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김석규
세상 모든 일 책에 다 나와 있는가
한 사람 몫의 슬픔과 희망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는 책 그만 덮어버린다
비에 잠긴 동네
비 때문에 부옇게 젖어 보이는 동네
입은 옷이라도 벗어주고
막걸리 한 사발
쥐뿔이다
쇠발개발 아무 것도 아닌 시여
아무 것도 아니기에 더 고마운 시여
도대체 하루 몇 편의 시를 써야
바닥을 볼 수 있느냐
나무도 지닌 악기가 있어
쉽게 빗소리를 따라 하는데
시는 하루도 멈출 수 없고*
봄이 가고 사람도 가버리고
사람 가면 사랑 하나 흔적 없는
동네에 비 오는 날
벌 수염에 묻어있는 꽃가루가 떠내려간다
* 詩不可一日輟은 麗末 牧隱 李穡의 「詩酒歌」, 酒不可一日無 詩不可一日輟에 나옴.
- 『저녁은 왜 따뜻한가』, 우리시회․움, 2011.
- 비 오는 날, 시인은 시를 낳으며 시를 앓고 있다. 나무는 “쉽게 빗소리를 따라 하는데” 정작 시인은 언어를 빌려 자연을 옮겨 적거나, 생각한 바를 드러내는 게 간단하지 않다. 그래서 고민이다. “막걸리 한 사발”에 “입은 옷이라도 벗어” 주는 가난은 대수롭지 않을지 몰라도 ‘시’는 아니다. ‘좋은 시’를 쓰는 것이 시인의 욕망이라면, 그 욕망에 부응하지 못하는 ‘시’는 고민거리일 수밖에 없다.
남루한 삶도, 삶을 닮은 시도 어쩌면 “쥐뿔”처럼 보잘것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보잘것없는 게 참된 삶(참된 시)을 지향하는 과정이라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니 “아무 것도 아니기에 더 고마운 시”라는 역설은 설득력을 얻는다.
“도대체 하루 몇 편의 시를 써야/ 바닥을 볼 수 있느냐”라는 독백은 더 좋은 시에 대한 단순한 바람을 넘어서 시의 “바닥”과 끝을 보려 용맹정진하려는 구도자의 결연한 자기 선언이기도 할 것이다.
인용한 「詩酒歌」에 ‘酒有狂詩有魔’라는 구절이 눈에 띄는데 ‘시마(詩魔)’의 자격 하나쯤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벌 수염에 묻어있는 꽃가루”가 비에 씻기는 걸 볼 수 있어야 한다고.(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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