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찔레꽃/ 양현근

톰소여와허크 2010. 9. 15. 10:02

찔레꽃/ 양현근


이제 쉬었다 가요

나무 작대기도 거기 내려놓으시구요

당신이 좋아하시는 찔레꽃도 환하게 피어났어요

찔레꽃가뭄 들면 하늘만 바라보던

섬진강 웃대꿀 열댓마지기 논배미는

평생을 지고도 다 못진 당신의 등지게였다지요

경운기도 못 다니는 비좁은 논둑길을

등판이 휘도록 혼자 짊어지고 다녔다지요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고

괜찮다 괜찮다 하며 어깨의 통증

밤새도록 돌아눕곤 했다지요

당신의 헛기침이 다져놓은 신작로를

말표고무신이 까까중 머시마들을 데리고 다녀요

벌써 마을은 지워지고 모판 한 짐이 참방거려요

이제 내려놓으시라고 달빛은 졸졸 따라다녀요

무논자락에선 개구리 울음소리가

밤새도록 들판을 감았다 풀었다 하네요

허기진 하루 돌아설 때

당신이 내려놓은 무거운 등지게는

이제 내가 지고가요

흙냄새 맡아 새파래지는 아랫대꿀 지나

미루나무 한 소절 낭창낭창 휘어져가요

- 『길은 그리운 쪽으로 눕는다』수록


* 찔레꽃 필 무렵이 모내기에 한창 바쁠 때란다. 논에 옮겨 심은 어린 볏모가 가뭄에 타들어갈 때 아버지 속은 더 타들어갔는지 모른다. 그렇게 마음 졸이며, 지게 내려놓을 날 없이 고생하면서 아들, 딸을 길러 냈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도 늙기 시작한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여전한 논둑길도, 헛기침으로 지나던 신작로도 늙은 아버지에겐 버거운 길이다. 지금까지 졌던 짐을 내려놓아야 한다. 가장으로서 가졌던 삶의 무게를.

  이제 성년이 된 아들이 그 옛날의 아버지를 기억해 보는 것인데, 그 옛날 아버지처럼 찔레꽃을 지나고 미루나무를 지나다 보니 아버지의 생이 마냥 무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을 했을까. 기꺼이 지게를 지고, 그 지게의 고마움을 아는 마음이 서로에게 전해져 아버지의 고단한 삶마저 찔레꽃처럼 환하게 느껴진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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