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일화

장승업(1843∼1897)

톰소여와허크 2010. 9. 4. 12:02

장승업(1843∼1897)

 

 조선시대의 기라성같은 화가들 중에 오원 장승업만큼 무엇이든지 그려낼 수 있는 탁월한 솜씨를 지녔던 화가도 드물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에는 '신필'로 불리웠으며, 죽어서는 안견, 김홍도와 함께 조선시대 3대화가 중 한사람으로 손꼽혔다. 그는 근대 전통화단의 정신적 지주로서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그러나 술때문에 많은 작품을 남기지 못한 아까운 천재화가이기도 하다.

 장승업은 1843년에 태어났는데, 출생지나 부모 등은 알려지지 않았다. 일찍이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장승업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가 한양에 거주하던 역관(驛館) 이응헌(李應憲, 1838∼?)의 집에 붙어살게 되었다. 그런데 이응헌은 그림과 글씨를 모으고 감상하는 취미를 가졌던 인물로서, 장승업의 그림 재주를 알아보고 본격적으로 화가로서 활동하게끔 도와주었다고 한다. 즉 이응헌은 장승업이 화가로서 성공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인물인 것이다. 이런 사정을 장지연의 『일사유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장승업은) 일찍 부모를 잃고 집도 무척 가난하여 의지할 곳조차 없었다. 총각으로 굴러다니다가 서울에 와서, 수표교(水標橋)에 있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 벼슬을 지낸 이응헌의 집에 붙어살고 있었다. 장승업은 어릴 때 글을 못 배웠으므로 글씨(文字)에는 캄캄하였다. 그러나 천성이 총명하여 주인집의 글 읽는 아이들을 따라서 옆에서 듣고 거의 이해하게 되었다.]  

 이응헌의 집에는 원나라, 명나라때 그림이 많았는데, 서화가들이 그 그림을 꺼내놓고 감상할 때마다 장승업은 눈여겨 봐두었다가 밤에 몰래 흉내를 내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매화, 대나무 그림과 같은 산수화를 그리다가 잠깐 밖으로 나간 사이 이응헌이 우연히 그림을 보게 되었다. 이응헌은 그 그림을 여러 사람에게 보여 평을 구했고, 모두들 귀신이 그린 듯 하다며 감탄했다. 곧장 소문이 퍼지고 그는 하루아침에 장안의 유명화가로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는 총명함과 귀신같은 재주로 혜성같이 등장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술을 너무 좋아해서 그림 그린 대가로 돈을 받으면, 곧장 주막으로 달려가 술부터 찾았다. 어지간히 술을 마시지 않으면 취하지도 않았고, 한 번 취했다 하면 며칠동안 깨어나지도 못할 정도였다. 그의 명성이 임금(고종)께도 알려졌고, 임금은 그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그림을 그리게 했다. 장승업과 고종에 대한 이야기도 장지연의 『일사유사』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그런데 장승업의 명성이 궁중에까지 들리니, 고종 임금이 불러 들이라 명령하여 궁중에 조용한 방을 마련해주고 병풍 십수첩(十數疊)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미리 궁중의 음식을 감독하는 자에게 지시하여 술을 많이 주지 못하게 하고, 하루 두어 번 두세 잔씩만 주도록 하였다. 열흘이 지나자 장승업은 술 마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여 달아나고자 하였으나 경계가 엄중하므로, 문지기에게 그림 물감과 도구를 구하러 간다고 속이고 밤중에 탈주하였다. 고종이 이를 듣고 잡아오게 하여 더욱 경계를 엄중히 하고 그 그림을 완성시키게 하였다. 그러나 장승업은 또다시 자기의 의관 대신 금졸(禁卒)의 의복을 훔쳐 입고 달아나기를 두 세 번에 이르렀다. 마침내 고종이 화를 내어 포도청에 명령하여 잡아 가두도록 하였는데, 그때 마침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이 고종을 곁에서 모시고 있다가 아뢰기를, "신이 본래 장승업과 친하오니 저의 집에 가두어 두고 그 그림을 끝내도록 분부해 주시기를 간청하옵니다"하니 고종이 허락하였다. 민영환 공은 바로 사람을 시켜 이런 뜻을 장승업에게 설명해주고,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의관을 벗겨 감추고 별실(別室) 안에 처소를 정해주었다. 그리고 하인에게 빈틈없이 감시하는 동시에 매일 술대접을 잘 하되 다만 너무 많이 취하지 않도록 하였다. 민영환 공이 이처럼 대우해주니 장승업도 처음에는 감사하는 마음이 들어 차차 정신을 차리고 조용히 앉아 그림에 전념할 듯 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민영환 공이 입궐하고 감시하는 하인이 잠깐 자리를 비우자 장승업은 다시 다른 사람의 모자와 상복(喪服)을 바꿔 입고 술집으로 달아나 버렸다. 민영환 공은 여러 차례 사람을 시켜 장승업을 찾아 잡아 왔으나 끝내 그 일을 마치지 못하였다.]

 위의 일화는 장승업의 진정한 예술적 기질을 느끼게 해준다. 즉 일체의 세속적인 가치와 법도는 그에게 있어서 하찮은 것이었고, 오직 예술과 창작의 영감을 북돋아주는 술만이 전부였다. 그런 진정한 예술혼이 있었기에 그의 파격적인 행동에도 민영환 같은 분의 지우(知友)를 여럿 명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술 때문에 미완성된 그림이 많기는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술은 단순한 기호품이 아닌 창작하는 데 있어서의 촉매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일사유사』에 의하면 장승업은 또 40여 세에 부인을 맞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장승업에게 있어서 가정생활도 구속으로 여겨져 하룻밤을 지낸 후 다시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김용준의 『근원수필』에 의하면 장승업이 관수동(觀水洞)에 작은 집을 두고 왕래하였으며, 이 집이 장승업이 죽은 후에는 원남동(苑南洞) 부근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또 장승업의 관수동 소실(小室)의 이름이 박성녀(朴姓女)이며 원래 기생이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조석진과 안중식이 동대문 밖 멀리 조그만 집에 거주하던 장승업의 부인을 방문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어쨌든 이런 이야기들은 장승업의 자유분방한 성격을 잘 보여주며, 그의 후손이 없는 이유도 설명해 준다.

장승업의 술을 좋아하는 성품과 기행(奇行)에 대해서는 『일사유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성품이 술을 목숨처럼 좋아하여 두어 말을 거뜬히 마시되 만취하지 않으면 그치지 않았다. 또 취하면 간혹 한 달이 되도록 깰 줄을 몰랐다. 그러한 이유로써 매양 그림 한 축을 그리려면 가끔 절반만 그리고 걷어치우는 일이 많았다. 또 그림 값으로 받은 금전(金錢)은 모두 술집에 맡겨두고 매일 가서 마시되, 그 금전이 얼마인지 계산도 하려 들지 않았다. 술집에서 "돈이 다 떨어졌다"고 하면, "나에게 술대접이나 할 따름이지, 돈은 물어서 무엇 하느냐"고 하였다.……… 성품이 또 여색(女色)을 좋아하여 노상 그림 그릴 때에는 반드시 미인을 옆에 두고, 술을 따르게 해야 득의작(得意作)이 나왔다고 한다.]

 장승업의 기행(奇行)은 어떤 행동 그 자체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예술을 향한 순수한 열정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세속적인 권위와 명성, 그리고 금전과 행복 따위를 포기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예술의 경지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술을 좋아한 것은 술을 통해 현세를 잊고 예술적 영감의 세계로 비상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뛰어난 예술가와 술과의 관계는 장승업 이외에도 역사상 많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장승업의 생애는 술과 예술, 그리고 방랑으로 일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임금의 명을 받드는 궁중 화사(畵師)로서의 명성도, 그림의 대가로 받은 금전도, 가정생활도 모두 그에게는 구속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술집과 그림을 부탁하는 사람들의 사랑방을 전전하며 생활하였다. 당시에 장승업의 그림을 구한 사람들은 위로는 왕과 고위 대신들로부터 아래로는 중인, 장사치, 부호 등 아주 많았다. 그러나 장승업의 그림을 구하려면 권위나 금전보다도 좋은 술과 인격적인 대우가 필요했다. 장승업은 아름다운 여인이 따라주는 좋은 술을 실컷 마시고는 취흥이 도도한 가운데 기운 생동하는 명화들을 그려냈다.

 오직 술과 예술, 그리고 방랑으로 일관했던 장승업은 1897년 55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전한다. 그러나 장승업이 어디에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김용준은 장승업은 죽었다기보다는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하였고, 정규는 "어느 마을 논두렁을 베고 죽었다"고 하였고, 또 어떤 이는 심지어 신선이 되었다고 까지 하였다. 어찌되었든 간에 장승업의 죽음은 그가 일생을 세속적인 가치를 거부하고 오직 순수한 예술을 위해 살았듯이 죽음도 신비하게 맞은 듯하다. 이와 관련하여 김용준은 『근원수필』에서 "오원(吾園)이 평사시에 말하기를 사람의 생사(生死)란 뜬구름(浮雲)과 같은 것이니 경치 좋은 곳을 찾아 숨어 버림이 좋을 것이요, 요란스럽게 앓는다, 죽는다, 장사(葬事)를 지낸다 하여 떠들 필요가 무어냐고 했다"라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어, 그의 생사관(生死觀)의 일단을 잘 보여준다. 장승업은 뜬구름 같은 인생에서 가치 있는 것이란 지고한 예술의 세계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 진리를 자신의 온 인생을 통해서 실현하다가 갔던 것이다.

 2002년 임권택 감독은 장승업 이야기를 [취화선]이라는 영화로 만들어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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