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사춘기/ 김나영

톰소여와허크 2012. 3. 4. 23:31

사춘기/ 김나영

 

교과서에서만 배우던 가내수공업을

어느 날 아버지가 방안 가득 부려놓았다

삽십 촉 전등 아래 고무판화처럼 박혀서

온 식구들이 너덜너덜한 삶을 풀칠하기 시작했다

봉투를 붙이고 붙이고 가난을 봉투 속에 밀어 넣고

수천 번 봉하였다 지문이 닳도록 봉투를 붙였다

거기서 등록금이 나오고 밥이 나왔다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봉투를 붙여도 한번 기운 가세는

반듯해지질 않았다 잘못 재단된 봉투의 각처럼

습자지처럼 얇아진 손가락 끝에서 피가 스며 나왔다

“아직 지문이 찍히지 않는데요, 다음에 다시 오래요”

지문이 돋아나는 속도를 기다려 더디게

더디게 만들어지던 언니의 주민등록증

책갈피를 넘기는 손끝보다

봉투를 넘기는 손끝이 더 예민해 가던 시절

어딜 가도 나는 삶을 부쳐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학교 가는 일 따위는 일종의 요식행위 같았다

조회 때마다 수시로 빙그르르 돌아가던 운동장

그 운동장에 노오랗게 머리를 처박던 태양

아무리 풀칠해도 봉해지지 않던 가난의 아가리

입 한번 벙긋하지 못하고 지나간 나의 사춘기

나는 아직 그 방안에 식은 풀그릇처럼 담겨져 있다

- 『수작』, 애지, 2010.

 

* 이성에 대한 관심, 감정의 기복, 반항적인 제스처까지 .사춘기의 특징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길 많이 듣는다. 부모에 대해 전적으로 의존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독립심을 갖게 되는 것도 이 시기다.

  위 시의 “나”와 “언니”의 사춘기는 그런 특성과는 무관해 보인다. 정신적인 독립은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등록금”과 “밥”으로 대변되는 생계를 위해 가계로부터 전혀 분리될 수 없는 상황이 사춘기를 지배해 버렸다.

  “봉투를 붙이고 붙이고”, “지문이 닳도록” 붙이고, “손가락 끝에서 피가 스며” 나올 정도로 붙이고 또 붙이는 가난 체험이 있었기에 “어딜 가도 나는 삶을 부쳐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는 유머와 비애가 섞인 표현을 얻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가난이든 그로 인한 상처든 뇌리에 “고무판화처럼 박혀” 쉽게 잊히지 않는 기억 한둘쯤은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식은 풀그릇”에서조차 공감하고 위로 받는 것은 비슷한 경험을 떠나서 진정성 있는 시의 힘으로 봐야 할 것이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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