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꽃
- 꼴값에 대해 / 김세형
세상 모든 만물에는 각자의 모양새, 즉, 꼴이 있다.
그리고 그 꼴에는 대부분 꼴의 값, 꼴값이 매겨져 있다.
그런데 꼴값 중에서도 가장 천한 하질의 꼴값은
꽃을 그냥 예쁘다 놔두고 몇 발짝 떨어져 바라다보지 않고
꽃들에게 모조리 꽃값을 매겨
꽃들 모가지에 색색의 꽃값 팻말을 걸어놓는 족속들이다.
난 그동안 꽃들만큼은 꽃값이 매겨져 있지 않을 거라 생각해왔다.
꽃은 이 더러운 진흙탕 세상, 오탁악세에서도 더럽혀지지 않은 채
유일하게 남은 순수한 사랑의 마지막 은유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옛날의 금잔디에 피었던 옛 꽃들에 관한 얘기였다.
이젠 꼴값들이 세상의 꽃이란 꽃은 죄다 꽃값을 붙여 놔 버렸다.
때문에 세상엔 이제 꽃은 없고 꽃값만 남아 있다.
난 최후의 꽃이 이 세상 어느 후미진 골목 구석빼기에라도
행여 남아 있지 않을까하여 두 눈을 씻고
세상 곳곳을 비바람처럼 비틀대며 평생을 쏘다녀보았다.
그러나 꽃값이 붙지 않은 꽃은 세상에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최후의 꽃마저 꼴값들이 죽인지 이미 오래였다.
꽃들은 다 죽고 꽃값과 꼴값들만 남아 있었다.
- 『찬란을 위하여』, 황글알, 2011.
* 밥값하고 살아야 한다는 말처럼, 꼴값하고 산다는 데 무슨 문제가 있을까마는 꼴값이 지나치거나 엉뚱하면 자신의 꼴을 우습게 만들 뿐 아니라 남의 꼴에도 적잖은 타격을 줄 것이다. 그러니 잘못된 꼴값이 행세하고 번지면 그 피해는 꼴 가진 모든 자가 떠안게 된다.
“꽃”에 값을 매기는 “꽃값”이야말로 잘못된 꼴값이라는, 화자의 선언은 시원하면서도 결연한 데가 있다. 이 시대 꼴값에 대한 반성을 독자의 몫으로 돌리고 화자는 이 상황이 돌이키기 어려운 지경까지 이르렀음을 고백한다.
꽃보다 값으로 평가하고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물과 사람과 사건을 그 자체로 보지 못하고 그 이름과 그 소속과 그 쓸모로 겹쳐 보는 까닭에 제대로 된 판단을 놓치는 일도 그러한 경우이다. 꽃에서 값을 떼어 다시 꽃으로 되돌려 주는 일은, 누구든 그 자체로 충분히 존중받아야 한다는 보편적 사랑을 지지하는 일이라고도 하겠다.
원래의 순수를 간직한 “최후의 꽃”마저 이미 죽었다고 했지만 의식 있는 “꼴”이 “꼴값”을 제대로 한다면 “꽃”이 부활 못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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