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지붕들/ 박해림
그 계단엔 한낮에도
해 기우는 그 지붕이 살고 있다
칡덩굴처럼 허공에 발을 뻗는 저 촉수
낮은 키 때문에 자주 비를 들이고 내치기도 했을
엇 포갠 하늘만큼 날아오를 태세다
유리 박힌 블록 담장, 처마에 걸린 양철홈통
엉덩이 들썩이게
개숫물도 콸콸 쏟아낸다
세상은 너무 환해서 높고
더 낮아질 수 없어 아늑한 것을
아직도 온기를 증언하는 도심의 산 일 번지
카키색 천막지가 여린 바람에도 펄럭이고
그 내력까지 품는다
그 지붕들
올 겨울 북서풍을 견딜까
슬레이트 깨진 난간 끝에 잘게 베어진 햇살만
종일 통통통 지붕 위를 뛰어다니고
쇠창살 난간에 놓인 맨드라미, 다알리아, 샐비어
재개발이라는 희망으로 한창 성업 중이다
어디로 방향을 틀어야 할지
한 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해 기우는 이 한낮!
- 『바닥경전』, 나무아래서, 2011.
* 짜임새 있게 정돈된 거리만 마음이 가는 건 아니다. 좁고, 비탈지고, 너저분한 달동네 풍경에 마음이 오래 머물기도 한다. 가난한 삶을 지나오고, 그 가난에서 멀리 가지 못한 사람의 시선이 대개 그럴 것이다.
한때 가난을 벗어나야 할 궁상으로만 여겼다. 가난을 견딜 뿐 가난은 불편․불만의 대상이었다. 이제 그런 불편했던 마음이 도리어 불편한가 보다. 낮은 슬레이트 지붕에 위로받는 심정이니.
하지만 지붕 안의 삶이 위태로운 건 분명한 현실이다. 재개발의 이익이 가난한 사람에게 햇살처럼 고루 나누어지면 좋겠지만 재미를 보는 사람은 대개 따로 있다. “한 시도 경계를 늦추지” 못하는 불안한 마음이 바람에 펄럭이는 이유겠다.
시인이 지붕 밑에서 보았을 꽃, “맨드라미, 다알리아, 샐비어”는 유독 가난한 동네에 어울리지 않게 보란 듯이 있다. 원색의 화려함으로 가난을 보상받고 싶어서 일까. 그래서 더 초라하고, 그래서 더 정감이 간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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