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릭 입센(Henrik Ibsen, 1828-1906, 노르웨이)
헨릭 입센은 1828년 3월 20일, 노르웨이 남부의 항구도시 시엔(Shien)에서 부유한 상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덴마크 태생의 부유한 선주(船主)였는데,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 큰 집에서 살았다. 그러나 입센이 7세 때 아버지의 사업이 파산하고, 이후 입센은 30여 년 동안 불우한 생활을 하게 된다. 갑자기 가난과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진 입센의 가족은 시내의 큰 집 대신에 교외의 초라한 집으로 이사해야 했고, 그러한 불우한 환경 속에서 입센은 말이 없고 내성적인 소년으로 자라난다. 조그만 사립학교에 다녔는데, 친구도 사귀지 않고 성적도 좋지 않았다. 그나마 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입센은 어린 시절 그림에 재능을 보여 화가가 되려고도 했지만, 결국 집안의 경제사정으로 더 이상 꿈을 키우지 못했다
이렇게 어린시절을 불우한 환경 속에서 지내던 입센은 16세 때에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자립하기 위해서 그림스타라는 조그만 항구마을로 혼자 떠나온다. 인구가 5백밖에 안 되는 이 조용한 마을에서 입센은 약방(藥房)의 점원으로 거의 6년여 동안을 보내게 된다. 이른바 입센의 성장기라 할 수 있는 이 기간 동안 입센은 극도의 궁핍한 생활과 싸우며 세계적 극작가로서의 잠재력을 키워나가게 된다. 이 시절 입센은 틈틈이 지방신문에 풍자적인 시나 만화를 투고했으나, 그리 대단한 평가는 받지 못했지만, 거기에서 보여진 그의 예술적인 재능으로 인해 그의 일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올레 슐레루드 같은 친구들을 사귀게 된다.
그러던 중 입센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바로 1848년의 2월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프랑스는 공화국을 선언했으며, 혁명의 물결은 전유럽으로 퍼져나간다. 입센은 이 사건을 계기로 세상과 인간에 대한 각성을 하게 된다. 처녀작인 《카틸리나Catillina》(1849년)는 작품은 입센이 프랑스 혁명에 자극을 받아 쓴 것임은 확실하나, 그 테마는 오히려 빛과 어둠을 각기 상징하는 두 여성에게 동시에 마음이 끌리는 주인공의 내적 갈등이라고 하겠다.
《카틸리나》가 완성되자 슐레루드가 그것을 가지고 동분서주했지만, 상연해 주겠다는 극장도, 출판해 주겠다는 출판사도 구하지 못했다. 결국 슐레루드는 자기가 비용을 대어 《카틸리나》를 출판했으나, 결과는 겨우 32부밖에 팔리지 않는 실패였다. 이렇게 입센의 첫작품은 아무런 평가도 얻지 못한 채 입센에게 낙담만 안겨주었다. 그러나 이제 입센은 더 이상 그림스타에만 있을 수 없어서 1850년 3월 슐레루드가 있는 크리스티아니아로 간다. 그리고 이때부터 극작가로서의 입센의 기나긴 악전고투의 시절이 시작된다
입센은 슐레루드와 함께 헤르트베리 예비학교에 들어갔다. 이 학교는 대학 진학에 있어 매우 우수한 예비학교였는데, 이곳에는 훗날 노르웨이 문단을 짊어질 비외른손, 요나스 리, 비녜 등과 같은 유능한 인재들이 모여 있었다. 입센은 이곳에서 특히 비외론손과 친하게 되는데, 훗날 입센과 함께 노르웨이 문단의 두 거목으로 추앙받게 되는 이 열정적인 시인과의 운명적 만남은 입센으로 하여금 문학의 길을 걷게 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의학을 지망했던 입센은 비외른손의 영향으로 결국 문학의 길로 바꾸게 된 것이다. 비외른손은 입센보다도 4년이나 아래였지만, 그야말로 천부적인 시인인데다가 열정적인 민중의 지도자였다. 입센은 평생을 이 비외른손과 교우하며, 한때 문학적 입장의 차이로 대립하기도 했지만 노르웨이 문학을 세계적 경지에 올려놓는 데 노력했다.
크리스티아니아에서의 입센의 생활도 여전히 극도의 궁핍함을 면치 못했다. 괴로운 생활을 견디다 못한 입센은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단막극《전사의 무덤》(1850년)을 썼다. 다행히 이 작품은 극장에서 채택되어 상연되어 약간의 경제적 도움을 주게 된다. 이 작품의 상연으로 입센은 대학 진학을 단념하고 작가로 나설 것을 결심한다.
1851년 입센에게 작은 기회가 주어졌다. 세계적 명성을 지닌 바이올리니스트 O.B. 불이 베르겐 시(市)에 개관한 국민극장에 그를 전속작가 겸 무대감독으로 초청해 주었던 것이다. 그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낙향하여 그 후 6년간을 베르겐에서 지냈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입센의 극작가 수업시대라 할 수 있는데, 이때 무대기교를 연구한 것이 훗날 극작가로 대성하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1857년, 입센은 다시 수도인 크리스티아니아에 신설된 노르웨이 극장으로 되돌아온다. 그는 국민문학 운동에 전념해 비외른손을 비롯한 여러 작가들과 함께 활동을 한다. 그러나 경제적인 어려움은 그를 알콜 중독에 빠지게 하고 자살을 기도하게도 하는 등 계속적인 고통을 준다. 이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해 준 것은 1858년 수잔나 토레센과의 결혼이었다. 입센이 베르겐에 있을 때 사귀었던 수잔나는 매우 이지적이고 지혜로운 여성으로 입센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입센이 여성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데에도 이 아내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이 시기에 씌어진 입센 최초의 현대극 《사랑의 희극》(1862년)의 여주인공은 그녀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당시의 가정과 연애풍속을 해학적으로 그린 운문극으로, 거기에 등장하는 목사의 희화화로 인해 보수파로부터 비난을 받게 된다
이후 입센의 생활은 절망의 세월이었다. 극장은 경영난으로 폐쇄되고, 여러 번 신청한 예술가 연금도 국가로부터 거부당한다. 고국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느낀 입센은 삶의 절망과 문학의 좌절감에서 탈출하기 위한 유일한 방편으로, 외국으로 떠날 것을 결심한다. 그리하여 1964년 봄에 쫓기듯 노르웨이를 떠나 덴마크와 독일을 거쳐 이탈리아의 로마에 정착했다. 이후 입센은 27년 동안을 몇 차례의 짧은 귀향기간을 제외하고는 노르웨이에 돌아가지 않았다. 주로 독일의 뮌헨과 이탈리아의 로마 등지에 머물며 극작에 전념했다. 노르웨이를 떠나기 전에 쓴《왕위를 노리는 자들》(1863년)은 셰익스피어적 수법이 엿보이는 역사극으로서 이때까지의 입센의 작품 가운데 최고작이라 할 만하다
이탈리아에서의 생활 역시 입센에게 경제적으로는 나아진 게 없었지만, 예술적인 영감을 얻는 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이탈리아의 밝게 빛나는 태양 아래서 그는 오랜만에 활력을 되찾아 한동안은 모든 것을 잊고 도시와 교외를 돌아다니면서 자연의 미와 여러 예술품의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입센은 예술세계에 대한 새로운 의식을 갖게 되고, 곧 심혈을 기울여 대작에 착수한다. 이러한 결과로 탄생한 것이 그의 낭만주의 시대의 최고 걸작인 5막 운문극인 《브란Brand》(1866년)이다. '전부가 아니면 무(無)'라는 신념을 가진 철저한 이상주의자이며 동시에 종교적 진리 탐구자인 브란 목사를 영웅화한 이 작품은 입센에게 상업적으로나 예술적으로 최초의 성공을 가져다 주었다. 이 작품으로 입센은 일약 노르웨이 최고의 시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며, 경제적으로도 윤택해지게 된다. 그리고 이를 계기고 본래 보헤미안 풍이었던 입센은 비사교적이며 귀족적인 외관을 갖추게 된다
입센의 낭만적 경향은 《황제와 갈릴리 인》을 기점으로 새로운 전환을 하여 자유로운 산문의 형식으로 현실 사회의 허위와 인습을 파헤치는 사실주의적인 사회극(社會劇)의 시기로 들어간다.
인간 현실에 대한 입센의 사실주의적 시각이 이념적으로나 형식적인 면에서 완숙하게 구체화된 것은 1875년 뮌헨으로 이주한 후에 씌어진 일련의 작품들에서이다. 즉, 《사회의 기둥들》(1877년), 《인형의 집》(1879년), 《유령》(1881년), 《민중의 적》(1882년) 같은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은 하나같이 당시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각성과 고발을 포함시키고 있다. 입센은 《사회의 기둥들》에서는 썩어빠진 배[船]의 밑창에, 《인형의 집》에서는 빅토리아 시대의 아내의 굴종적 지위에, 《유령》에서는 허위적 결혼과 매독의 해독에, 《민중의 적》에서는 지방정치와 저널리즘의 부패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당시의 절실한 사회문제를 면밀하게 취급하였던 것이다
《인형의 집》은 입센의 모든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대표작인 동시에 사실주의 희곡의 모범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이 작품은 여성을 사회가 요구하는 자기 희생적인 인물로서가 아니라 자신에 대해 충실해야 될 의무를 지닌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제의 충격성과 함께 성격과 극적 상황 묘사에서도 뛰어난 기교를 사용하고 있다. 이 작품에는 멜로드라마적 요소가 없을 뿐 아니라 극적 기교의 간결성과 장식적인 대사가 극의 스타일에 있어서 새로운 진전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순종적이고 사랑스런 아내의 모습에서 내면의 격정의 상태를 지나 인간적 품격을 지닌 여인으로 변해 가는 주인공 노라의 변신과정이 극적 리듬을 타고 전개된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적 도덕관념에 도전한 여성의 인간해방 선언이라는 주제는 비외른손이나 브란데스 같은 친우들을 제외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는다. 따라서 코펜하겐의 왕립극장에서 초연된 이후에는 오랫동안 노르웨이에서 공연되지 못했고, 독일 공연시에는 노라가 집을 나가는 대신 남편을 떠나려는 마음과 자식들과 함께 있고 싶은 모정(母情) 사이에서 갈등을 겪다가 그냥 주저앉아버리고 마는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기도 했다
《인형의 집》이후 2년 만에 발표된 《유령》은 작품성과 시대적 충격성에 있어 《인형의 집》에 필적하는 작품이다. 《인형의 집》의 노라는 시민 사회의 질서를 파괴하고 습관과 의무의 사슬을 끊고 가정을 버리지만, 의무와 습관이 명하는 대로 가정에만 붙박혀 있었다면 어떠한 결과가 될 것인가 하는 한 예를 나타내 보여준 것이 《유령》의 주인공인 알빙 부인이다.
《인형의 집》과 《유령》, 이 두 편의 사실주의적 희곡은 예술적 완성도라는 면에서 상당한 진전을 보여주었으며, 실제로도 인간의 자아 자각이나 사회적 문제성에 관심을 갖고 있는 지식인과 예술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버나드 쇼는 《입센이즘의 정수(精髓)》(1891년)라는 저서를 통해 입센을 유럽에 충격을 준 사람으로서, 젊은 세대의 졸라이즘과 경향을 함께하는 사람으로서, 사회의 문제를 은폐하지 않고 이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논의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사람으로 예찬하기도 했다
1891년에 입센은 오랜 외국생활을 청산하고 조국인 노르웨이로 돌아왔다. 이제 그는 세계적인 문호로서 노르웨이 국민뿐만 아니라 전세계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환호를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와 상관없이 입센은 조용하게 여생을 보내면서 예술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지난날의 삶을 회고하고 정리했다. 자전적 작품이라 할 《건축가 솔네스》는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노(老) 예술가의 만년에 볼 수 있는 자기고백극의 성향이 짙다. 특히 스스로 에필로그라고 이름 붙인 최후의 작품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에는 예술을 위해서 인생을 희생한 데 대한 통한이 감상적으로 담겨져 있다
이후 입센은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고 대부분 병석에 누워서 지냈다. 그러다가 1906년 5월 23일,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입센만큼 혼신의 힘을 모아 창작에 열중한 작가는 일찍이 없었다. 그는 '산다는 것은 내 내부에 도사린 악과의 싸움이고, 창작은 스스로 자신을 심판하는 것'이라는 엄숙한 태도로 한 작품마다 온 열정을 다 쏟았다. 그는 힘차고 응집된 사상과 예술성으로 근대극을 확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근대사상과 여성해방 운동에까지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자신의 근대사상을 예술 속에 용해시켜 당대 현실의 핵심을 파헤치려 노력했으며, 개인과 인생에 대한 문제, 특히 여성문제·종교문제 등 일상 생할에서 일어나는 제반 문제들을 진실되게 해부, 분석하고자 애썼다
입센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평생을 자기 자신과 시대에 대한 비판적인 응시를 통해 인간 정신의 해방과 정화(淨化)를 위해 노력했던 진실한 삶의 모색자였다.
《인형의 집》은 세 아이의 어머니며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행복한 생활을 영위해 가는 노라가 변호사인 남편이 새해에 은행장으로 취임하게 되어 있어 기쁨으로 충만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것을 배경으로 하여 시작된다. 행복에 젖어 있는 노라지만 그녀에게는 한 가지 비밀이 있다. 신혼 무렵에 직장이 없던 남편이 병을 앓아 전지요양을 해야 했을 때 그녀는 그 전지요양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남편 모르게 아버지의 서명을 위조해서 고리대금업자에게서 돈을 빌렸던 것이다. 그러나 법률에 관한 지식이 없던 그녀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사흘 뒤의 날짜로 차용증서에 서명하는 실수를 하게 된다. 그런데 그 고리대금업자인 크로그쉬타트는 남편과 같은 은행에 근무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는 남편은 은행장 취임을 계기로 그를 해임하려 한다. 이에 고리대금업자는 노라의 서명 위조사건을 내세우며, 자신을 은행에 계속 있게 하도록 남편에게 영향을 미쳐주지 않으면 노라의 비밀 폭로는 물론 은행장인 남편까지 실각시키겠다고 노라를 위협한다.
마침내 남편에게 그 비밀이 알려지자 남편은 자기의 사회적 체면이 손상된 것만을 걱정할 뿐, 노라의 곤경에 대해선 아랑곳하지 않고 도리어 배신당했다며 심한 욕을 퍼붓는다. 그러다 다행히 고리대금업자가 사모하던 미망인인 노라의 친구 린네 부인이 결정적인 순간에 도와주는 바람에 사태는 호전되고, 남편은 그제서야 손바닥 뒤집듯 생각을 돌려 노라에게 호의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노라는 남편의 그간의 행동을 통해 그가 위선적이며 비겁한 인간임을 깊이 깨닫게 되고, 지금까지 자기는 단순히 남편의 자그마한 종달새나 인형에 불과했다고 느끼게 된다. 그리고 아내이기 이전에 자기의 주체적인 인격을 가진 책임있는 한 인간으로서 살기 위해 가족을 버리고 집을 나간다.
그 내용의 충격성으로 《인형의 집》은 발표되면서부터 굉장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른바 여성해방론자들과 일부 문학관계자들은 환영을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가 입센이 결혼과 가정의 신성함을 파괴했다고 격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당시의 사회적 도덕 관념으로서는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여러 나라에서 상연이 금지되거나, 상연되더라도 결말 부분이 수정되어 상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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