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나무 아래, 할매와 사촌동생과 함께
안녕하세요.
저의 어릴 적 소원은 할매가 오래 사시는 거 그리고 내방을 갖는 거 였습니다. 할매는 돌아가셨고, 두 번째 소원은 군대 제대해서야 겨우 이루었습니다. 이미 내방에 대한 열정은 많이 식은 상태였죠. 여하튼 이십 여 년 만에 방 하나를 가졌다가, 2002년 새해 며칠 만에 (웹상에)방 하나를 추가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엔 방을 만화책으로 채우고 싶었지요. 만화 보기를 꽤나 좋아해서 동전이 남아나지 않았습니다. 저축 못하는 습관은 이때부터 들었나봅니다.( 이제 좀 해야 할 텐데 ).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시립 도서관에 출입을 했는데 이유는 거기 만화책이 있었기 때문이죠. 틈틈이 세계명작동화 같은 것도 곁들여 읽다보니 알게모르게 인문성향이 짙어졌을 걸로 봅니다.
오지(경북에서 흔히 BYC지역이라고도 함-봉화, 영양, 청송)인 봉화에서 태어나 영주 촌놈으로 열 살을 꼭 채우고 대구로 전학 왔습니다. 대구는 잘 사는 사람만 있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더군요. 산 밑에 집이있었던 관계로 장마철에 조마했답니다. 혹시 무너질까봐요. 이제 그 집은 아예 부서뜨려져서 윗동네로 가는 계단이 되었답니다. 집앞 신천 도랑이 점점 오염되는 것 같더니 급기야 시멘트로 덮였는데요, 지금의 신세계 예식장 근처 물가에서 붕어를 잡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동천초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학교 지을 때 이무기가 나왔다고 하더니, 소풍갈 때마다 비가 내렸습니다. 4학년 때 만난 정숙희 쌤이 손도 잡아주고 선물도 주고 해서 지금까지 사랑하고 있습니다. 아직 찾아뵙지는 못했습니다. 한번은 복도를 돌아서 뛰어가다가 예쁜 여선생님하고 부딪쳤습니다. 여선생은 보기에도 안쓰럽게 콰당 넘어지셨죠. 안절부절못하는 저에게 따귀가 날아오더군요. 시원함을 느꼈습니다. 귀밥이 삐져나온 걸 확인했으니까요. 선생도 여러 성향의 분이 있구나 하는 것을 그 때 깨달았을지도 모릅니다.
덕원중학교에 입학해서 수학 공부를 안 하기로 했습니다. 문제를 칠판에 적어 놓고, 못 푼 학생의 손바닥을 다섯 대씩 때렸는 데 저만 걸리는 거 있지요. 차라리 몸으로 때우자라는 오기를 이제서야 후회하고 있습니다. 경북고등학교에 입한한 해에 노태우 동문께서 강당에 들렀죠. 빵 하나, 우유 하나 먹고 만세 삼창 불렀습니다. 돈이 삼천억 이상으로 많은 줄 미리 알았더라면 시쳇말로 '크게 쏘라'고 소리질렀을 겁니다.옆사람에게만 들리게끔요.
영대 국어교육과에 입학했습니다. 교수님이 술을 많이 사주셔서 행복했습니다. 남자 동기 여섯 명이 모두 보수적이라고 여성동지들에게 욕도 많이 들었는데, 결국 여섯 명 모두 교사가 되었습니다. 보수의 옷을 입고 진보의 칼을 갖거나, 진보의 곁에 서서 보수를 응원하는 조화신공을 부려야 할 텐데. 생각만 간절합니다.
군대가니까 고참이 삽 세 자루, 망치 다섯 자루를 부러뜨려야 제대할 수 있다고 그럽디다. '노래 한 삽 퍼'-'던져'로 시작되었던 나의 공병생활은 병장시절만 좋았습니다. 제대 이후 군에 재입대하는 꿈을 꿔서 심란했던 기억도 납니다.
교사 임용시험을 봤습니다. 경기도로 응시를 한 것은 지금 여기를 떠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백 서른 명 모집에 백 이십 오등을 해서 간신히 교사 이름표를 달았습니다. 부천 중원고등학교에서 삼년, 안성고등학교에서 반년 있다가 지금 다시 대구로 내려와서 경북여고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교사상에 대해서 이야기해야겠군요. 제가 생각하는 교사는 이런 사람이어야겠습니다. 책을 읽고, 사람을 읽고, 세상을 읽어서 배운 것들을 학생들과 더불어 나누면서 또 배우는 교사이어야겠습니다. 자신도 키우고 타인도 키우는 이 눈부신 매력이 저를 즐겁게 합니다. 혼자 배부르지 않는 가난한 교사로 끝까지 남도록 스스로에게 약속합니다.
앞으로의 계획 하나만 밝히고 글을 줄일까 합니다. 석 달에 한 편 이상 의무적으로 시를 써서 마흔이 되기 전에 시집을 한 권 내고, 이 년에 한 편 이상의 단편소설을 써서 쉰이 되기 전에 단편소설집을 한 권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술 동무나 말 잘 듣는 학생들에게 선물할 생각입니다. 물론 당사자는 별로 좋아하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쉰 정도 나이가 되면 저는 교사 겸 시인 겸 소설가가 되어 있을 겁니다. 이게 결코 가볍지 않은 저의 바람입니다.
별로 신통치도 못한 얘기를 끝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2002년 1월8일 늦은 저녁에 이동훈 씀.
- 마흔이 되기 전 시집을 내지는 못했지만 마흔을 넘기기 직전에 우리시문학상 신인상으로 등단을 했으니 소원이 반쯤 이루어진 셈일까.(2009.12.20)
2009년 12월 시상식에서(홍해리 이사장님과 장수철 시인님 가족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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