3년 동안 물을 길어 먹지 않으면 폐정(閉井)되는 것처럼 맑은 물이란 자꾸 퍼내어야만 솟아오른다는 뜻에서 백수라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시인은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도록 끊임없이 자신의 정신과 영혼을 담금질해 왔을 것이다. 43년부터 시작된 일기 쓰기를 지금까지 계속하고 계신 것도 자신을 정화시키기 위한 방편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인은 민족 시형(詩形)인 시조에서조차 한국적인 것에 관심을 갖지 않는 세태를 걱정하면서, 창작에 도움이 될 거라면서 시조작법을 받아 적으라고 하신다. 노트를 펼쳐 들고 시인이  불러주는 대로 적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시조는 정형시이므로 정형을 지켜야 한다.  어쩌다 파격을 하는 경우, 그것은 하나의 파격으로 열을 얻을 수 있을 때이다. 둘째, 가락을  살려 써야 한다. 시조에는 흐름(流)이 있고, 굽이(曲)가 있고, 마디(節)가 있고, 풀림(解)이  있다. 그 리듬감을 터득해야 한다. 셋째, 작품을 쓰기 위한 과정에서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천착해야 하나, 작품은 쉽게 써야 한다. 마치 무쇠가 용광로에 들어가 부글부글 끓지만 나올  때는 식어 있는 것처럼 거죽은 서늘하고 속은 뜨거워야 한다. 넷째, 격조를 높여야 한다.  사람에게 인품이 있듯 시에도 격이 있어야 한다. 다섯째, 시 정신이 경직되지 말아야 한다.  45자 안팎으로 고정된 시조의 틀을 너무 의식하지 말고 명징한 내용으로써 형식을 뛰어넘어야 한다.

 시인께서 일러주신 시조작법을 창작의 소중한 지침으로 간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인의  배웅을 받으며 전철역으로 항하면서 오피스텔과 시인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