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ㅈ-ㅎ)

황순원(1915-2000.평남 대동)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22:25

황순원(1915-2000.평남 대동)

 

아래 내용은 황순원 선생의 제자인 김종회의 회고담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선생은 일제 병탄의 초엽인 1915년 3월, 평양 부근의 평남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에서 출생했다. 황씨 가문은 조선 초기 저 유명한 황 희(黃喜)정승의 후예로서 향리에서 누대에 걸친 명문이었고 조부(黃鍊基)께서 조선의 참봉을 지내었으니 만약 지금이 조선시대라면 선생은 큰 갓에 도포를 입고 다녔을 법하였다.

열 다섯 살 나던 1929년, 선생은 정주의 오산중학교에 입학했다. 건강 때문에 다시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이사하기까지 한 학기를 정주에서 보냈다. 이 무렵 선생은 거기서 교장을 지낸 남강 이승훈 선생을 보고 '남자라는 것은 저렇게 늙을수록 아름다워질 수도 있는 것이로구나'하는 느낌을 얻었다고 술회했다.

단편 〈아버지〉에서는 남강의 이러한 기품을 부친에게서 발견했다고 적고 있다. 부친은 3·1운동이 일어나던 해, 곧 선생이 다섯살이던 해에 평양 숭덕학교 고등과 교사로 재직 중이었으며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평양 시내 배포 책임자로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부친은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감옥살이를 했다.

숭실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0년, 이팔청춘의 나이에 드디어 선생은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그분은 시인에서 출발하여 단편소설 작가로 자기를 확립했고, 다시 장편소설 작가로 발전해 간 이력을 보여 준다.

1931년 7월 처녀시 〈나의 꿈〉을, 9월에 〈아들아 무서워 말라〉를 《동광》에 발표하기 시작한 이래, 와세다 대학 영문과에 재학 중이던 1936년까지 선생은 시집 《방가》와 《골동품》에 묶인 두 권 분량의 시를 썼다. 선생은 두 번째 시집 《방가》를 낸 이듬해인 1937년부터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일제 말기의 어지럽고 뒤숭숭하던 시절을 피해 향리인 빙장리로 소개해 갔던 선생은, 계속해서 단편소설을 쓰면서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6·25동란이 나자 마침내 솔가하여 경기도 광주로 피난했으며 1·4후퇴 때에는 다시 부산으로 피난했다. 이 부산 망명문인 시절 김동리, 손소희, 김말봉, 오영진, 허윤석 등과 교유하며 그 포화의 여진 속에서도 작품창작을 계속해 나갔다.

서울로 올라와 서울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선생은 1957년 경희대학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또한 이 해에 예술원회원에 피선되기도 했다. 선생의 생애에 있어 경희대학교로의 전직은 그 의미가 가볍지 않다. 이 때부터 정년퇴임을 하는 날까지 23년 6개월 동안, 단 한가지의 보직도 갖지 않은 채 그야말로 평교수로서 초연히 살아오면서, 전체 작품 가운데 3분의 2에 해당하는 단편과 〈잃어버린 사람들〉,〈나무들 비탈에 서다〉,〈일월〉,〈움직이는 성〉,〈신들의 주사위〉 등 주요한 장편들을 집필하였다. 뿐만 아니라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김광섭, 주요섭, 김진수, 조병화 등 쟁쟁한 문인교수들과 더불어 활기찬 창작열을 북돋워 많은 문인제자들을 생산한 시기이기도 했다.

선생은 소설 이외의 잡문을 쓰지 않기로 유명하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는 신념에서이다. 그 신념으로 황순원 문학은 1992년 9월 일흔여덟의 노경에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시상으로 〈산책길에서·1〉 등 여덟 편의 시를 발표하는 데까지 달려갔다.

필자가 기억하는 바 황순원 선생과 관련된 일화는 너무도 많이 있지만, 그 사실과 사건들의 공통점을 들자면 모두가 그분의 합리적이고 균형 잡힌 사고나 따뜻하고 순후한 인간애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면모는 작품 세계 가운데서도 처처(處處)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 원응서와의 교감을 그린 〈마지막 잔〉을 지목할 수 있겠다. 선생은 주석에서 친구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면서 꼭 병바닥의 마지막 잔술을 탁자 옆 허공이나 퇴주그릇에 부었는데, 그것을 아는 제자들은 덩달아 그 '법칙'을 지켜가며 숙연해 하곤 했다.

문단 일각에서 '국민 단편'이라고까지 부르는 작품 〈소나기〉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작가의 직접 체험이 반영된 것 아니냐는 호사가적 관심을 가졌다. 이에 대한 선생의 답변은 한결같았다. 작가는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체험을 형상화한다고. 그러나 그것이 직접체험인지 간접체험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것은 선생의 철학이었다. 작가는 오직 작품으로만 말한다!

다만 소나기의 그 빼어난 결미에 관해서는 선생께 들은 말씀이 있다. 원래의 원고에서 소년이 신음소리를 내며 돌아눕는다는 끝 문장이 있었는데, 절친한 친구 원응서 선생이 그것은 사족이니 빼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했다는 것이다. 좋은 친구요 좋은 독자를 가진 복을 누리신 경우이다.

선생께서 홀연 타계하시고 장례를 준비하는 동안 이를 사회장으로 확대하자, 생전에 23년 6개월을 봉직하신 경희대학교를 들러 장지로 가자는 등 여러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유족들의 기준은 '아버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였고, 결국 가장 조촐하고 품위 있는, 가장 소박하면서도 그 뜻으로 인해 가장 화려한 영결식을 치렀다. 그렇게 한 시대 문학의 거인은 거인답게 가셨던 것이다.]

 황순원은 교육자 집안에서 유복한 생활을 했다. 중학교 고학년들도 타보지 못하던 스케이트를 소학교 4학년 때 이미 타보고, 철봉·축구·유도도 즐겼다. 5학년 때는 숭실전문학교에 다니는 학생으로부터 바이올린 레슨까지 받았을 정도다. 일제 시대와 해방 전후 그리고 6·25전쟁, 민족 분단기에 부모와 형제가 거의 함께 생활할 수 있었던 것도 유복한 가정 환경 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거의 삶이 순탄할 것만은 아니었다. 5세 되던 해인 1919년 부친이 투옥되자, 집안에는 어둠의 그림자가 짙게 깔리고 어린 그의 내면에 고독증이 형성된다. 이러한 고독증이 그를 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열두세 살 때부터 체증을 다스리기 위해 어른들의 허락을 받고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는데, 그로써 소주 애호가가 되고 스스로도 문학보다 술을 먼저 알았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때 반홈씩 마셨으니 나이에 비추어 그 주량이 미소한 것이 아니었고, 학창 시절에는 대체로 두 홉 정도의 주량을 일정하게 유지했다고 한다.

 아래는 이승이 시인이 황순원 선생을 회고한 내용이다.

[지난 14일 각 일간지의 문학란은 '황순원 타계' 소식으로 들썩거렸다. "시(詩)처럼…학(鶴)처럼…고고했던 한평생", "삶과 작품 일치시킨 큰 문인의 문학인생", "정갈한 문장, 꼿꼿한 인품…아름다운 삶" 등의 기사 제목은 작가 황순원의 작품 및 삶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소설가로 잘 알려진 그는 1931년 《동광》지에 시(詩)「나의 꿈」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 후 작가로서의 70년 삶은 '장인(匠人)'의 칭호를 붙이기에 부족함이 없다. 감투를 멀리하고, 시와 소설 이외의 글은 물론 제자들의 작품에 서문이나 발문을 쓰는 등 일체의 잡글을 쓰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또 작품 이외의 일로 언론에 알려지기를 꺼렸으며, 경희대 재직시절 대학 측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제의하였으나 '소설가로 충분하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들은 수없이 많은데, 작가 황순원의 청렴결백(淸廉潔白), '청산(靑山)의 백학(白鶴)'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황순원의 작가적 자세 및 인품은 많은 후배 작가들을 그의 사단으로 만들었다. 전상국·조세희·한수산·고원정·정호승 등 이른바 경희대 사단이다. 제자들과 함께 20년 넘게 '보신탕 모임'을 이끌어온 황순원은 다른 문인들로 하여금 부러움을 사기도 하였다. 즉 누구누구 계열, 라인을 형성하여 문학계의 한 주류로서 힘을 자랑하기보다 순수한 친목으로서의 모임이라는데 더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다.

 심사 위원이 누구냐에 따라 이미 수상자가 정해지는 우리 문단계에서 황순원의 예는 아주 특별하다. 소설부문 심사를 맡아오면서 제자의 작품이 최종심에 오르면 다른 심사위원에게 최종 결정을 맡긴다거나, 제자이기 때문에 탈락시키기도 하였다. 이는 자기 제자를 본선에 올려 수상자로 선정하기 위해 로비하는 스승과, 자기 스승을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게끔 로비하는 제자의 환상적 콤비플레이와는 격이 다르다.  

 작가는 작품으로써 말해야 한다. 누구의 후광을 얻어 작가로 성장할 수도 없거니와 일시적으로 유명세를 타더라도 곧 그 한계를 드러내는 게 당연하다. 왜냐하면 작가는 곧 작품이기 때문이다. 작품이 좋지 않다면 제 아무리 든든한 빽이 있다 하더라도 곧 자멸하게 된다.

 아직도「소나기」에서 소년이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린 맨들맨들한 조약돌이 느껴진다.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로 비유될 만큼 단어 하나 토씨 하나에도 신중을 기울인 작가, 순수문학의 거장인 황순원의 타계 소식은 한동안 한 어린 소년을 잃은 아픔처럼 아련히 남게 될 것이다.]

 흐트러짐 없이 문학의 길을 걸으며 후배 작가와 제자들의 존경을 받던 황순원은 2000원 9월에 여든 다섯을 일기로 숨진다. 제자였던 전상국은 다음과 같이 선생을 기억한다.

 "선생님은 진짜 애주가이셨습니다. 술이 가진 불량한 속성을 다스려 순종케 하셨기에 아무리 많이 드셔도 흐트러짐 하나 없으셨던 선생님! 이제 저희들은 제자들 주머니를 생각해 제안하신 회비제 술자리에서 기어코 내시던 회비도 못 받게 되었습니다. 술자리에서는 남의 얘기, 특히 살아 있는 사람의 얘기는 안 하는 게 좋다, 남의 얘기가 아니라 자신의 실수와 자신의 이야기를 할 줄 알아야 참된 작가라고 말씀하시던 선생님은 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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