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ㅈ-ㅎ)

황석영(1943- , 만주)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22:27

황석영(1943- , 만주)

 

 1974년 당시 황석영의 나이는 서른 두 살의 젊은이였다. 이 해 3월에는 그의 첫 창작집인 '객지'를 출판한 직후였으며, '장길산'의 구상은 1972년 가을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자료를 수집하는 동안 장길산의 집필계획이 한국일보 문화부에도 알려져 연재 권유를 받게된다. 준비가 덜 된 상태라 고사하던 황석영씨는 충분한 시간과 지원을 하겠다는 한국일보 측의 설득으로 당시 사주였던 장기영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이 때 선생은 당시 집 한 채쯤 살 수 있는 액수의 재료비를 내놓았고, 복사기술이 형편없는 때라 사진기자를 불러 규장각에 있는 자료들을 일일이 사진으로 찍어오게 하였다고 한다. 거금의 자료비를 받은 황석영씨는 만나는 사람마다 술 한 잔 사라고 난리였고, 그도 원없이 술을 먹어보는 게 소원이라 패거리를 지어 한 보름쯤 줄창 퍼마시다 보니 자료비라는 돈을 다 써버렸다고 한다.

 약속시간이 되어서 다시 한국일보 사주를 찾아가 저간의 사정을 얘기했더니 크게 웃으며 다시 자료비를 내놓았고, 명함을 꺼내 메모를 끄적이더니 이제부터 술을 마시려거든 그 집에 가서 자기 이름을 대고 마음대로 마시되 자료비는 꼭 자료수집에만 쓰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이렇게 신문연재를 시작했어도 많은 양을 써댈 수가 없어 날마다 한 두 꼭지가 고작이었다고 한다. 당시 삽화를 맡은 이미 화단의 원로급인 운보 김기창 화백은 원고를 기다리느라 여행은커녕 외출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문구는 황석영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했다.

 "황씨는 지극한 '순정의 오빠'이기도 하다. 그는 일찍이 간척 공사장에서 몸을 던져 수개월 동안 밑바닥 인생살이를 경험했고, 구로동 공업단지에서 일당 130원 짜리 직공 '시다' 노릇도 해보았으며, 마산 자유수출공단에 들어가 노동품을 팔면서 수많은 노동자와 미미한 기능공들의 한숨과 피눈물을 목격했고, 또한 그들의 기쁨과 좋은 일에 함께 즐거워 한 값진 체험을 가지고 있다. 『한국문학지』에 실은 「잃어버린 순이」를 비롯 여러편의 르포를 여러 지면에 썼고, 또한 한국문학사의 특파원으로 영하 9도의 혹한 속에 강원도 동고탄광에 뛰어들어 광부들의 설움을 「벽지의 하늘」이란 제목으로 세상에 알려 의분을 토하기도 했지만, 지금도 그는 어느 노동 운동가 못잖은 열의와 이론으로 노동자를 대변하고 있고, 그네들에게 도움이 될 일이면 무슨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결의를 보이기도 한다. 사회적으로 옳지 않은 처사를 보면 불꽃같은 성질로 앞장서서 정의를 외치며 경우에 따라서는 몸으로라도 해결지으려 하는 '못 참는' 성미이기도 하다.

  글은 항상 밤에만  쓰고, 잠은 반드시 대낮에만 자는 기벽도 가진 그는 편집자들간에 원고가 깨끗하기로 정평을 얻고 있으며, 원고 글씨는 굵고 크되 세로쓰기를 즐겨하고, 태권도는 서른 살이 넘어 배워 초단 실력, 주량은 매번 마실 때마다 줄었다 늘었다 하지만 소주로 쳐서 4홉 정도가 알맞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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