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바깥/ 임동윤
하늘과 땅의 경계가 어두워졌지만 미명 같은
물빛은 남아있다, 감추지 못하는 꼬리 때문이다
좀처럼 어두워지지 않는 이 저녁을 나는 품에 안았다
눈발은 안팎의 경계를 지워버리고 징검다리를 지우고
마을로 가는 모든 길을 무너뜨렸다
새들도 제 둥지 찾아 돌아간 지 이미 오래다
어두울 시간인데도 좀처럼 어두워지지 않고
번지는 저 물살엔 형형한 그리움이 묻어있다
서서히 저무는 풍경이란 젖은 마음들을 일으켜 세우는 법
전나무가 제 팔 부러뜨리는 소리를 내질렀는지도 모른다
그 겨울밤, 너를 돌려세운 것도 눈보라였던가
움켜쥘 수 없는 부끄러움 때문이었던가
돌아보면 빈들처럼 쓸쓸하지만
그래도 희미한 물살은 남아있다
바람이 추녀 끝을 빠르게 흔들고 가고
깊어지는 눈발 사이, 컹컹 승냥이 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이대로 흰 봉분 몇 채 만들 것인지 산도 숲도 몽실몽실
깊어지고 있다
검둥이도 곳간에서 지그시 눈을 감는다
모두 그리워지면 저렇게 눈감는 것이리라
윗바람 많은 아랫목으로 손을 넣어본다
뒷산에서 다시 직립의 나무들이 우지끈, 정신을 꺾는다
무참히 퍼붓는 백색 총알세례, 벌써 많이 밤이 깊었다
- 『따뜻한 바깥』, 나무아래서, 2011.
- “저무는 풍경” 속 화자의 기억은 눈보라 이는 “그 겨울밤”에 가 닿는다. “너”와의 이별이 감지되고 “움켜쥘 수 없는 부끄러움”에 휘둘리던 어둔 기억이다. 눈발에 의해 “제 팔 부러뜨리”고 “정신을 꺾는” 전나무의 모습은 화자가 견뎌내야 했던 고통과 상실감의 표현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해서 눈발이 고통을 유인하는 매개체로 읽히는 건 아니다. 예전처럼 눈발이 퍼붓는 날, 화자는 “희미한 물살”로 오는 그리움을 숨기지 않는다. 아마도 세월의 더께에다 시인의 낭만적 기질이 더해진 까닭일 게다.
눈발은 마을 안팎의 경계를 지워버리고, 과거와 현재의 경계까지 무너뜨리는 배경으로도 작용하는데 이런 이유로 말미암아 ‘따뜻한 바깥’이란 역설이 다층적인 의미망을 갖게 된다. 화자가 위치한 곳이 어딘가에 따라 ‘바깥’은 달라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화자가 있는 곳을 기준으로 경계 저 편에 대한 그리움으로 읽고 싶다. 바깥에 온기를 주는 마음이 곱게 읽히는 작품이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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