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순대' 외/ 장수철

톰소여와허크 2010. 9. 13. 13:52

장수철 신작소시집 *「순대」외 5편

  

순대 

 

절명의 순간에 얼어붙은 외마디 검은 비명들.

거두절미한 달변의 혓바닥.

근원도 지엽말단도 아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같이 하나인 어둠.

그것에 대한 찬송이 아닌,

그것이 아닌 것은 절대 그것일 수 없다는

가혹한 증명.

생식과 식생이,

식욕과 성욕이 시꺼멓게 버무려진

한껏 발기한 욕망 그러나

토막 난 길

지날 수 없는 길

오,

그것은

칼날이 지나간 속도에 대한 명징한 기억,

그 기억에 대한 뜨겁고 참람한 복기.

끝없이 미끄러져 가는 기울기의

검은 단면에 기댄 채

기울어 가는

기울어가는

 

 

화물번호 무안-3432066

 

오후 세시 십분 무안발 서울행 금호고속 화물칸이었습니다.

바깥 내다볼 차창 하나, 기댈 불빛 한 자락도 없었답니다.

그렇게 먼 길 더듬어 어머니의 마음

양파 한 자루 되어 상경했습니다.

수취인 불명의 진눈깨비 느적느적 내려 녹던

호남선 수하물취급소 앞에는

누군가의 이름을 내놓고 통성명하는 화물들이

징검돌처럼 부려져 있었습니다.

그 징검돌 하나씩 밟아가며

도시의 자식들은 넉넉히 이 겨울을 건널 것입니다.

글 모르는 어머니 대신 아홉살 조카가 써놓은

종이박스 위 내 이름 석 자가 유난스럽습니다.

어린 조카의 글씨만큼 삐뚤빼뚤 살아온 나날들이

이렇게 철마다 어머니 앞에 곡진하게 혼쭐이 나고서야

또박또박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눈길을 뚫고 고속버스는 하나 둘씩 남쪽을 향해 출발합니다.

마지막 떠나는 무안행 버스의 전조등 불빛 앞으로

진눈깨비들이 일제히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나무도 때로는 그늘에 앉고 싶다

 

나무도 때로는 그늘에 앉고 싶다.

긴 총신으로 그를 정조준한 햇살이

작살처럼 우듬지에 내리꽂히는 한여름 날의 정오

좌판 위에 부려놓은 덧버선 같은 이파리들 아랑곳없이

멀찌감치 돌아오지 못할 기차표를 끊고 싶기도 한 것이다.

누군가의 그늘이 되는 일이나

가지 사이에 새들의 둥지를 거느리는 일만이

거룩하다고 각인시킨 유전자 속 이 집단 무의식을

제 몸 찍는 도끼자루가 되어서라도 쪼개버리고 싶기도 한 것이다.

간혹 먹구름이 만들어 준 널찍한 그늘 밑에서

눈물을 흘려대며 징징거리는 구름의

지루한 연애담을 들어주는 것보다

조용히 관절의 힘을 모두 빼고 온몸을 축 늘어뜨린

가장 나태한 자세로 테라스에 앉아

정오의 희망곡을 들으며

도리스 데이를 흥얼거리고 싶기도 한 것이다.

그렇게 앉아

바람을 휘어잡으려 사방으로 갈래쳤던 가지들

우산살처럼 접어두고

땅 밑 만 갈래 뿌리 내린 제 지친 발목을 꺼내어

오래도록 씻기며 어루만지고 싶기도 한 것이다.

나무들이 죽어서 공원 의자로 놓이는 것도

마냥 홀로 그늘에 앉아 있고 싶었던

그의 평생 소원 때문이다.

 

  

수챗구멍 앞에서 소용돌이치다가

  

욕실 선반에 가지런히 개어놓은 수건들은

저마다 출생의 순간을 기억한다.

창립총회나 고희연이나 친목모임의 문구를

호적등본처럼 발치에 새기고 태어났으나,

정작 그 주인공들은 세상에 없거나

모임은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

미망인들끼리의 혈거,

얼굴을 닦을 때마다 그들이 기념하는

내 텅 빈 생의 알리바이.

 

수챗구멍으로 소용돌이치며 빠져나가는 개숫물처럼 시간은 낮은 곳

으로 쏠리다 어디에선가

참혹하게 고였다 내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오직 바닥의 보이지 않

는 기울기

 

물때 낀 욕실바닥 같은 삶의 물매를 따라

내 이름 석 자 새길 곳을 헤매다

수챗구멍 같은 눈으로 되돌아올 때

한 때 내가 섣불리 가담했으나

이제는 낯설기만 한

어떤

누군가의 이름을 펼쳐 보이며

표정 없이 제 출생의 순간을 기념하듯

내 얼굴을 거칠게 핥아대는

생의 혓바닥.

 

  

공테이프가 재생하는 고요와

어둠에 대한 기록

 

어두운 빈 방

앉은뱅이책상 위 더블데크 카세트 안에 도사린

두 갈래의 정적이

우그러진 격자무늬 양쪽 스피커를 뚫고 나온다.

고요의 무늬는 격자다.

사방 격자로 한 켜 한 켜 성긴 고요 위에 체질되어

수북이 바닥부터 쌓여가는 어둠.

등 기댈 데 없는 좁은 방 안에서

어둠과 정적은

종일 팔 벌리고 서 있어야 하는 빨래 건조대처럼

서로 등을 맞대고 방 한가운데 서 있다.

나의 부재에 리듬을 맞춘 시계의 초침소리가

박절기처럼 빈 공간의 정적을 황금분할하고,

반복 재생되는 데크 안의 고요를 타고

빈 밥통 속 오래도록 쟁여둔 깊고 야무진 어둠이,

엎드려 울고 있던 그릇들마다 겹으로 포개놓은 어둠이,

실내의 어둠을 몰래 훔쳐보다

슬며시 몸을 섞어 균질의 어둠을 만든다.

관음증 걸린 검은 눈자위로 거울이

비추는 것 역시 짙고 어두운 격자무늬의 고요.

내가 있어도 채워진 적 없던 불 꺼진 방 안

고요와 등 맞대고 앉아

맞은 편 데크에 공테이프를 넣고 녹음버튼을 누른다.

지금부터는 내 안의 고요에 대해 기록할 차례다.

 

 

사랑, 치사량의

  

남아있는 마지막 치약들을

칫솔손잡이로 훑어 목을 조르면 치밀어 오르는 것

그것은 분명 치약이 아니라

치욕이고 독이다

맵고 독한 치사량의 사랑이고 절규다

멋모르고 지껄였던

고백과

기약 없는 약속들과

습관적인 기대와

이루어지지 않을 희망과

침묵이 두려워 건넸던 이야기들이

거품 되어 사라져 버리고

용기 끝에 말라붙은 기억들만 딱정이 앉아

자꾸 부스러지기만 하는 버릇이 들어갈 때쯤

그리하여

더 이상 속삭여 줄 것 하나 없을 때 떼어 준

너의 하얀 목젖이다

슬픔도 끝물에 들면 독해지는 것

더 이상 먹일 것 없는 빈 젖의 가슴이 마지막 떼어준

네 하얀 젖꼭지다

가장 순결한 각혈이다.

 

* 장수철 시인 ‘신작소시집’ 해설


  소설을 두고 ‘그럴 듯한 이야기’라고 말하는 사람도 시에 대해서는 다르게 말하고 싶어 한다. 그렇다고 해서 ‘시는 이런 것이다’라는 모범 답안이 따로 있지는 않을 것이기에 시도 소설처럼 이야기일 뿐이라고 우겨도 꿀릴 일은 아니다.

  나는 시를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소설이 긴 이야기라면 시는 짤막한 이야기이다. 긴 이야기도 따지고 보면 현실의 의미 있는 부분을 줄인 것이니 짧은 이야기는 그 정도가 더 현저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줄이고 줄이다 보니 함축이 생기고, 그 과정에 요긴하게 쓰일 법한 게 비유와 상징이다. 압축 과정에서 비유와 상징은 자연스레 따라오는 장치일 뿐이지만 가끔은 주객이 전도된 작품을 만나기도 한다. 화려한 수사에 눌려서 현실을 환기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는 작품이 그런 경우라 할 것이다.

  주사기에 든 액체가 현실이라면 주사기를 눌러 주사바늘을 통해 찔끔 나온 진액 같은 것이 시라고 해도 좋겠다. 몸에 좋은 진액을 제대로 짜내는 것이 작가의 몫이라면 한 방울의 시를 통해 원액에 녹아 있을 자연이나 현실의 한 단면을 떠올려보는 건 독자의 몫이다.

  장수철 시인의 시는 현실과 현실에서 비롯된 내면의식을 아주 정성스럽게 짜낸 수작이다. 대개의 시들이 시적 화자를 내세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기 마련이지만 장수철 시인의 경우는 시인과 시적 화자의 거리가 좀 더 가깝게 느껴진다. 수하물이나 수챗구멍, 공테이프나 치약 앞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시구를 통해 시인의 모습을 오롯하게 대면할 수 있다. ‘순대’나 ‘나무’ 등의 객관적 상관물을 동원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자신과 이웃의 처지를 은근히 빗댄 것으로 보인다.

  낯선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건 언제나 설레는 일이다. 장수철 시인의 이야기는 ‘순대’에서부터 시작된다. 난해한 이야기도 아니지만 처음부터 술술 풀리는 이야기도 아니다. 이야기의 재미도 잠깐 멈추어 갔을 때 더하듯이 시의 행간에 잠깐 멈추어 서는 게 필요한지 모른다. 이제부터 이야기의 건더기를 깜냥껏 건져보기는 하겠으나 똘똘한 시에 비해 너무 어설픈 해설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어쨌든 감상은 독자의 권리이니 널리 혜량해 주리라 믿는다.


  장수철 시인의 이번 시엔 ‘어둠’의 이미지가 유난히 많이 나타난다. “근원도 지엽말단도 아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같이 하나인 어둠”<순대>, “바깥 내다볼 차창 하나, 기댈 불빛 한 자락도 없었답니다”<화물번호 무안-3432066>, “수챗구멍으로 소용돌이치며 빠져나가는 개숫물처럼”<수챗구멍 앞에서 소용돌이치다가>, “빈 밥통 속 오래도록 쟁여둔 깊고 야무진 어둠이,/ 엎드려 울고 있던 그릇들마다 겹으로 포개놓은 어둠이”<공테이프가 재생하는 고요와 어둠에 대한 기록> 등에 보이는 것처럼 ‘어둠’은 시적 화자가 놓여 있는 배경이면서 시적 화자의 마음속 깊이 드리워져 이미 화자의 일부가 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둠’은 기피하고 싶거나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그려지거나, ‘어둠이 깊을수록 밝음이 가깝다’든지 해서 희망을 이야기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시적 화자가 어둠을 대하는 태도는 이전의 방식과는 구별된다. 어둠을 애써 피하거나 밀치려고 하지 않는다. 심지어 어둠을 어둠인 대로 놓아두고 그 어둠을 어쩔 수 없는 부분으로 인정하려는 태도도 엿보인다. 시인이 말하려는 어둠은 사는 데 적당하게(적당하다는 게 어느 정도인지 그 기준이 항상 문제이기는 하다) 요구되는 욕망이나 이기심, 또 그로부터 파생되는 내적․외적 갈등의 얼굴을 하고 있다.

  <순대>는 순대를 비스듬히 썰어 놓은 것에서 느낀 일종의 비애감이 시의 모티브가 된 것이다. 순대는 “식욕과 성욕이 시꺼멓게 버무려진/ 한껏 발기한 욕망”을 가졌으면서도 그 욕망을 조절하거나 실현하는 데 실패하고 “토막 난” 채 “기울어가는” 존재의 이름이다. 이는 생래적이고 원초적인 욕망이 현실에 수용되지 못한 채 “칼날” 같은 규범이나 자의식에 의해 억압되었기 때문이다. 이 억눌린 욕망은 일탈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자아에게 어두운 그늘을 드리기도 할 것이다.

  어두운 자아가 시의 곳곳에 자리 잡고 있지만 그 원인에 대해서는 다소 불분명한 데가 있다. 시인의 또 다른 시에서 “한 때 내가 섣불리 가담했으나/ 이제는 낯설기만 한”(<수챗구멍 앞에서 소용돌이치다가> 중) 단체나 이름, 혹은 “멋모르고 지껄였던/ 고백과/ 기약 없는 약속들과/ 습관적인 기대와/ 이루어지지 않을 희망과/ 침묵이 두려워 건넸던 이야기들”(<사랑, 치사량의> 중 ) 등에서 넘겨짚어 볼 뿐이다. 수챗구멍에 참혹하게 고인 것은 시간이라고 했지만, 그 시간을 견뎌야 하는 화자는 이미 어둠 쪽으로 한참 기울어져 있는 상태이다.

  어둠 속에서 상처 입고 괴로워하는 자아는 있어도 그 어둠을 부정하는 모습은 좀처럼 찾을 수 없다는 점도 이번 시의 특기할 만한 점이다. 아마도 자신의 삶에 드리운 어둠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감지하고 있는 까닭이 아닐까 싶다.

  어둠의 일면이 상대적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난 작품은 <나무도 때로는 그늘에 앉고 싶다>이다. “누군가의 그늘이 되는 일이나/ 가지 사이에 새들의 둥지를 거느리는 일들만이” 나무의 임무인 양 당연시되는 집단 무의식이 바로 그것이다. 자신은 없고 오직 남을 위한 희생만 강요당한 삶을 아름답다고 미화하는 세태가 곧 어둠인 것이다. 희생해야 할 대상이 가족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의 일방적 희생을 대가로 겨우 유지되는 가정을 이상적으로 위장하는 것은 몰염치한 일이다. 진정한 가족애는 가족 구성원 한 명 한 명이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하여, 가끔은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고 “마냥 홀로 그늘에 앉아 있고 싶”은 자유를 누리는 데까지 가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자신을 위해서 시간을 쓰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이게 뭐 어려울까 싶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도 않고 간단하지도 않다. 타의든 자의든 간에, 싫든 좋든 간에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땅 밑 만 갈래 뿌리 내린 제 지친 발목을 꺼내어/ 오래도록 씻기며 어루만지고 싶기도 한” 나무는 깊은 연민과 공감의 대상으로 다가온다.

  어둠과 어둠 속의 자아를 그렸으되 이를 극구 부정하지도 않던 시인의 참모습은 <화물번호 무안-3432066>에서 감동적으로 드러난다. “양파 한 자루 되어 상경” 한 어머니의 마음을 읽는 단순한 내용임에도 어떤 수사로도 미치지 못할 진정성이 담겨 있다. “어린 조카의 글씨만큼 삐뚤빼뚤 살아온 나날들이/ 이렇게 철마다 어머니 앞에 곡진하게 혼쭐이 나고서야/ 또박또박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에서 알 수 있듯이 자아는 어둠에서 비켜서서 이전의 자아를 반성적으로 돌아보고 있다. 자칫 교훈적이거나 도덕적인 경구로 돌아서기 쉬울 법한 내용이지만 이는 장수철 시인의 체질에 맞지 않는 일임에 틀림없다. “마지막 떠나는 무안행 버스의 전조등 불빛 앞으로” 몰려드는 “진눈깨비”처럼 저마다 분분하고 저마다 젖게끔 만드는 건 시인이 갖고 있는 힘이라 할 것이다.


  앞에서 시는 짧은 이야기라고 했다. 그 중에서도 좋은 이야기가 뭐냐고 물으면 나와 타인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 도움을 주는 이야기라고 대답하겠다. 타인을 이해해야 타인을 사랑할 수 있고, 세상을 이해해야 세상을 사랑할 수 있다. 모순덩어리인 나 자신은 더 많은 이해와 사랑이 필요한 존재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장수철 시인의 신작시는 좋은 이야기로서 부족함이 없다. 장수철 시인의 시는 어두운 자아와 반성적 자아가 한데 어울려 있는 가운데 타인과 세상에 대한 그리고 자신에 대한 말 건네기이다.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면 나와 타인의 삶이 어떠한 것이고, 어떠해야 하는 것인가를 돌아보게 된다. 나와 타인과 세상의 소통을 막고 있는 닫힌 문이 있다고 하자. 그 문을 열게 할 열쇠가 여기 있다. 장수철 시인은 이걸 뭐라고 부를 것인가?

  이미 이야기했는지 모른다. -사랑이라고.

  설령 그것이 “맵고 독한 치사량의 사랑”이라 하더라도.(이동훈) - 월간《우리시》2010.5.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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