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만식(1902-1950, 전북 옥구)
표지석 하나만 남아 있는 지금의 생가터 자리인 옥구군 임피면 취산리 31번지에서, 채만식은 부친 규섭과 모친 조우섭 사이의 6남 3녀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때만 해도 부친 규섭은 상당한 부농이었다고 한다.
6남 3녀의 다섯째라고는 하나 일찍이 두 남매를 잃어 막내아들이나 다름없었던 채만식은 모친 조씨의 자별한 사랑을 받고 자랐다. 송하춘 교수는 그가 어머니로부터 받아왔던 '격리보필'의 영향이 과도한 자존심을 형성케 했을 거라고 보는데, 뒷날 '남의 집에 가서 밥을 먹을 때도 숟가락을 닦아서 사용했다거나 얘기하는 도중에도 몇 번이고 엉덩이 밑을 쓰다듬어 먼지를 털고 몸매를 추스르는' 그의 유명한 청결벽도 그러한 성장과정에서 형성된 것일지 모른다는 것.
채만식의 부친은 개화문물에 개방적이었던 듯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익히던 그를 1910년, 현재의 임피초등학교 전신인 임피보통학교에 입학시킨다. 뿐만 아니라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로 유학까지 보냈으니 이웃 고을에서까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만한 화젯거리였다. 이 시절의 추억담이 단편소설「회(懷)」에 실려 있다.
1992년에 제13회생으로 중앙고보를 마친 그는 그 해 봄 도일하여 와세다대학 부속 제일와세다 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하였다. 이 때 축구선수로도 활동했다고 한다. 그러나 관동대지진의 와중에서 중퇴하고 마니 여기까지가 그의 학력의 전부다.
학창시절에 있었던 큰 사건은 19세 된 은선 홍씨와의 결혼이었다. 중앙고보에 다니던 중 시골로 내려오라는 편지를 받고 내려갔다가, 그의 표현을 빌면 '뭣도 모르고 장가를 들게' 된 것이다. 당시 유행하던 조혼의 습속이었는데 애정 없는 강제결혼이었던 만큼 부부 생활은 자연히 평탄하지 못했다. 중편소설「과도기」에서 조혼을 한 봉우가 자신의 건조하고 멋없는 부인을 괄시하며 '신지식이 넉넉하고 활발스럽고도 온순한 미인'을 그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봉우는 곧 작가의 자화상이나 다름없었던 셈이다. 결국 나중에 그는 첫부인 은씨와 결별하고 숙명여고를 졸업한 신여성과 재혼하게 된다.
그가 학창시절에 어떤 식으로 문학수련을 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연보를 보면 1923년인 22세에 처녀작「과도기」를 탈고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소설에는 일본에서의 학창생활 등 자전적인 얘기들이 담겨 있어 당시 생활을 어렴풋이 엿보게 할 뿐이다. 학업을 중도포기하고 귀국한 것이 1923년이었는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예기치 못한 고난이었다. 당대 조선 농민이 걸었던 몰락의 길을 그의 부친도 피할 수 없어서 수리전답을 속아서 판 후에 기울어져 가는 재산을 일구기 위해 나중엔 미두(米豆)까지 손을 대었다가 그로 인해 완전히 파산하고 말았던 것이다. 한때 부유한 환경에서 일본 유학까지 가능했던 그였으나 부친의 파산으로 집안 전체가 몰락해 버린 것이다. 같은 해 채만식은 동아일보 기자에 입사함으로써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였으나 부친의 파산 이후 시작된 가난은 그를 평생 빈궁의 멍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탁류」에서 '미두'로 망하는 얘기가 꼼꼼하게 그려지고 있는 것도 이러한 그의 개인적 고난과 연관이 있다.「탁류」의 주인공들은 1930년대의 식민지 현실에 놓인 인간 군상들이다. 채만식은 식민지하 조선 사람이 어떻게 몰락해 가는지를 군산의 미두상을 배경으로 하여 탁월하게 형상화 해내고 있다. 미두란 논이나 밭 또는 집을 저당으로 잡히고 현물(現物)없이 미곡을 거래하는 일종의 투기를 말한다. 채만식은 이 미두 취인 문제를 중심으로 고향 일대 농민들의 몰락상과 도시 빈민의 문제를 그려냈던 것인데, 이는 이기영이 '마름'을 통해서 농촌 현실을 파고들었던 것과 비견되는 점이다. 즉 채만식은 '미두 취인 문제'를 통해서 양곡 집결지 군산의 문제를 제시했는데, 바로 이 점이, 홍이섭 교수의 지적대로 채만식의 현실 인식이 남달랐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탁류」의 리얼리즘적 성취는 이렇듯 채만식 개인의 체험을 바탕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채만식이 문단에 처음 얼굴을 내민 것은 1924년 단편「세길로」를 통해서다. 그러나 작가로 입문한 이후 10년간은 작가라기보다는 기자라는 직업에 더 방점이 찍혀져 있는 생활이었다. 작품 연표를 보면「세길로」이후, 1934년에 잘 알려진 단편「레디메이드 인생」이 나오기까지「불효자식」(1925), 「생명의 유희」(1928), 「산적」(1929), 「농촌스케치」(희곡)(1930)등 드문드문 글을 써서 발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나마 대부분 짤막짤막한 소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 중에 주목할 만한 것은 1934년의 「인텔리와 빈대떡」, 「레디메이드 인생」정도, 그는 이 기간 동안 동아일보, 개벽, 별건곤, 조선일보 등 신문사와 잡지사를 전전하며 인터뷰 기사를 잘 쓰는 기자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이렇듯 가난한 기자생활을 전전하던 채만식이 일체의 공직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은 1936년이었다. 채만식은 그의 작가 생애에 '마지노 라인'을 긋고, '성패간에 한바탕 문학이란 자와 단판 씨름을 하리라는 비장한 결심을 한 것'이다. 그 후 곧바로 조선일보사를 사직한다. 말하자면 병자년 벽두는 채만식 문학의 2단계가 열리는 시점이고, 개인적으로는 숙명여고를 졸업한 두 번째 부인 김시영을 만나게 되면서 새로운 가계보를 형성하게 되는 시점인 것이다.
모든 공직생활을 포기하고 문학에만 전념하겠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가난과 궁핍과의 전쟁에 돌입하는 것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이사를 거듭하며 겹치는 가난과 병마에 포위되어 살아야 했고 죽을 때까지도 지독한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채 허덕여야 했다. 그러나 1936년 봄의 결단이 아니었으면 '채민식 문학' 또한 그쯤에서 희미하게 좌초하고 말았을 터이니 위대한 문학은 개인적 불행을 디딤돌로 하여 빚어지는 것인가.
조선일보를 그만 둔 뒤 금광업을 하는 형이 사는 개성 집으로 거처를 옮긴 채만식은 형의 일을 도우면서 창작에 전념한다. 장편「탁류」를 조선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한 것이 그 이듬해, 「태평천하」, 「금의 정열」과 같은 장편 외에 수많은 단편과 희곡을 집필하면서 그는 30년대 후반의 가장 문제적인 작가로 부상하게 된다.
채만식은 지식인의 고뇌와 비애를 풍자적으로 그려냄으로써 개인과 신변 일상에 함몰되었던 당대 문단에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키고 리얼리즘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김남천이 「탁류의 매력」에서 「탁류」를 새롭게 평가하면서 30년대 소설사에서 중요한 성과라고 평가했던 것이 그 단적인 예가 된다.
「레디메이드 인생」,「치숙」, 「태평천하」등을 지나오면서, 채만식은 자기 폭로, 비유, 희화와 과장 등의 방법을 사용하여 작품 속 인물을 비하하고 조롱하며, 이를 통해서 30년대 지주계급의 유한 가정을 통렬히 풍자했다.
채만식은 희곡에도 관심이 많아서 실제로 많은 희곡 작품을 썼던 작가다. 그가 쓴 희곡만 해도 1927년의 「가죽버선」을 시발로 하여 그 구성과 주제면 에서 문제작으로 꼽히는 「심봉사」, 「제항날」, 「당랑의 전설」, 「흘러간 고향」등을 포함하여 마지막 희곡인「대낮의 밤주막」(1941)까지 수십 편이 넘는다. 소설을 통해 표현하기 힘든 것들을 다른 장르를 통해 표현코자 했던 것이 아니가 한다.
채만식의 이력에는 그 자신 가장 뼈아프게 생각하는 '흠'이 있다. 그것은 그가 일제 말기에 어쩔 수 없이 친일문인의 대열에 끼어야 했다는 것이다. 1938년 그는 불온독서회를 배후 조종했다는 혐의로 경찰서에 붙들려 갔다가 풀려난 일이 있었다. 그때 그를 구해준 것은 '조선문인협회'라는 데서 날아온 엽서 한 장이었는데, 이것이 빌미가 되어 채만식은 '여인전기' 외 몇 편의 친일적인 글을 쓰기도 하고 시찰단이나 위문단의 일원으로 만주에 다녀오기도 했던 것이다. 일제하라는 외적 변수가 지식인들의 생애를 어떻게 변형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이효석이나 홍명희 등의 예를 통해서도 볼 수 있거니와, 심훈 같이 요절하여 그 시련을 피해간 경우를 뺀다면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생계유지를 위한 친일과 지식인의 양심이라는 선택의 기로 앞에서 심한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채만식과 같이 예민한 신경을 가진 사람이 '친일의 오점'을 남겼다는 것은 스스로 견디기 힘든 일이어서 1945년 그는 농사나 짓겠다는 결심으로 낙향하고 만다. 그는 나중에 「민족의 죄인」(1948)이라는 자전적 소설을 통해서 이때의 일을 숨김없이 고백한 바 있다. 그는 이 소설을 통해 민족 앞에 자신을 비판하고 반성코자 했던 것이다.
「민족의 죄인」에는 해방 전후에 겪은 그의 생활과 사상의 갈등 등이 다루어져 있는데 소설 속에서 '나'는 해방 후 서울로 올라왔다가 친일경력이 없는 '윤'이라는 사람을 만나 노골적인 비난을 받게 된다. 그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유구무언이었던 '나'는 병든 사람처럼 꼬박 보름 동안 누워 있다가 다시 시골로 내려갈 생각을 하는데 이것은 작가 연보에서 1946년 전북 이리시로 거처를 옮기는 사실과 일치한다.
채만식은 낙향을 전후로 부친이 사망하고, 장남이 병사하는 등 신산스러운 일을 겪었고 이리로 이사한 이후에도 그 이듬해에 모친이 별세하는 등 환란이 겹쳤다. 그러나 창작을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논이야기」, 「맹순사」, 「소년은 자란다」등 그 짧은 몇 년간에도 수많은 작품을 써놓았다. 이 때 작품들은 셋방에서 책상도 하나 없이 사과 궤짝을 엎어놓고 거기서 병든 몸을 달래가며 써내려간 것들이었다. 1949년 6월 병상에 눕게 된 것도 무리한 창작으로 인한 과로가 큰 원인이었다.
그는 평생 제대로 된 집 한 칸을 지니지를 못했으므로 그것이 큰 한이 된 듯하다. 1948년에 「탁류」를 재판하여 수입이 좀 생기자 이리에 조그마한 기와집을 샀다가 병 치료를 위해 도로 판 일이 있었다. 그의 경제적인 불운은 '무자비'할 정도였던 것이다. '달구지를 보통 것보다 훨씬 크게 만들어, 그 위에다 지붕을 만들고 두 개의 침대와 책상 하나, 그리고 얌전한 암소로 하여금 달구지를 끌게 하여 글을 써가면서 팔도강산을 돌아다니'고 싶어했던 그의 평소 소망은 사실은 집이 없는 그의 설움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채만식 문학 또한 이육사, 김유정 같은 작들과 마찬가지로 70년대에 들어와서야 본격적인 조명을 받았다. 그의 문학을 종합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결실로 꼽히는 이주형 교수의「채만식연구」가 나온 것이 1973년의 일. 그러나 채만식 생애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미흡해서 문학적 수련과정도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성장과정도 일부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이는 채만식의 성격과도 연관이 있는데, 채만식은 워낙 신경이 날카롭고 결벽스러운 데다가 비타협적이어서 생전에 깊이 사귄 친구가 적었고, 문단에서는 고작 이무영 정도가 유일한 친구였다. 이무영에 의하면 채만식은 인간관계가 극히 나빴고 거의 외곬으로 지내다시피 했다고 한다. 이러니 그의 개인적인 이력을 전해줄 이도 많지 않았던 것이다.
"난 개하구 무식한 사람하구가 제일 무서워. 대체로 경우가 없단 말이야"
라고 이무영에게 말한 것처럼, 채만식은 오해받을이만큰 지나치게 결백하고 귀족적이었다.
잡지「별건곤」에서 같이 일했던 안회남이 가까이서 지켜본 채만식은 그 스스로가 자신을 '신경질 제3기'라고 일컬을 정도로 우울증과 신경질 덩어리였다고 한다.
그의 이상 심리는 가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가 임종 직전에 차남 계열에게 남긴 다음의 말을 들어보면 그 고통이 어떠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외투, 동복, 두벌의 춘추복은 사후에나마 생색이 있도록 팔아서 장비와 생활의 기반을 만드는 비용으로 쓰도록 하라. 작년에 이것들을 팔아서 마이신을 맞고자 하는 생각을 했었지만 미련으로 결행치 못했던 것인데, 만일 그때 그것을 팔아서 마이신 한 2, 30병이라도 맞았더라면 병이 이렇도록 급히 악화되어 오늘의 이 지경에 이르지 아니하였을지도 몰랐다고 생각할 때 기가 막히는 몇 벌의 양복이다." 그리고,
"내가 죽거들랑 보통 상여를 쓰지 말 것이며 화장을 하되 널 위에 누이고 그 위에 들꽃을 가득 덮은 후 활활 태워주오."
이것이 채만식이 임종 때 남긴 마지막 유언이었다.
시인 장영창(張泳暢)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은 채만식의 외로운 만년 생활을 잘 증언해 준다.
"장군, 인편이 허락하는 대로 원고 용지 한 20권만 보내 주소. 그러면 군은 혹 내가 건강이 좋아져서 글이라도 쓰려고 하는 것같이 생각할는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네. 나는 일평생을 두고 원고지를 풍부하게 가져 본 일이 없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임종의 어느 예감을 느끼게 되는 나로서는 죽을 때나마 한 번 머리 옆에다 원고 용지를 수북히 놓아 보고 싶은 것일세."
일평생을 두고 원고지를 풍부하게 가져 본 일이 없었던 까닭에 죽을 때나마 머리 옆에다 수묵이 놓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채만식은 이렇게 만년을 가난 속에서 지내며 자기에게 언제나 주사를 놓아 주던 호남 의원수련의 강재환(姜在煥)에게 고마운 뜻으로 발바리와 감나무 하나를 선사한다. 그리고 6·25가 일어나기 두 주일 전인 6월11일 48세의 나이로 채만식은 힘든 생을 마감하고야 만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 넣은 병마는 폐결핵, 그리고 가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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