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일화

최북(1712?-?)

톰소여와허크 2010. 9. 4. 12:39

최북(1712?-?)

 

 최북은 기인이다. 그는 조선조 영조 때의 화가다. 산수를 잘 그렸다고 하여 최산수(崔山水)라고 불리었다. 호는 붓 한 자루에만 의지해 먹고살겠다는 호생관(毫生館)이었다. 그는 이름인 북(北)자를 파호하여 칠칠(七七)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칠칠이는 바보, 병신을 일컫는 속어이다.

 그의 눈에는 고관대작도 없었다. 어느 날 어떤 집에 갔는데, 높은 벼슬아치가 거만하게 주인에게 "저기 앉은 자의 성은 무엇인가"하며 물었다. 최북은 주인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를 향해 "먼저 묻노니 그대의 성은 무엇인가?" 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그 자리를 떠 버렸다. 이처럼 비위에 맞지 않으면 누구에게든지 덤비고 대들었다.

 심지어 제 눈을 찔러가면서도 기성의 권위와 질서에 굴하지 않는 기질을 보여준다. 화가에게 눈은 목숨과 같은 것. 스스로 귀를 자른 고흐에 비할 바 아니다. 최북이 제 눈을 찌른 사연은 이렇다. 한 세도가가 그에게 그림을 요구했으나 응하지 않자 위협하려 들었다. 이에 최북이 불같이 화를 내며 "남이 나를 강압해 해를 입히지는 못한다. 차라리 내가 나를 위해하마"라며 스스로 한쪽 눈을 찔렀다.

 그는 예술가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하여 굴종보다는 차라리 고통을 택했다. 그는 아무 곳에도 매인 데가 없는 자유인이었다. 그리고 싶으면 그리고, 그리고 싶지 않으면 죽어도 그리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싶으면 그림 한 장을 그려 팔아 술값을 마련했고 쌀이 떨어지면 그림을 팔아 주림을 채웠다.

 그는 술을 마시며 전국을 주유했다. 그림을 팔아 노자를 마련해서 가다가 노자가 떨어지면 또 그림을 그려서 팔았다. 그렇지 않으면 천금을 준다고 해도 그림을 그려주지 않았다.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구룡연(九龍淵)에 이르러 그 경치에 탄성을 터트리다가 "천하의 명사가 천하의 명산에 죽으니 만족스럽구나"하며 말을 마치자 못 속에 들었으나 지나가는 이가 건져주어 살아났다고 한다. 그는 시도 잘 지었다고 하는데 그림에 써서 남긴 것 외에는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이처럼 최북은 전국명승지에서 노닐며 경치에 취하고 술에 취했고 인정에 취했고 자기예술에 도취되어 숱한 명품을 남겼다. 그는 욕심이 없으면서도 광기의 기질이 있었다. 천자 앞에서도 거침없이 술을 마신 시인 이백처럼 그는 누구 앞에서도 비굴하지 않았다. 예술가는 비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는 무언으로 깨우쳐 주고 있다.

 하지만 그의 말년이 빈한하고 쓸쓸했던 것도 사실이다. <송음관폭도(松陰觀瀑圖)>를 끝으로 작가적 족적마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하루 대여섯 되씩의 술을 마셔대어 주광화사(酒狂畵師)>라 불리기도 했던 그는 어느 눈 오는 밤 대취한 상태로 귀가하다 쓰러져 그대로 동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지음(知音) 신광하(1712-75)는 그의 최후를 시로써 전한다.

[(전략) 술을 찾아 미친 듯 노래하고 붓을 휘두를 적엔/ 큰 집 대낮에 산수풍경이 생겼다네/ 열흘 굶어 그림 한 폭 팔아서/ 취하여 돌아오다 성모퉁이에서 쓰러졌네// 북망산 흙 속에 묻힌 만골에게 묻나니/ 어찌하여 최북이는 삼장설에 묻혔단 말인가/ 오호라! 최북이는 몸은 비록 얼어죽었어도/ 그 이름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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