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일화

중광(-2002.3.제주도)

톰소여와허크 2010. 9. 4. 12:03

중광(-2002.3. 제주도)

 

 제주도에서 출생한 스님은 26세 때인 1961년에 근현대사 속에서 큰 발자국을 남겼던 고승 구하(九河) 스님 아래로 출가했다. 전 조계종 종정 월하 스님과는 사형사제간이다.

 스님은 출가 초기부터 엄격한 불가의 계율과 풍속을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힘들어 했으나 안거를 10회 이상 충실히 했고, 조계종 종회의원으로 활동할 정도로 출가 수행승의 본분을 실천하려 애썼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간혹 격식을 벗어난 기행을 보여 화제를 모았다.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49재에서의 가요부르기. 망자를 위한 법문에 나서 “망자가 제일 듣고 싶어하는 법문일 것”이라며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불러제낀 이야기는 지금도 회자된다.

 스님은 1970년대 중반무렵 그림에 눈을 돌렸다. 붓글씨를 잘 썼던 스님은 조계사 뒤 한 불교미술인의 화실을 찾아가 한국화의 기초를 사사받았다. 이 시기에 스님은 수년간 중국과 한국, 일본의 선화를 집중 연구하고 필력을 다듬어 나갔다.

 스님의 그림작업은 흔히 기초가 부실한 ‘즉흥성’으로 변별되었지만 그것은 스님이 자신의 화업정진 이력을 일부러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불러온 오해이다. 스님은 그 어떤 화가보다도 그림에 관한 한 끈질기고 처절한 노력을 기울였다. 스님을 가까이 알던 모든 이들의 뇌리에는 스님의 작업실을 가득 메운 파지와 한 번 붓을 들면 일주일, 보름씩 식음을 전폐하고 그림에 몰두하던 스님 모습이 남아있다. 조계사 뒤 화실을 다닐 당시에도 스님은 한꺼번에 5천장씩 한지를 들여 쌓아놓고 자신만의 화풍을 개발해나갔다.

 스님이 예술가로서 본격적으로 주목받은 시기는 1977년부터 였다. 그해 영국 왕립아시아학회 초대로 선화 특별전을 열었으며 각종 매체에 스님이 그린 달마도와 연꽃 그림들이 화제 속에 게재되기 시작했다.

 "반은 미친 듯, 반은 성한 듯/사는 게다//삼천대천세계(三天大天世界)는/산산이 부서지고//나는 참으로 고독해서/넘실넘실 춤을 추는 거야//나는 걸레//남한강에 잉어가/싱싱하니//탁주 한통 싣고/배를 띄워라"

 '걸레스님' 중광(重光)이 1977년 영국 왕립 아시아학회에서 낭송한 자작시 '나는 걸레'의 한 대목이다. 이후 그는 아예 걸레스님으로 통했다. 중광 스님이 ‘걸레스님’이라는 별호를 얻게 된 또 하나의 계기는 구상 시인의 시 ‘중광 스님’에서 묘사된, ‘겉도 안도 너덜 너덜/ 그 걸레로 이 세상 오염(汚染)을/ 모조리 훔치겠다니 기가 차다/…’에서 비롯됐다.

 스스로를 걸레라 낮추고 행동마저 기이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스님의 진면목을 알지 못했다. 줄담배를 피우고 아무렇게나 꿰어찬 옷에 술과 여자문제까지, 도무지 거침이 없는 행적을 보였으므로 세간에서는 스님을 ‘그림 좀 그리는 파계승’으로만 여겼지만 어떤 이들은 그를 진정한 예술가, 종교인으로 추앙하고 따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림을 통해 스님이 보여주려 했던 세계는 스님의 기행에 가려 오히려 주목을 끌지 못한 측면이 많다. ‘외눈 달마’, ‘가갸거겨’시리즈에서 엿보이는, 때로는 무구하고 또 때로는 경계 밖의 경계, 백척간두 진일보의 경지를 표현한 그림들은 분명히 현대불교미술의 스펙트럼을 넓혀도 한참이나 넓혀 놓은 작업이었다.

 스스로를 미치광이라고 부르며 시퍼렇게 살아있는 자신의 제사를 지내는 등 온갖 기행과 파계를 일삼던 중광은 끝내, 79년에 조계종의 승적을 박탈당했다.

 그후 조계종측은 그에게 승적을 되찾으라고 했으나 스님은 마음을 두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파문당한 중광 스님은 전국을 휘젓고 다니며 시와 그림으로 '허튼소리'를 쏟아냈다. 시인 구상씨와 소설가 이외수씨, 작고한 시인 천상병씨와의 우정은 각별했다.

 스님과 공동으로 '유치찬란'이라는 시화집을 냈던 구상씨는 스님의 달마도를 보고 "휘갈겨 놓으니 달마의 뒤통수, 느닷없이 만난 은총의 소낙비더라"고 감탄했다.

 스님의 번득이는 광기에 홀린 사람은 이들만이 아니다. 70년대 말 장욱진 화백은 스님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중놈 치고 옷 한번 제대로 입었네"라며 인사를 나눈 뒤 의기투합해 미술작업을 함께 했다. 70년대 중반부터 교류해온 시인 이근배씨는 "중광 자체가 화두"라고 말했다.

 중광에게 승속(僧俗)의 경계는 무의미했다. 그의 그림이 좋아 찾아온 수녀에게 "얼굴이 까무잡잡한 게 참으로 맛있게 생겼다"라거나, 벽에 걸린 예수 그림을 보고 "스님이 웬 예수 그림이냐"라고 의아해하는 사람에게 "아, 예수보살 그림 말인가"라고 대답했다는 등 일화가 수두룩하다.

 "나는 붓을 던져도 그냥 그림이 된다"고 자랑할 땐 어린이 같은 천진무구함이 느껴진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를 살아있는 부처라 했다. 그가 발표한 그림과 시(詩)도 거침이 없었다. 성기를 노출시킨 동물 그림을 발표한 것은 예사이고, ‘나는 똥이로소이다’는 제목의 시집(詩集)을 내는 등 일반인의 상식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퍼포먼스에서는 자신의 성기에 붓을 달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외국 대학의 강연 중 여학생과 키스를 하기도 했다

 독특한 경지를 이룬 그의 그림은 외국에서 더 높이 평가받았다. 미국 뉴욕의 록펠러재단과 샌프란시스코의 동양박물관, 대영박물관 등에는 그의 그림이 소장돼 있다. 스님의 예술세계는 해외에서도 큰 주목을 끌었지만 국내 평단에서는 다소 냉담한 반응을 얻었던 것도 사실이다.

 비판론자들은 스님의 그림이 서툴고 저속하며 생활방식도 엉망이라고 비판했지만, 그들의 비판은 대부분 아티스트 아카데미즘에 기초해 있다고 오히려 역공을 받기도 했다.

 줄담배를 즐기고 막걸리통에 소주를 부어 마시는 두주불사 애주가였던 스님은 건강이 나빠진 후 강원도 백담사로 들어가 그곳 큰스님에게서 '바위처럼 벙어리가 되라'는 뜻으로 농암(聾庵)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원종배 아나운서에게 물었다. 가톨릭 신자가 왜 스님과 친하냐고요?
“16~7년전입니까. 스님이 ‘사랑방 중계’에 출연하셨어요. 저도 그렇고 스탭도 그냥 ‘땡중’정도로 알고 있었어요. ‘십문십답’ 코너가 있었는데 스님이 30초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더라고요. 그러면서 이런말을 했어요. ‘자유는 질서 속에서 지켜야한다. 질서없는 자유는 참자유가 아니다’ 스님은 온갖 제도 구속 규제를 거부하는 ‘기인’으로만 알았는데 의외였어요.  스님 호주머니에는 늘 담배꽁초가 수두룩해요. 그걸 처음 보았을 때 ‘ 더럽게 왜 담배꽁초를 넣어 다니냐’며 힐난했는데 스님이 ‘내 주머닌 더럽혀져도 되지만 거리는 더럽히면 안되지’ 하시는 거예요. 다들 스님을 ‘걸레’라고 하잖아요. 아닙니다. ‘중광’은 모범생입니다. 행동이 이상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스님이 어린아이의 감성과 시각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더럽고 추함을 모르잖아요, 희노애락을 여과없이 내보이는 것이 어린아이 아닙니까. 스님은 매우 보수적이고 예의바른 측면이 오히려 더 많았지요. 배울 점이 많았던 분입니다”

그의 ‘기행’은 예술인으로서의 ‘끼’를 드러낸 것 뿐, 생활인으로서 그는 ‘최고의 시민’이라는 것이 20여년간 지켜본 원종배 아나운서의 평이다.

 중광 스님은 평화롭게 잠을 자다가 숨을 거뒀다고 그의 마지막을 지켜본 한 제자는 전했다.

 세속의 때를 닦아내는 존재라는 의미로 '나는 걸레'라는 말을 자주 했던 스님은 출가 전 장애인. 매춘부들과 어울려 지내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김수용 감독의 영화 '허튼소리'(86년)와 이두용 감독의 '청송으로 가는 길'(90년)에도 출연한 바 있다.

 화가, 시인, 행위예술가, 도예가 그리고 그 이전에 출가승려였던 중광 스님이 2002년 3월 9일 이승에서의 즐거운 놀이를 마치고 입적했다. 스님의 세속 나이는 67세였으며 출가 이후 41년만에 육신의 옷을 벗었다. 승적이 없는 스님을 그가 26세에 출가한 양산 통도사에서 다비로 장례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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