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봄날을 치우다/ 이재무

톰소여와허크 2011. 9. 28. 16:33

봄날을 치우다/ 이재무


은밀하게 방에 들어와 수년을 살다가

죽어버린 사련을 봉지에 담아 치웠다

내게서 시를 밀어내고 걸핏하면

수면 장애를 일으키던 애련을 나는

참지 못하고 조금씩 죽여왔다

시름시름 앓으면서도 삼 줄기처럼 질긴

목숨의 끝이, 밑 터진 봉지가

한순간 우수수 내용물을 쏟아냈을 때처럼

마침내 옭아맨 매듭 풀어버리자

베란다 밖 오동나무가 꽃을 피웠고

꽃에서 보라색 종소리가 흘러나왔고

난 쉰한번째의 생일상을 받았다

여생에 나는 몇 번이나 춘사를 기념할 것인가

내 안에 기식하던 상열을 보내려 애써온

그, 오랜 시간 동안 어쩌면 나는

그의 기억의 방구석에서 이미

회색 먼지로 쌓였는지 모를 일이다

쉰내를 풍기며 봄날이 가고 있었다


- 『경쾌한 유랑』, 문학과지성사, 2011.


- 시인은 “사련”과 “애련”을 “조금씩 죽여왔고” 끝내 “봉지에 담아 치웠다”는데 뜻이 모호한 한자어를 써서 자신의 감정이 날것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하고 있다. 봉지에 담긴 주검에서 집 항아리의 연꽃이 봄을 다 살지 못하고 떠난 데서 시적 영감을 얻었겠다 싶다. 그렇지만 시에서의 “사련”과 “애련”은 연(蓮)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보다는 사모하는 마음, 슬픈 사랑으로 읽을 때가 더 자연스럽다.

  사랑의 결핍을 안타까워하고 사랑의 행복만 좇는 사람은 낭만적일 수는 있어도 현실적이지는 않다. 복잡한 상황과 관계, 그로 인한 애증과 이별과 질병이 교차하는 현실적인 사랑은 어찌 보면, 멀리 있어도 힘든 것이고 옆에 있어도 힘든 것이다. 이 시는 그 힘든 사랑 하나가 떠나는 장면으로 볼 수 있다. 이별을 곡하듯 오동나무 꽃이 종소리를 내지만 그 풍경은 슬픔보다 아름다움에 가깝다. 바깥세상은 여전히 봄날인 이유이다.

  “봄날이 가고 있었다”에서 다시 봄날일 수 있을까,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라는 쓸쓸한 물음을 떠올리게 되지만, 봄날은 스스로 지우지 않는 한 되풀이될 것임을 안다.(이동훈) 

  

'감상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국, 꽃편지/ 진란  (0) 2011.10.10
그 지붕들/ 박해림  (0) 2011.10.05
최후의 꽃/ 김세형  (0) 2011.09.13
어상천 일박 魚上川 一泊/ 차영호  (0) 2011.09.03
어머니의 감나무/ 이병룡   (0) 2011.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