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1879-1944, 충남 홍성)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 승려이자 시인으로 일제강점기에 전국을 떠돌며 조선의 독립을 위해 산 만해 한용운(1879-1944). 일본식의 호적을 만들 수 없다는 이유로 평생을 호적 없이 산 한용운. 그가 말년을 보내면서 죽음을 맞이한 집이 성북동 222번지에 자리잡고 있다.
만해는 전국을 떠돌며 거처없이 살다보니 말년에도 마땅히 안식할 집 한 칸이 없었다고 한다. 주위에서 보다 못해 성북동 현재의 자리에 집을 지어 주었다. 원래 심우장을 지을 때 남향으로 지으려고 했으나 당시 남쪽 방향에 일제의 총독부가 있다하여 총독부를 등지고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평소 그는 "조선 전체가 감옥과 마찬가지인데 어찌 불을 피운 따뜻한 방엣 잠을 편히 잘 수 있겠느냐"며 방에 불을 때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한겨울 냉방에서도 몸과 마음이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아 '저울추'라는 별명을 얻었다는 일화도 있다.
1893년 그의 나이 14세 때 첫 부인인 김정숙 씨와 결혼을 하지만 이내 출가해 오세암을 들어간다. 그리고 40년 뒤인 1933년 유씨 부인과 결혼한다. 만해의 딸 한영숙은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매일 새벽 5시면 일어나셨어요. 좌선을 끝마치면 항상 집에서 책을 읽고 집필을 하셨습니다. 음식은 주로 채식에다 생식을 즐겨하셨고, 가끔 친구들이 찾아오면 술을 마셨습니다. 술도 잘 드셨는데 한번은 술에 취해 개천에 빠진 일도 있었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한글과 한문, 수학, 일반상식 등을 직접 배우면서 자랐습니다.]
만해는 1908년 금강산 유점사에 들어가 진하 대승으로부터 [화엄경]을 배우게 된다. 어느 날 진하 스님은 열심히 [화엄경]을 읽고 있는 만해에게 "자네는 화엄 따위를 배워서 뭘 하려나? 그런 것, 그만 집어치우고 나랑 산천 구경이나 가세."라고 했다.
만해는 진하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들은 염불을 외고 오줌을 누면서 낙산사로 가 주색에 지기도 하고, 강릉장으로 가 마른 생선을 흔들며 "이것이 네 애비 좆이다. 이것이 네 할애비다." 외치다가 두들겨 맞기도 했다.
그들은 보리밭에서 이슬을 맞으며 밤을 새기도 하고, 동해바다의 주막집에서 잠들기도 했다. 그렇게 망나니짓을 하고 다녔다. 얼마 뒤에 만해는 다시 유점사 문을 나서게 되었다. 진하 스님의 주선으로 일본 불교계의 초청을 받아 일본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그때 둘러분 일본 불교를 기초로 그의 대저술인 [불교유신론]을 쓸 수 있었고, 최린 등을 만나 독립운동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 계기가 되는 여러 가지를 그는 진하 스님의 깊은 배려로 얻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는 평생 그 스님을 잊지 못하였다. 진하 스님이 열반하셨던 날엔 식음을 폐하고 홀로 중얼거렸다. "스님이 나를 일본에 보낸 것은 일본 중을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었어. 일본을 보고 오라는 것이지. 거기 뜻이 있었던 게야. 깊은 뜻이…"
이후 만해 한용운은 일제에 끝까지 굴하지 않은 독립운동가요 시인으로 족적을 남긴다. 타협을 거부하는 그의 성격은 다음과 같은 일화에서 잘 나타난다.
어느 날 재동에 있는 이백강 선생 댁에서 조촐한 술좌석이 벌어졌다. 이 자리에는 김적음스님을 비롯하여 몇몇 가까운 분이 동석하고 있었다. 술이 몇 차례 도니 만해 선생도 모처럼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그런데 잔이 거듭 오고가던 중 김적음 스님이 "여러분 감빠이(乾盃)합시다"라고 말하였다. 선생은 노발하여 "적음, 그 말이 무슨 말인가? 무엇을 하자고? 어디 한번 더해봐."하고 언성을 높였다. 적음 스님은 무색했다.
비슷한 이야기를 하나 더해보자. 선생은 친구인 화가 일주 김진우가 친일요녀 배정자의 집에 기숙하며 그림을 그린다는 말을 듣고 즉시 그 집을 찾아갔다.배정자가 나와 반가이 맞아들였으나 선생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따라 들어가 일주가 정말 기숙하고 있는가를 살폈다. 마침 그가 있었으나 선생은 일주에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 후, 배정자가 술상을 차려 들고 들어와서 술을 따라서 선생에게 권하였다. 선생은 그때서야 낯빛을 고치고 일주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술상을 번쩍 들어 일주를 향하여 집어 던졌다. 그러고는 태연히, 역시 아무 말 없이 그 집을 나왔다. 그것이 친구인 일주를 책망하는 동시에, 평소에 아끼던 마음에서 우러난 행동이었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많은 인사들이 끌려갔고, 독립선언서를 작성하는 등 이날 의거의 주동 인물을 가려내는 일본경찰들의 신문에 최남선, 최린 등을 그 사실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한용운만은 달랐다. 한용운이 한 말은 이 한 마디였다.
[조선사람이 조선독립을 말했는데 어찌 일본 관헌이 재판할 권리가 있는가]
그리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일로 한용운은 3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평생을 전국을 누비며 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싸워 온 한용운이 쓰러지게 된 이유는 영양실조였다. 게다가 중풍이 겹쳤다. 그는 광복 1년 전인 67세의 나이로 심우장에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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