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ㅂ-ㅇ)

이용악 (1914~1971, 함북 경성)

톰소여와허크 2012. 4. 5. 15:41

 

이용악 (1914~1971, 함북 경성)

 

  이용악은 1914년 11월 23일 함경북도 경성읍에서 출생하였다. 이 지역은 고려나 조선시대에 거란족, 여진족 등과 우리미족이 세력을 다툼을 하던 일종의 변두리 지역이다. 특히 그곳은 조선시대(세종에서 성종대)에는 몇 차례에 걸쳐 국경을 개척하면서 남쪽 사람들을 이민시킨 변방이기도 하다. 이 때 함경도로 이주시킨 사람들은 그 대개가 경상도나 전라도 쪽의 백성들로 별도의 생활보장 대책도 없이 국경지방에 옮겨진 것이었다. 결국 이용악은 오래 전부터 유이민이 궁핍 감정이 몸에 배인 지역에서 자란 셈이다.

  경성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고등 보통학교를 다닌 다음 일본의 동경소재 상지대학 신문과에 수학하던 중 [신인문학] 35년 3월호에 <패배자의 소원>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오게 된 시골의 문학청년이었다. 이용악의 집안은 누대에 걸쳐 상업에 종사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면서 그 주된 생활근거지로 그가 태어난 고향(함북 경성)을 벗어나지 않았으며, 줄곧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금을 얻기 위해 일찍부터 몸소 소달구지에 소금을 싣고 러시아 영토를 넘나들었으며 그의 어머니 아버지 또한 같은 생활을 이어받았던 듯하다. 계속되어 온 유랑생활에서 급기야는 용악의 아버지가 낯선 땅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아버지의 죽음이 정확히 언제 발생했는지는 알려진 것이 없으나, 다섯 남매와 홀어머니가 낯선 땅, 낯선 나라에 남은 셈이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의 어머니는 국수장사, 떡 장사, 계란장사 등으로 어렵게 생계를 꾸려야 했지만 그 와중에서도 삼형제만은 모두 고급학교에 진학시키는 억척스런 생활인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처럼 넉넉지 못한 집안에서 자라난 용악은 일본으로 건너가 상지대학에 유학하면서 부두선박 노동을 빼놓고는 온갖 품팔이 노동꾼으로 피땀을 흘려 최하층 생활 권내를 유전하면서 학비를 조달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고단한 고학생활을 하면서도 용악의 문학에 대한 정열은 치열하게 불타올랐다. 유학한 다음해(1935년) 패기만만한 동향의 김종한 시인을 만나 둘이서 동인지 「이인 二人」을 펴냈다. 이 기간 중에 방학 때면 으레 귀향하여 우리 동포들이 많이 거주하는 간도 등지를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만주 유이민 들의 비극적인 삶의 전모에 깊이 주목하고, 유학시절에 잇따라 발간한 시집 『분수령』과 『낡은 집』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용악 시인을 두고 평론가 최재서는 "생활을 생활대로 생활에서 우러나는 말로 노래한다는 의미에 있어서의 인생파 시인"이라고 평했는데, 이런 시적 진실성이야말로 1930년대 후반 그가 서정주, 오장환 시인과 더불어 조선시를 걸머질 '시삼재(詩三才)'로 불리게 된 근본 이유였다.

  1939년 귀국한 후 최재서가 주관하던 "인문평론"의 편집기자로 근무하는 한편, 1940년 무렵에는 모종의 정치 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하기도 한다. 일제의 폭압적 식민 지배가 극에 달해 가던 때인 1942년 고향 경성으로 귀향했던 그는 해방이 되자마자 상경,'조선문학가동맹'의 맹원으로, "중앙신문"의 기자로 바쁜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제3시집 『오랑캐꽃』(1947)과 제4시집 『이용악집』(1949)을 내는 등 왕성한 시작 활동을 수행한다. 1949년 모종의 정치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갇히게 된다. 그러나 1950년 6월 28일 북한군의 서울 점령과 함께 출옥, 1951년 3월부터 1952년 7월까지 '조선문학가동맹'시분과 위원장 일을 보면서 한국전쟁기를 보낸다.

  한국전쟁후 벌어진 남로당계 문인 숙청에서 살아 남은 그는, 1956년 11월부터 '조선작가동맹출판사'의 단행본 부주필을 역임하는 한편,『조선문학』1956년 9월호에 발표한「평남관개시초』로 1956년 조선인민군창건 5주년 기념 문학예술상 시부문 1등상을 받는다.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으나, 몇몇 조사에 따르면, 1960년대 이후에는 북한 문학의 금과옥조가 되는 '주체문학'의 성립과 발전에 적잖은 기여를 하다가 1971년 무렵 폐렴으로 병사한 것으로 전해진다.