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 포기
- 봉평에서의 하룻밤 / 이영춘
아침에 어머니 창문 여는 소리에 잠을 깨니
밤새 뽀얗게 얼굴 씻은 산이 덩달아 깨어나
창문밖에 내려와 서성인다
콩밭에 나가신 어머니를 따라
콩 포기들도 모두 일어나 해실해실 웃으며
어머니 치마폭을 따라 다닌다
그렇게 하루가 열리고
어머니 긴 그림자가 산 그림자에 가려질 무렵
콩잎들도 제 몸 속에 오그라들어 이불을 펴고
나는 어머니 산 그림자 뒤에 숨어
세 살 적 어린애처럼 훌쩍거리고 있었다
콩 포기처럼 줄기 앙상한 어머니의 뼈 때문에
- 시선집『들풀』, 북인, 2009.
- 아침에 눈 뜨고 저녁에 눈 감는 건 수억만 년 반복되어 온 인류의 양식이다. 찰나에 불과한 생을 감안하면 생명의 탄생과 죽음의 전 과정도 아침, 저녁 사이에 있다고 하겠다.
아침은 시작하는 시간이니 조금은 들떠 보이는 게 당연하다. 어머니 발치에 내려와 서성이는 산, 어머니 따라 웃는 콩 포기를 묘사하는 시인은 어머니의 삶이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런 삶이었음을 말하고 싶어 한다.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의 일상이 자연을 즐기는 유한자의 그것은 아닐 것이다. “긴 그림자가 산 그림자에 가려질” 때까지 어머니는 콩밭에서 땀 흘려 일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하루가 열리고”란 표현 이면에는 콩꼬투리가 열리고, 자식이 열린다는 의미도 있으려니 짐작이 되는 것이다.
이제 어머니의 인생은 저녁의 시간에 도착했다. 늙어가는 것도 자연인 것을 어쩌랴 싶지만 자식의 안타까운 마음 또한 어쩌랴. “어머니여 더 늙지 마시라” 하던 월북 시인의 시 한 구절이 겹쳐 생각나는 저녁이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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