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비석(1911-1991, 평북 의주)
1911년 5월 21일 평북 의주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서죽(瑞竹)이다. 1927년 신의주중학 재학 때 학생 독서회 사건으로 검거돼 신의주 형무소에서 만 1년간 복역한 뒤 출감했다. 29년 일본 히로시마의 구산중학교를 마치고 니혼대학 문과에 입학했다. 재학중 일문으로 쓴 소설 <고향의 편지>가 <문학신문>에 당선되었다.
1935년 <동아일보>에 시 '어린 것을 잃고', '저 언덕'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193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성황당>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소설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매일신문 기자(1940), 중앙신문 문화부장(1946)을 역임했으며, 1950년대 초 이후 전업작가로 일관했다. 1954년 <자유부인>을 <서울신문>에 발표했는데, 그 파격적인 내용으로 인한 파장이 상당했다. 1956년 한형모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인기를 끌기도 했다. 주인공인 대학교수 부인이 욕구불만으로 가출을 하고, 불륜으로 치닫는다는 설정과 제자 여대생의 교수에 대한 사랑 등의 내용이 사회적인 큰 이슈로 떠올랐다. 당시 '사회의 도덕성'을 문제로 서울대 법대 교수 황산덕과 저자 정비석 사이에 논쟁을 벌여 더욱 유명해졌다. 문단에서도 대중소설과 순수소설을 둘러싸고 열띤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황산덕은 이 소설을 가리켜 대학교수를 모욕하고 있다며, '저속 유치한 에로 작문을 희롱하는 문화의 적이요, 문학의 파괴자요, 중공군 50만 명에 해당하는 조국의 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라고 했다. 정비석은 황산덕 교수의 힐난은 문학자를 모욕한 것이며, ‘탈선적 폭언’이라고 대응했다. 정비석은 <자유부인> 이후 <삼국지>, <초한지> 등 많은 소설을 발표하고 펜클럽 회원으로 국제적 행사에 다수 참가하였다.
1983년엔 신문에 연재되었던 <소설 손자병법>을 고려원에서 간행했는데 그의 생애 마지막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정비석은 평소 ‘소설은 읽혀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재미있어야 한다’는 소설관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50여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원고지를 메운 철저한 장인정신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1991년 10월 18일에 사망했다.
정비석은 바둑 애호가이기도 했다. 시인 구상(具常) 씨와는 수십 년을 두고 바둑 라이벌로 아웅다웅했다. 바둑 말고도 마작, 장기, 투전, 화투, 포커 등 웬만한 잡기엔 두루 능했다. 한때 마작에는 하루 건너 밤을 세울 정도로 미쳤던 시절이 있었다고 술회하면서 "마작과 포커 같은 잡기는 스릴이 대단하기는 하지만 돈을 걸지 않으면 아무 재미도 없는 싱거운 노름에 불과하다. 그러나 바둑은 금품을 걸지 않고도 흥미 진진하게 즐길 수 있는 데에 큰 매력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국민문학》(43.4)의 <국경>이라는 수필에서 "내가 살고 싶은 곳은……이 내 나라 일본밖에 ……이 지구상의 단 한 곳의 낙원……조국 일본이 아니면 안 된다"고 했을 정도로 친일본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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