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재형님 작, 끝언저리
눈보라는 흰털이다/ 문인수
백모풍(白毛風)의 허공은 큰 덩치다.
세필 자욱한 흰털이 바람에
갈기갈기 활발하다.
사내는 털옷에 털모자를 썼다. 지금은
짐승의 시간일까.
눈살 찌푸리며 단독으로 그려나간,
끌어당긴 지평선 냄새 같은 것.
꽉 다문 사내의 험상궂은 인상이
눈보라 전면 한복판에 힘껏,
시뻘겋게 뭉쳤다. 풀고 싶겠다,
무르녹고 싶겠다, 여자의 오두막은 아직도 멀다.
망국도
망명도
난분분, 온몸이 언 털이다.
*백모풍: 눈보라를 뜻하는 중국의 보통명사다. ‘중국현대미술전’에서 이 제목의 그림을 본 적 있다.
- 『배꼽』, 주(창비), 2008.
* 시인은 그림 앞에 있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를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앞의 그림은 바람에 날리는 눈이, 시인의 눈앞까지 달려드는 느낌을 준다. 화가는 흰털 같은 눈의 거죽까지 생생하게 그려냈고 그 눈보라 속을 한 사내가 잔뜩 웅크린 채 있다. 천지간 온통 눈일 테고, 눈이 몰아칠 테고, 그 속의 사내는 한 마리 “짐승”처럼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망국”이나 “망명”이란 단어를 연상케 하니, 사내는 단순한 장사꾼이나 생활인의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혁명을 꿈꾸다 좌절한 사람일 수도 있고, 혁명을 막으려다가 쫓겨 가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입술을 “꽉 다문” 모습에서 시련에 쉽게 무너지거나 포기하는 사람이 아님을 짐작케 한다. “온몸이 언 털”은 가혹한 운명의 상징이라기보다는 사내의 굳은 결의로 읽힌다.
삶이란 건 어차피 이기고 지고, 지고 이기는 연속일 뿐, 사내는 눈보라에 굴하지 않고 자기 길을 갈 것이다. 그 사내는, 사내를 화폭에 그려낸 화가의 분신일 수도 있겠고, 글로 옮겨 적은 시인의 자화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시인은 사내의 고단한 길에, 보이지 않는 저 편 멀리에 “여자의 오두막”을 둔다. 혁명보다, 이념보다, 신념보다 더 간절한 게 있지 않느냐 묻듯이, 어쩌면 그게 혁명의 이유이기도 하다는 듯이.(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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